123화 함정 속의 함정
발할라의 습격은 신속했다.
목표는 단 한 명 마르체니.
그들은 속전속결로 마르체니부터 노렸다.
화살이 마르체니에게로 날아들었다.
허공에 피어난 불꽃이 화살을 모두 막아내었다.
“여기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시테르가 불꽃을 피워내며 말했다.
그는 마르체니뿐만 아니라 다른 짐꾼들도 함께 지켜주었다.
“감사합니다 아시테르님.”
“저희들까지……!”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아시테르가 가리킨 곳으로 짐꾼들이 다시 움직였다.
그 사이 뛰쳐나간 왕실기사단 단원들이 전투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게벨은 선두에 서서 습격자들을 처리하는데 앞장섰다.
그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습격자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개중에는 끝까지 반격을 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게벨이 그런 공격들에 당해줄 리 없었다.
게벨뿐만 아니라 왕실기사단도 제대로 실력을 뽐내는 중이었다.
사실 이들도 노스 왕국에서 아시테르에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이 눈에 불을 켜고 수련에 박차를 가하니 그들로서도 느끼는 바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아시테르에게 자신들 또한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는 것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본신의 실력들을 드러내었다.
“오오오!!”
“멋지십니다!”
“대단해요……!”
짐꾼들이 그들의 활약에 감탄했다.
순식간에 습격자들을 정리한 왕실기사단과 게벨이 혀를 찼다.
“이제부터 시작일 거다. 모두 경계를 단단히 해라.”
“예!”
“예!”
게벨의 말에 모두가 일제히 답했다.
그 이후로도 발할라의 습격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끈질기게 마르체니 일행을 물고 늘어졌다.
소규모로 계속해서 습격을 가해오니 게벨도, 왕실기사단도 서서히 체력이 소모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의 교전을 거듭하다 아시테르 일행은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시겠습니까?”
“그래요. 다들 지친 것 같으니…….”
마르체니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왕실기사단은 물론 짐꾼들도 상당히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게벨이 마을 사람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이곳에 쉬어갈만한 곳이 있습니까?”
“저기 여관이 있을 겁니다.”
짧막한 대답과 함께 그는 다시 밭일에 집중했다.
“대답 고맙소.”
게벨은 사내가 가리킨 곳으로 마르체니와 일행을 이끌었다.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곧 마을의 이장이라는 자가 다가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이 마을의 대표 본레레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저희는 이곳을 지나가는 상인들인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하루 머물다 가도 되겠습니까? 값은 후하게 치러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요. 부디 편안하게 쉬다 가시길 바라겠습니다.”
본레레는 가벼운 인사와 함께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를 본 마르체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생각이 깊은 사람이네.”
“예?”
“우리들이 피곤할까봐 이것저것 묻지 않고 바로 자리를 비켜주잖아.”
“아…….”
마르체니는 별다른 생각이 없어보였지만 아시테르는 아니었다.
그는 본레레를 보며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보통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마을에 낯선 사람들이 나타난다면 경계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곳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마르체니 일행을 경계하지 않았다.
거기다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할 일을 하면서도 은근히 이쪽을 신경 쓰는 듯한 눈치였다.
그것은 경계가 아닌 주시였다.
“뭔가 이상한데…….”
아시테르는 곧바로 마르체니와 게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마침 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어떤 게? 내 옷이?”
마르체니가 마침 갈아입은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황급히 손사래 쳤다.
은근히 옷과 외모에 민감한 마르체니였다.
조금이라도 오해의 소지를 남겼다간 또 얼마나 시달릴지 몰랐다.
“아뇨. 그런 말이 아닙니다.”
“알아. 농담이었어. 그런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이 마을의 분위기 말입니다.”
“마을의 분위기가 왜? 노스 왕국과 다르게 너무 조용해서?”
“이런 외진 곳의 마을에 낯선 사람들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분들의 반응이 너무 태연하기만 합니다. 전혀 경계하는 법이 없어요. 보통 낯선 이가 나타나면 누구라도 처음엔 경계하게 마련이잖아요?”
“흐음… 네가 너무 예민해져서 그렇게 느낀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 마르체니님께서도 많이 지쳐있을까봐 이 말을 전달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 싶어 직접 말을 전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경계를 안 하는 것도 그렇고… 보통은…….”
아시테르가 말을 멈췄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본레레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마르체니의 눈짓에 게벨이 문을 열어주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짐정리가 되는대로 식사를 준비해드리면 될까요?”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짐 정리가 끝나시면 1층으로 내려와 주세요. 식사를 준비해놓고 있겠습니다.”
“알겠어요.”
소년이 나가고 아시테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묘하게 상황이 딱딱 들어맞는 느낌이에요. 마치 준비된 것처럼…….”
“어떻게 생각해요 게벨 아저씨?”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몇몇 이상한 점들을 느끼고 있습니다.”
“두 분 다 너무 의심병이 도지신 것은 아니고요?”
“저희는 모든 상황을 다 의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가씨를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아시테르는 훌륭한 판단을 한 거라 생각합니다. 작은 의심이라도 넘기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 말해주었으니까요.”
게벨이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마르체니는 못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슬며시 번지고 있었다.
게벨과 아시테르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늘 노력해주고 있으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게벨 아저씨. 저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놈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은 바로 독살입니다.”
“독살이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래에 내려가서는 음식이 나오더라도 드시는 척만 하십시오. 식사는 저희가 따로 챙겨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마을 사람들이 독이 든 음식을 내올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발할라와 관계없는 자들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발할라와 관계있는 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성 있는 일입니다.”
“알겠어요. 그깟 배고픔쯤… 참아볼게요.”
마르체니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이를 본 게벨이 피식 웃었다.
참 묘한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잔뜩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을 마르체니가 어째서인지 이번엔 순순히 자신의 말을 받아들여주었다.
어쩌면 아시테르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어느샌가부터 그녀가 은근히 그를 의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곧바로 아시테르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사실을 은밀하게 일러두겠습니다.”
“고맙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제 말을 이렇게 선뜻 받아들여주셔서…….”
“당연한 것 아니겠나.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해왔으니 이미 동료나 다름없지. 거기다 자네는 위대한 전사이신 파쿠황님께 인정받은 사내네. 그것만으로도 자네의 말을 들어줄 이유는 충분해.”
게벨의 말에 아시테르가 머리를 긁적였다.
쑥스러움에서 나오는 발로였다.
어쨌든 마르체니는 그날 아시테르의 조언을 십분 받아들여 음식을 입에 가져가기만 할뿐 씹어 삼키진 않았다.
왕실기사단과 짐꾼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벨이 미리 데려온 강아지에게 음식을 먹였다.
허겁지겁 먹던 강아지는 곧 네 발을 부들부들 떨며 힘겨워했다.
“역시나…….”
그들은 은밀하게 음식들을 처리하며 먹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다.
잠시 후 드르렁 코를 고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기 시작하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본레레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멍청한 놈들.”
그는 혹시 몰라 수하 한 명을 시켜 여관 안을 둘러보게 했다.
은밀하게 여관 안을 돌아다녀본 수하가 돌아와 보고했다.
“대부분 잠에 들었고 두 명 정도가 불침번을 서고 있었습니다.”
“멍청한 놈들. 여기까지 와서 긴장의 끈을 놓친 건가.”
“어쩌면 잠든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잠든 척 하는 걸지도요…….”
“나도 그 정도는 의심해보고 있다. 마르체니 공주 옆에 게벨이 있는 이상 방심할 순 없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놈들이 먹은 음식에는 독이 들어 있었으니까. 설사 깨어서 우리들의 습격을 대비하고 있다고 해도 서서히 찾아오는 어지러움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본레레가 슬쩍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삼십 여명의 인영이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놈들을 처리하고 마르체니 공주도 함께 죽인다.”
척!
대답대신 일제히 고개를 숙여 답했다.
마침내 본레레의 수신호가 떨어지자 인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가라 마르체니 공주.”
“우리 공주님이 가긴 어딜 가느냐.”
그 순간 뒤편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이를 눈치챈 검은 인영들이 방향을 틀었다.
“축하한다 아시테르. 너의 감이 맞았구나.”
“게벨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크흐흐. 나의 의심에 확신을 심어준 것은 너다.”
게벨이 손가락을 우두둑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멀쩡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검은 인영들이 놀란 기색이었다.
“어라? 많이들 놀랐나보구나.”
“그러게요.”
아시테르가 손에 불꽃을 피웠다.
두 사람을 보며 본레레도 당황한 낯빛이었다.
독에 중독되었다면 이미 움직이지 못할 상태여야만 했다.
그런데 저들은 멀쩡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시테르가 손가락을 움직이니 불꽃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화릉!
그와 동시에 게벨이 몸을 움직였다.
그는 투기를 마음껏 발산하며 눈앞에 있는 발할라 인원들을 묵사발 내었다.
아시테르도 화염 마법으로 적들을 공격했다.
이곳에 있는 발할라의 인원은 무려 삼십 명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많은 인원이 겨우 두 사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저게 바로 오랫동안 마르체니 공주의 곁을 지킨 게벨이라는 사내…….”
게벨에 대한 정보는 본레레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청년에 대해서는 크게 들은 것이 없다.
왕실기사단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 그가 화려한 불꽃쇼를 펼치며 발할라의 인원들을 차례로 쓰러트리고 있었다.
“쳇. 상정외다. 모두 철수한다.”
본레레의 상황판단은 빨랐다.
그는 자신들의 준비가 미숙했음을 깨닫고 곧바로 수하들을 물렸다.
여기서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게벨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거기다 생각보다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는 아시테르도 문제였다.
“분명 음식과 술을 먹었다더니… 멍청한 놈들!!! 그거 하나 똑바로 확인하지 못하고……!”
시원하게 욕을 내뱉은 본레레가 수하들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떠나가는 그들을 보며 아시테르와 게벨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런 두 사람 쪽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왕실기사단의 검사들 중 한 명이었다.
“저기… 이쪽으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아시테르와 게벨이 동시에 달려 나갔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멍한 얼굴로 있던 마르체니가 인기척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게벨 아저씨…….”
“공주님…….”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
그것은 수많은 노인들의 떼죽음이었다.
수십 구의 시체가 난자되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부패도 되지 않고 까마귀가 파먹은 흔적도 없는 것으로 보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들이었다.
“아저씨… 설마… 원래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게벨이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몇몇 짐꾼들과 왕실기사단이 끝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