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재회
아시테르가 레플렉시오 감옥에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성에서 사람이 왔다.
마르체니 공주의 부름에 아시테르도 다시 왕성으로 향했다.
“왔어?”
“예. 부르셨습니까 마르체니님.”
“크흠… 이번에는 지난번 도움을 받았던 것을 조금 갚고 싶어서 불렀어.”
“당치도 않습니다. 저도 덕분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는걸요.”
“아무튼 각설하고. 이번에 우리 왕성에 누가 오는 줄 알아?”
“…….”
왕성의 일을 아시테르가 알 리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르체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마. 이번에 우리 왕성에 마녀들이 방문해.”
“예!? 마녀들이요?”
“그래! 마녀들이 마녀의 숲에서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고.”
“아…….”
덕분에 아시테르는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어비스 던전에서 나와 마녀를 만났던 일.
자연스럽게 세아츠리스의 모습도 떠오르자, 아시테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왜 그렇게 웃어?”
“그냥… 친구 한 명이 떠올라서요.”
“마녀들 얘기하는데 갑자기 친구는 왜?”
“후후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아시테르가 가볍게 넘기며 대답했다.
이에 마르체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쨌거나 그녀는 다시 고개를 살짝 치켜들어 보였다.
마치 ‘어떠냐’라는 말을 무언으로 전하는 듯 했다.
일반 귀족들도 평생동안 한 번 보기 힘든 것이 바로 마녀라는 존재였다.
그런 마녀를 보여주기 위해 아시테르를 불러주었으니, 이번만큼은 그녀도 아시테르 앞에서 주름 좀 잡아보고 싶었다.
나름 자신이 공주라는 위치에 있건만 그동안 아시테르에게 그에 걸맞는 것들을 전혀 보여주질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아시테르에게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 다시 한 번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혹시나 아시테르가 자신을 만만하게 보진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아시테르보다 마르체니가 더 어렸다.
노스 왕국에서도 아시테르가 여러 방면으로 활약하며 파쿠황과 이그트의 마음에 들 동안 자신은 공주로서 이렇다 할 면모들을 보여주지 못했으니, 더더욱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마르체니가 일부러 과장스런 몸짓을 하며 말했다.
“후후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야. 너에게 마녀까지 보여줄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알겠니?”
“마르체니님은 마녀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 아… 어… 음… 어렸을 때 한 번……?”
거짓말이었다.
마르체니도 마녀를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시테르에게 그런 사실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오오…! 마르체님도 어렸을 때 마녀를 보신 적 있었어요?”
“도? 그럼 너도 마녀를 봤다는 말이야 뭐야?”
“저도 어렸을 때 마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마녀인지도 몰랐지만요…….”
“거짓말치지마. 네가 어떻게 마녀를 봐? 마녀는 마녀의 숲에 들어가야 볼 수 있는데. 마녀의 숲에 허락받지 않은 이가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어.”
“흐음… 그렇지만 제가 처음 사귄 친구도 마녀인 걸요.”
“뭐!!?”
아시테르의 말에 마르체니가 소리쳤다.
그녀가 잠시 두 눈을 깜빡였다.
거짓말을 치고 있는 거라기엔 아시테르의 표정이 너무나 순수해 보였다.
그래도 순순히 믿을 순 없는 말이었다.
마녀와 친구를 맺을 수 있다니!
단언컨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게다가 마녀들은 인간을 싫어한다.
그런 마녀와 친구라니, 아무리 상대가 아시테르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만큼은 네 말을 믿기가 힘든데.”
“정말이에요.”
“아무리 내게 지기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해? 인간이 무슨 수로 마녀와 친구가 될 수가 있어?”
“으음… 제가 마르체니님께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ㅈ…….”
“정말 진실이라고?”
“네.”
“그럼 증명해봐. 진짜인지 아닌지 말이야.”
“어떻게 증명하죠……?”
“그 친구의 이름은 기억하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잊지 못할 이름이니까요.”
아시테르가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그의 웃음에 마르체니가 인상을 썼다.
괜히 기분이 나쁘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게벨도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웃으시는 거에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단지… 지켜보고 있으니 재밌어서 말입니다.”
“재밌다뇨!? 어디가!?”
“늘 어른스럽게만 보이려 하시던 아가씨가 그래도 아시테르 앞에서는 그 나이대의 소녀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 보여서요.”
“제… 제가요?”
이번에도 불쾌한 표정이다.
그래도 게벨은 알고 있었다.
마르체니는 일부러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아시테르가 싫거나 불쾌했다면 이렇게 부르지도 않았을 터다.
하지만 그녀는 노스 왕국에 다녀온 이후로도 작은 핑계를 불러일으켜 아시테르를 종종 부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시테르도 이제는 마르체니 공주를 대하는 게 제법 편해져 있었다.
아마 마르체니 공주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아시테르가 편하게 대해주는 것이 좋으면서도 자신을 만만하게 보거나 가엾게 보진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마르체니의 마음에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찌 할 줄 몰라 저렇게 툴툴거리는지도 몰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시테르는 이러한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아시테르는 그대로 아시테르였다.
“그래서 마르체니 공주님과 저렇게 잘 지내는지도.”
아시테르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르체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게벨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아시테르의 커다란 장점이었다.
“아 몰라! 나는 네 말을 믿을 수 없어.”
“어째서요!?”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 믿지!”
“섭섭합니다!”
저 섭섭함을 당당하게 외치는 용기.
아시테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마르체니 공주 앞에서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겠는가.
이제보니 은근히 아시테르와 마르체니 두 사람은 남매 사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쩌라고!?”
점점 유치해지는 말싸움에 결국 게벨이 중재자로 나섰다.
“아가씨. 이제 슬슬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들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벌써요?”
놀란 마르체니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직까지도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너도 오늘 이곳에 왔으니까 마녀들은 보고 가. 내 호위로 함께 하면 될 거야. 게벨 아저씨한테는 미리 말해놨으니까 오늘만큼은 왕실기사단 갑옷을 입도록 해.”
“예……!?”
“그렇게 다닐 순 없잖아. 개인호위라도 왕실기사단 갑옷을 입고 확실한 모습을 보여야지.”
마르체니가 아시테르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편안함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아시테르이다보니,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귀족들의 격식 차리는 옷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게벨을 따라 왕실기사단 갑옷을 입고 나왔다.
“후후 오늘 하루 동안 왕실기사단인가?”
“저…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건가요?”
“안 되지.”
“예……!?”
아시테르가 놀라 게벨을 쳐다보았다.
게벨이 검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가져갔다.
결국 비밀이라는 얘기였다.
“공주님께서 자네를 위해 특별히 기획해주신 일이야. 말은 저렇게 하셔도 은근히 자네를 챙기고 계신다고. 지난번에는 자네가 말한 빈민가에 손수 물건들도 챙겨주셨어.”
“아… 얘기는 들었습니다.”
“공주님께는 또래 나이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그대가 유일하니… 앞으로도 종종 공주님의 얘기상대가 되어주게. 그렇게 해달라는 뜻에서 나도 이 일을 돕는 것이니.”
“저는 얼마든지 좋습니다. 마르체니님과 대화를 나누는 게 즐겁거든요.”
“역시 자네는… 우리 공주님의 호위로 들어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가, 지금이라도 왕실기사단이 되어볼 생각은 없나?”
“죄송합니다. 저는 마법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크흠… 아쉽구만 아쉬워. 다 갈아입었으면 나오게.”
아시테르가 왕실시가단의 갑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갑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던 하녀들은 먼발치로 물러났다.
“훨씬 낫구만. 잘 어울려.”
갑옷을 입은 아시테르의 모습이 낯설긴 했지만 퍽 잘어울렸다.
마르체니도 아시테르를 보며 한 마디 했다.
“그래도 나쁘진 않네.”
그러면서도 그녀는 슬쩍 아시테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이제는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마르체니와 아시테르, 게벨 그리고 노스 왕국으로 갈 때 함께 했던 왕실기사단원들이 함께 움직였다.
“이야… 아시테르. 잘 어울리는데?”
“처음엔 못 알아봤다.”
“이참에 너도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지 그러냐? 잘해줄 수 있는데.”
“네 실력이야 이미 우리들 모두 알고 있으니까.”
왕실기사단원들이 아시테르를 반가워하며 한 마디씩 날렸다.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가운 것은 아시테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나중에 우리 훈련 할 때 한 번 찾아올 테냐?”
“그래! 그거 좋다. 와서 직접 보고 느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마법기사만 멋있는 게 아니야. 우리 왕실기사단도 신념을 가지고 왕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들에 아시테르가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저야 감사한 기회죠. 그런데 저어…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친구들과도 약속한 바가 있어서 마법기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겁니다.”
“쩝… 그러냐. 그래도 너라면 언제든 기회는 열려 있으니까 생각 바뀌면 얘기해라.”
“네!”
아시테르의 대답에 다들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때 마르체니가 입을 열었다.
“비가 오는 군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낀 어두컴컴한 날씨에 빗방울이 시원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마녀들이 온다고 해서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마녀들이 와서 그런지 날씨까지 이러네…….”
그들이 한 마디씩 투덜거리는 동안 아시테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비가 오는 날씨가 좋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의 시원한 내음이 좋았고, 함께 어우러지는 이 청량한 기분이 좋았다.
빗물이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들리는 소리도 마음을 간질이는 것 같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배게 했다.
그들은 빗물을 맞으며 한곳에 나열해 서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흐르고, 마침내 저만치서 마녀들이 모습을 보였다.
기이한 모자를 쓴 마녀들을 보며 왕실기사단원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순백의 피부에 모자 아래로 드러난 뾰족한 귀.
날렵한 눈매에 짙은 눈썹.
날카로운 인상의 마녀들이 그들만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녀들은 모두가 여자라더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 마녀들은 마녀의 숲을 지키는 거대한 나무의 꽃잎에서 태어난다고.”
“꽃잎에서?”
“응.”
“거참 신기하네…….”
“조용해라.”
게벨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있는 마녀.
붉은 머리칼에 아름다운 눈동자를 지닌 여인이었다.
“우와…….”
“허어…….”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군계일학.
저 아름다운 마녀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미모였다.
사람의 넋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의 여인은 키마저도 상당히 커 더욱 눈에 띄었다.
앞만 바라보며 걷고 있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고운 아미를 찌푸린다.
여인의 시선이 마르체니쪽을 향했다.
잠깐 걸음을 멈췄던 여인이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뭐… 뭐야……?”
여인의 걸음에 마르체니가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여인은 마르체니를 조용히 지나쳤다.
그녀가 멈춘 곳은 다름아닌 아시테르의 앞이었다.
“어… 어어……?”
아시테르도 함께 놀라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놀란 이유는 바로 여인의 목에 걸려 있는 불꽃 모양의 나무조각상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불꽃을 만들어냈을 때, 이를 기념하며 유미르가 만들어준 나무조각상이었다.
그리고 이를 선물로 준 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뿐.
다만 너무 성숙해진 모습이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아시테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망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번에도 물 마법사가 비를 내리게 했을까요? 저더러 오빠를 붙잡으라고…….”
“세아츠리스……!?”
아시테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여인, 세아츠리스가 그를 끌어안았다.
“역시… 살아 있었군요… 살아 있을 거라 믿었어요, 아시테르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