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나뉘어버린 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후후… 그냥… 기대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말일세.”
“기대하는 일이라니… 근래 들어서 혼자만 재밌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웃고 있는 테르세우스를 보며 안찰관 레디무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을 살핀 테르세우스가 애써 웃음기를 거두었다.
자신과 다르게 레디무어는 지금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왕국의 안정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안찰관의 주요 임무였는데, 현재는 발할라가 여기저기 날뛰는 바람에 그 임무를 완벽히 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레디무어는 마법기사단을 직속 수하로 두고 있는 테르세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왔던 참이었다.
그런데 테르세우스의 표정이 너무 좋아 보여 괜히 인상부터 찌푸렸다.
“저는 이렇게 바빠 죽겠는데… 어디 그 재밌는 일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면 안 되겠습니까?”
“아하하!!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이지.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다고 했나?”
“그게… 가능하시다면 한 개 마법기사단을 더 보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네. 근래들어 발할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졌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일을 치르긴 할 모양입니다.”
“그렇구만… 사우스 왕국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내부의 적까지 두게 되다니…….”
“사우스 왕국이 설마 다시 전쟁을 치르려 하겠습니까?”
“전쟁에 ‘설마’라는 단어는 없네.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바로 전쟁이니까.”
“흐음… 만약 전쟁이 또다시 벌어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레디무어가 조심히 물었다.
그의 물음에 테르세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생각은 어떻나?”
“당연히 우리 왕국이 이겨내지 않겠습니까? 사우스 왕국은 지난번에도 패배했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지난번 전쟁에선 우리 왕국이 가까스로 승리를 취했지. 하지만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테르세우스의 물음에 레디무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알기로 테르세우스라면 당연히 사우스 왕국의 전쟁에서 승리를 단언할 줄 알았다.
“참… 씁쓸한 일이지. 정작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는 아직까지도 승리의 기쁨에 취해 기본적인 것들을 잊어가고 있다. 왕성의 왕족들과 귀족들은 서로 이권 다툼을 하는데 여념이 없네. 특히나 차기 왕위를 두고 암중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지. 그 일에 마법기사들도 쓰이고 있고…….”
“…….”
“반면 용감하게 전쟁에 나서주었던 일반 국민들은… 점점 궁지로 내몰리고 있는 중이야. 그들의 희생으로 귀족들의 배는 점점 더 불러지고 있지만 정작 귀족들은 그들을 외면하고 있지. 이런 와중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어느 누가 이 나라를 위해 싸워주겠나?”
“크음…….”
레디무어가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외면하고 있는 뼈아픈 구석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평화가 지속되면서 귀족들이 가장 먼저 나태해졌다.
평민들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오랜 평화는 사람들에게 망각이라는 것을 선물했다.
언제 벌어질지, 안 벌어질지도 모르는 전쟁보다는 작금의 생활이 더욱 중요했다.
여기까지 레디무어에게 겁을 줬던 테르세우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도 말게. 우리가 지켰던 수많은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으니. 이제는 그들을 믿어볼 차례가 아니겠나.”
“저어… 방금 앞에 하신 말씀과는 뭔가 다른 것 같습니다만…….”
“그냥 막연한 기대를 걸어보자는 거지. 조금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예에…….”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테르세우스가 슬쩍 서류를 뒤졌다.
“어디보자…. 마법기사단을 더 지원해달라니 퍽 난감한 부탁이지만… 마침 백상(白象)의 마법기사단이 여유가 있는 편이로구만.”
“백상의 마법기사단이면…. 아칼 단장님이 계시는 곳입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
테르세우스가 밖에 있는 부관을 불렀다.
그의 부름에 부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보게. 아칼은 지금 어디에 있지?”
“아칼 단장님은 현재 시련의 던전에 있습니다.”
“응? 그 친구가 왜 그곳에 있나?”
“홀로 마법을 연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간 지는 얼마나 되었나?”
“이제 한 달쯤 된 것 같습니다.”
부관의 답에 테르세우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아칼이 왜 그곳까지 갔는지 알 것 같았다.
“또 10층에 도전하러 간 모양이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게 있다. 예전에 어느 멍청이가 10층까지 돌파해버린 바람에… 그 녀석도 승부욕이 발동한 모양이야.”
“아칼 단장이 승부욕을 느낄 만한 사람이라니… 혹시……?”
“후후 그대가 생각하는 자가 맞네. 아칼, 그 녀석의 전 상관이자, 심연의 마법기사단 단장이었던 그 멍청이 말일세.”
“아아.”
“녀석은…… 아직도 유미르의 뒤를 쫓고 있네.”
테르세우스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리곤 곧 레디무어쪽을 바라보았다.
“아칼이 복귀하는 대로 백상의 마법기사단을 이끌고 가라 말해두겠네.”
“예!? 그러지 말고 아칼 단장님에게 연락을 취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칼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8층이나 9층에 있어도 어지간한 친구로는 소식조차 전하지 못할 걸?”
“아아…. 그럼 군단장님께서 직접…….”
“어허이 무슨 소리! 나는 굉장히 바쁜 몸이네.”
“아니… 지금까지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계신다고…….”
“내가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보다시피 내 일이 좀 많이 밀려서 말이야.”
테르세우스가 한쪽에 치워두었던 서류 더미들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 레디무어도 낮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아… 알겠습니다.”
* * *
아시테르 일행은 5층까지 차근히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뉴틀리아스 떼와의 전투 후로 4층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마수들이 더욱 득실거릴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4층은 조용했다.
“난 이런게 더 불안한데…….”
에스파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게 더 불안하다고. 겁쟁이 에스파 오빠.”
“거… 겁이 많은 게 아니고! 나는 조심성이 많은 거야.”
“네네. 어련하시겠어요오.”
“흥. 쥐한테 기겁을 하는 너보다는 낫지.”
“뭐라고……!?”
에스파와 라빈이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렸다.
두 사람의 모습에 알렌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 둘은 원래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투닥거려요?”
“친남매 같고 보기 좋지 않아요?”
“신기해서요. 저렇게 안 맞을 수 있다는 게…….”
“후후 제가 생각하기에 저건 두 사람만의 애정표현이 아닐까… 하는…….”
데미리우스의 말을 들은 에스파와 라빈이 동시에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아니거든요!”
동시에 외치는 두 사람을 보며 다른 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힘들도 지쳐 무거운 분위기가 될 뻔했던 던전 길이 두 사람 덕분에 한층 밝아졌다.
“앞에 마수가 나타났어요.”
“이번에는 어떤 놈이야?”
“트롤.”
아시테르가 한발 앞서 나가며 말했다.
그와 함께 알렌시아도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아시테르의 화염과 알렌시아의 전격이 동시에 트롤을 격했다.
쿠워어!!
분노한 트롤이 주먹을 휘둘렀다.
녀석의 큼지막한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한 발 먼저 주먹을 피한 아시테르가 손을 뻗었다.
화르릉!!
강한 화염 줄기가 트롤의 몸을 감쌌다.
크웨에에에―!!!
전신이 타오르는 고통에 트롤이 비명을 질렀다.
녀석의 괴물같은 재생능력도 아시테르의 화염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빠르게 정리 할게요.”
알렌시아의 전격이 날카롭게 내리쳤다.
쾅!!
전격이 대지를 격할 때마다 트롤의 팔 다리가 잘려나갔다.
“어우… 저 두 사람은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니까.”
“저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미리 나서준 겁니다.”
“역시 우리 스승님!!! 그나저나 스승님 곁에 있는 저 아름다운 알렌시아 누님도 굉장하십니다!”
크로마제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들의 마법을 지켜보았다.
에스파가 슬쩍 고개를 치켜 들며 벽에 손을 짚었다.
“크로마제? 그… 우리 또한 만만치 않ㅇ….”
덜컥.
“덜컥?”
난데 없이 들리는 소리에 에스파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보니 그가 짚은 벽이 한뼘 정도 들어가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두두두두―
그 순간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투콱!
이어 몇몇 돌들이 대지를 우뚝 솟아올랐다.
딛고 선 땅이 갈라지는 특이한 광경도 벌어지고 있었다.
“으아아-!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모두 조심해요!!”
여기저기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모두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거기다 정신없이 바뀌는 지형지물 때문에 더욱 어지러운 상태였다.
“내 손을 잡아!”
아시테르가 곁에 있는 알렌시아부터 챙겼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의 손을 붙잡았다.
두구궁!!
쿵!
여기저기 돌덩이들이 쏟아져내렸다.
아시테르가 알렌시아를 데리고 황급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이것 참 상황이 좋지 않게 되어버렸는 걸…….”
한 차례 정신 없는 폭풍이 지나가고 아시테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너진 돌무더기와 우뚝 솟은 돌기둥들.
그것들 때문에 다른 일행들과 완전히 나뉘어버리고 말았다.
“스승님!!!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크로마제!?”
“살아계셨군요!!!”
아시테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크로마제가 반대편에서 크게 외쳤다.
이어 라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렌시아 언니는!?”
“옆에 잘 있어!”
“다행이네!!”
“너희는!?”
“우리도 모두 무사해!!”
라빈의 답에 아시테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수들만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일들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이래서 위험한 건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더욱 위험할 뻔했다.
그래도 모두가 무사한 모양이니 다행인 일이었다.
“아시테르, 어떻게 하지? 돌아가는 길도 막혔어!”
“그럼 너희는 갇힌 상태인 거야?”
“아니. 눈앞에 길이 생기긴 했는데. 이대로 나아가봐!?”
에스파의 말에 아시테르가 시선을 돌렸다.
이제보니 그들 앞에도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5층에서 만나자! 분명 길은 연결되어 있을 거야!”
“알겠어!! 우리는 네 명이라 괜찮은데… 너는 괜찮겠어!?”
“걱정하지마. 무사히 5층에서 보자고.”
“잠깐만… 지금 같이 있는 게 알렌시아잖아!?”
에스파의 목소리가 들리고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다.
“아시테르!! 잠깐 이쪽 벽에 붙어봐.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는 알겠지!?”
“물론!!”
아시테르가 에스파의 주문에 따라 안쪽으로 붙어주었다.
그의 인기척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에스파가 말을 이었다.
“가까이 왔으면 벽에 귀를 대봐.”
“응. 이제 귀를 댔어.”
“부럽다 새끼야.”
아주 작은 소리.
순간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귀에 잘 들어박혔다.
“왜? 에스파가 뭐라고 하는데?”
“어? 아냐…….”
아시테르가 아무말 아니었다는 듯 넘기려는 때, 다시 한 번 에스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서 잘해봐라!!!”
“아오 시끄러 에스파 오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못하냐!?”
“그럼 조용히 좀 하든가!”
“돌 때문에 막혀 있는데 어떻게 하라고!!”
두 사람은 이 상황 속에서도 투닥거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에스파는 한 번씩 소리쳤다.
“아시테르! 우리 행복하자!!”
“스승님!! 무사히 5층에서 뵙겠습니다!!”
크로마제의 목소리까지 들리며 아시테르는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것인지 알렌시아도 말없이 몸을 돌렸다.
“자, 우리도 이제 가볼까?”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