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왔습니다만-124화 (124/424)

124화 무언의 대화

발할라의 습격이 있었던 뒤로 특별교류단은 별다른 대화 없이 조용히 걸었다.

노인들의 떼죽음.

그 참혹한 광경은 그들로 하여금 침묵을 불러일으켰다.

게벨이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아시테르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게 바로 ‘발할라’라는 놈들의 실체다.”

“예?”

“놈들의 대의명분은 그럴 듯 해. 차별 없는 세상. 귀족도, 평민도, 천민의 신분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그런 왕국을 만들겠다 말하지. 모든 사람들의 목숨은 소중하며, 모든 인격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말은 그럴 듯 하지. 하지만 봐라. 결국 놈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자들이야.”

“…….”

“우리들 때문에 노인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은 가져도 좋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진 마라. 그들의 죽음을 이용해 우리들을 죽이려 했던 그놈들에 대한 분노도 가져야 할 거야.”

게벨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특히나 잘 알고 있었다.

발할라,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인간들이었다.

아시테르도 그런 게벨의 말을 가볍게 듣지 않았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노인들을 몰살해버린 그들의 행동을 보며 아시테르 또한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게벨이 아시테르의 어깨를 짚었다.

“솔직히 우리 왕국의 귀족들이 모두 잘하고 있다 말할 순 없겠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발할라가 나라를 뒤집으면 더 큰 혼란과 공포만 다가올 뿐이란 거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놈들이 원하는 것은 귀족들의 죽음이니까. 귀족들이 죽으면 평민들과 천민들만 남으니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질 거라는 허무맹랑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아라. 정말 귀족들이 죽는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이 평등을 이루며 살아갈까?”

“…….”

“아니. 분명 발할라에 가담해 있던 자들이 다시금 위에 서고자 할 것이다. 결국 놈들은 왕국의 전복만을 꿈꾸고 있을 뿐이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게벨의 설명에 아시테르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벨이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네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너 또한 저들의 꼬임에 넘어가지 말라는 바람에서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설사 생각이 같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면에서는 아주 다르니까요.”

“그래. 지금은 그런 말이라도 안심이 되는구나.”

게벨과 아시테르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맞은 편에서 마법기사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있던 사내가 마르체니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어서오십시오 마르체니 공주님.”

“하인트 단장님…! 여기서 뵙다니 정말 반갑네요.”

“공주님 일행을 안전하게 왕성까지 모셔다드리기 위해 마중나왔습니다.”

“섬광기사단 모두가요?”

“예. 본래 다른 곳에서 기다기고 있었는데… 뒤늦게 공주님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달려왔습니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그럼 가실까요.”

하인트가 수신호를 내리자 섬광 마법기사단이 일제히 산개하며 특별교류단을 중심으로 섰다.

섬광 마법기사단을 본 왕실기사단과 짐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르체니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섬광 마법기사단에게 맡기고 너도 그만 쉬어. 그동안 고생 많았잖아.”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끝까지 제 할 일을 다하겠습니다.”

아시테르의 단호한 답에 마르체니도 애써 그것을 말리진 않았다.

게벨도 아시테르의 말에 동감하는 눈치였다.

그 역시도 마르체니의 곁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때 하인트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너는 마법기사 아카데미의 학생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름이?”

“아시테르입니다.”

“자네가 아시테르였군.”

“저를 아십니까?”

“미하엘을 기억하나?”

“아……!”

미하엘이라면 과거 반키라스를 만났을 때, 아시테르 일행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해준 마법기사단원이었다.

그 당시 미하엘은 네크로맨서에게 당해 쓰러져 있었다.

“그때는 우리 단원이 신세를 많이 졌다.”

“신세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너희들의 활약은 들었다. 정말 고맙다.”

하인트는 아시테르에게 고개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단장급이나 되는 인물이 이렇게 과감하게 감사 인사를 표하자, 당황한 것은 아시테르였다.

그는 하인트보다 더욱 깊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별 말씀을요……!”

“보답이라고 하기엔 뭣 하지만… 왕성까지는 우리들이 안전하게 호위해줄테니 푹 쉬도록 해라.”

“예!”

하인트는 할 말을 마치고 다시 선두로 나아갔다.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섬광 마법기사단은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기세로 주변을 경계했다.

모두가 상당한 마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동안 이렇게 마법기사단 모두가 모인 것을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한데 모아두고 보니, 노스 왕국의 전사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그들 덕분에 아시테르와 마르체니 공주 일행은 무사히 왕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섬광 마법기사단이 그들을 지켜주는 동안에는 그 어떠한 헤프닝도 벌어지지 않았다.

숙소와 음식들까지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는 섬광 마법기사단 덕분에 마르체니 일행도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왕성에 도착하자마자 하인트가 마르체니 공주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들은 아직도 수행해야 할 임무들이 산더미였다.

바쁜 이들임을 알았기에 마르체니 공주도 그들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하인트님?”

“예. 말씀하십시오 공주님.”

“어떻게 알고 저희들을 마중나와 주신 건가요?”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탁이요?”

마르체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위해 따로 섬광 마법기사단에 부탁을 할 이가 누가 있을까.

그녀의 시선이 게벨에게로 향했다.

그는 두 눈을 멀뚱멍뚱 뜨고 있었다.

게벨도 모르는 눈치였다.

게벨이 아니면 누가 이런 부탁을 해줄까.

그녀가 재차 물으려는 때 하인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묻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저… 섬광 마법기사단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마르체니도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인트가 그런 마르체니에게 다시 한 번 가볍게 인사를 건네곤 뒤돌아서 떠나버렸다.

게벨이 마르체니의 곁으로 다가왔다.

“누가 하인트 단장에게 부탁했을까요… 단장급에게 부탁을 할 수 있는 정도라면…….”

“몇 없죠. 5대 가문의 가주나 군단장인 테르세우스님. 그 정도…….”

“한 분 더 있습니다, 공주님.”

“……?”

“그들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 공주님의 아버님 말입니다.”

“제 아버지가요…? 그럴 리 없어요.”

마르체니의 목소리가 어쩐지 차갑게 들렸다.

아시테르는 영문을 모르고 게벨을 바라보았지만, 게벨은 씁쓸한 미소만 머금을 뿐이었다.

“고생 많았다 아시테르.”

“별말씀을요. 저에게도 유의미한 여행길이어요.”

“크흐흐. 그럼 다음 번에도 함께 가겠나? 보아하니 공주님께서도 자네가 썩 마음에 드신 모양이야.”

“저야 언제든 불러주시면 감사하죠!”

“후후 알았다. 어차피 드래프트까진 시간이 조금 남은 듯 하니, 그동안 다른 일이 있다면 불러주도록 하마.”

“네!”

“그럼 가서 쉬어라.”

게벨과 인사를 나누고 아시테르는 곧바로 아카데미로 향했다.

오랫동안 비운 숙소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잠자리에 몸을 뉘였던 아시테르는 이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노스 왕국에서의 일들이 떠오른다.

이그트와 대결을 벌였던 일.

심장을 뛰게 만들었던 파쿠황의 힘.

그때 보았던 장면은 아직까지도 눈에 선했다.

거기다 이제는 노인들의 참상까지 머릿속에 더해졌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혹은 그곳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살 수 있었을까.

한번씩 눈을 감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시체를 수습해 화장(火葬)하는 동안 게벨이 중얼거리 듯 말했다.

늙고 병든 노인들을 한 마을에 몰아넣는 천민들의 마을이 있다고.

그들이 노인들을 그곳에 몰아넣는 이유는 간단했다.

천민이라는 족쇄를 자신들에게 물려주었다는 것.

그것 하나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질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가난을 물려주었다 해서, 천민이라는 신분을 물려주었다 해서 부모를 저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게다가 마지막에 보여준 마르체니의 표정까지도 괜히 신경쓰였다.

노스 왕국에서도 그녀는 이따금씩 그런 표정을 보여주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분명 그녀 나름대로의 사연이 많은 듯 했다.

이런 잡생각이 많아지면서 잠자리에 들기가 뒤숭숭 했다.

이럴 때는 몸을 고단하게 만드는 것이 최고였다.

수련에 몰두하고 또 몰두하다보면 복잡한 생각들이 조금은 풀어지리라.

하지만 수련장으로 가는 아시테르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가 수련장에 도착했을 땐, 한 명의 여인이 먼저 와있었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전과는 다른 점이 있다.

“여기서 또 보네요?”

“아아…….”

알렌시아가 아시테르를 보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알렌시아를 바라보고 있으니 지금껏 머릿속을 괴롭혀 왔던 생각들이 서서히 잊혀져 가는 기분이었다.

아시테르가 멍하니 서 있자 알렌시아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고 서 있어요?”

“아… 아니에요.”

“오랜만에 봐서 제가 반가운가봐요?”

“그렇죠. 몹시 반갑네요.”

아시테르가 알렌시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가 미소를 보이자 이번엔 알렌시아가 괜히 시선을 피했다.

“뭐에요? 그 바보같은 웃음은.”

“그냥… 좋아서요.”

“네?”

“이렇게 알렌시아 당신을 만나게 되니 반갑고 좋아요.”

아시테르는 자신이 말하고도 순간 아차 싶었다.

마음속에 있던 말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고 말았다.

“크… 크흠… 저도 반갑네요.”

알렌시아의 말에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뒤돌아 아시테르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수련하러 온 것 아니에요?”

“맞아요.”

“그럼 빨리 올라와서 수련이나 해요.”

“그럴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그냥요. 괜히 묻고 싶어지네요. 오늘따라.”

알렌시아가 고개를 돌려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깐동안 아시테르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더니 이내 슬쩍 걸음을 옮겨 아시테르의 맞은 편에 섰다.

“특별히 제가 당신의 상대가 되어 드릴게요.”

“네? 상대해달라고 부탁드리진 않았는데…….”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지만…! 특별히 대련 상대가 되어드리는 거에요.”

“아니 그러니까…….”

뭐라 말하려던 아시테르가 곧 피식 웃었다.

그가 웃자 알렌시아가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착각말아요. 저도 오늘따라 마침 대결 상대가 필요해서 그래요.”

“네. 고마워요.”

아시테르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표정을 읽은 것 같았다.

복잡함에 어두워져 있던 표정을.

그래서 저렇게 나름의 방식으로 배려해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른 생각 말고 집중하는 게 좋을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크게 다칠테니까. 제 마법은 특히나 그래요.”

“그럼요. 그런 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화염이 맺히기도 전에 머리 위로 전격이 떨어졌다.

아시테르는 그것을 피해내며 반격을 가했다.

불꽃이 찰랑거리며 알렌시아에게로 퍼져나갔다.

알렌시아의 전격이 화염을 갈랐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대련에 집중했다.

따로 말로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서로의 마법과 눈빛만으로 두 사람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