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의문의 여인
골렘의 뒤로 또다른 공간이 보였다.
“알렌시아 저기……!”
아시테르가 가리킨 곳에는 작은 공동이 있었다.
입구로 보이는 석문.
두 사람은 곧바로 석문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누군가 이곳을 사용했었나봐.”
공동 안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여러 집기들도 있었다.
알렌시아가 조용히 안쪽을 가리켰다.
침대에 누워있는 새하얀 백골.
백골은 무언가를 소중히 감싸 안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천에 무언가가 싸여 있었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저 천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서로 그것을 확인할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할까?”
“그래도 주인이 죽었으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흐음…….”
아시테르가 잠시 고민하던 차에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한편에 놓인 작은 노트.
노트를 집어들어 슬쩍 펴보았다.
안에는 무어라 적혀 있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아시테르로선 처음 보는 글자였다.
그는 알렌시아에게 노트를 건넸다.
잠시 글자를 살펴보던 알렌시아가 가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였다.
“우리 왕국의 글자도, 사우스 왕국의 글자도 아니야.”
“노스 왕국에서도 본 적 없는 글자들인 것 같은데…….”
아시테르가 노트를 접었다.
다른 페이지들을 살펴봤지만 역시나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 뿐이다.
결국 읽기를 포기하고 다른 것들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레 백골이 품고 있는 천으로 향했다.
아시테르가 과감하게 먼저 나섰다.
그가 조심스럽게 백골의 손을 들어 올리고 그 안에 있던 물건을 가져왔다.
“안에 뭐가 있어?”
“일단은 딱딱한 무언가인데…….”
천을 걷어내자 푸른색의 보석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의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뿜어내는 은은한 광채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예사로운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은 가져가볼까……?”
“그래. 혹시 모르니까 챙겨가 보자.”
“테르세우스 영감님이라면 이게 뭔지 알아보실지도 몰라.”
아시테르가 곧바로 테르세우스를 떠올리며 말했다.
만약 테르세우스가 모르면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비체에게도 가져가 볼 생각이었다.
“일단 아시테르 네가 챙겨둬.”
“알겠어.”
아시테르가 보석을 품 안에 넣어두었다.
그의 시선이 바깥의 골렘에게로 향했다.
어쩌면 녀석은 여기 있는 백골과 이 보석을 끝까지 지키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눈앞에 있는 백골을 조심스럽게 한쪽으로 옮겨주었다.
“뭐하는 거야?”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렇게 두는 것보다는 묻어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대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뭣하러 그렇게…….”
알렌시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끝까지 예를 다해 백골을 묻어주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무척이나 소중한 무언가를 가져가는 것일지도 몰랐으니……
마음속으로 미안함을 빌기도 했다.
그렇게 무덤을 만들어 주고난 뒤 알렌시아가 미리 발견한 통로로 들어갔다.
어둠을 밝히는 밝은 광석들이 있어 길을 걷는덴 무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누가 만들어낸 통로같지?”
“아까 그 사람이 만든 통로이지 않을까? 혹시나 마수들이 자기를 노렸을 때 빠져나가려고…….”
“그럼 적어도 아래가 아닌 위층으로 향하는 길일 가능성이 높겠네.”
“다시 3층으로 가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빠르게 4층으로 내려와서 라빈네가 간 곳으로 가봐야겠어.”
“그나저나 아까 그 골렘은 뭐였을까. 세상에 그렇게 단단하고 위력적인 골렘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거기다 마도사가 죽었는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골렘이라니…….”
알렌시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시테르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최선을 다한 마법으로도 흠집 조금 내는 게 고작이었어…….”
“내 전격 마법은 그냥 두드리는 수준이던데…….”
“그렇게 단단한 골렘을 부릴 줄 알았다니… 사실은 대단한 마도사였던게 아닐까?”
“근데 보통 소환한 골렘은 마도사가 죽으면 함께 소멸하지 않나……?”
“그건 그렇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걷는 동안 마침내 통로의 끝이 보였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바깥으로 발을 들였다.
“어……?”
“여긴 뭐야……?”
두 사람은 어두컴컴한 하늘에 칙칙한 분위기.
거기다 코끝으로 밀려오는 비릿한 피냄새.
끈적한 공기가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불러일으켰다.
스산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며 아시테르가 주변을 살폈다.
몇몇 나무들이 보였는데 모두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가늘게 뻗은 가지들을 보며 알렌시아가 인상을 굳혔다.
“3층에서 이런 곳은 없지 않았어?”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온 모양이야.”
“3층이 아니라고……?”
“딱봐도 그런 것 같지 않아?”
“그럼 여긴…….”
그때 그들의 눈앞으로 한 명의 인간이 보였다.
그는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
“우리 말고 던전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고?”
“혹시 모르니까 경계를 늦추지…….”
아시테르가 말끝을 흐렸다.
눈앞에 보이는 노인의 눈 때문이었다.
검은 자위에 붉은 눈동자.
그 공포스러운 모습에 아시테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알렌시아도 노인의 모습을 보며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 눈이…….”
“조심해.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아시테르가 자세를 낮추며 그를 경계했다.
혹시 몰라 마력은 손 끝에 모아둔 상태였다.
노인의 붉은 눈동자가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를 살폈다.
그가 입을 벌리자 새하얀 송곳니가 드러났다.
“저게 뭐야!?”
놀란 알렌시아가 질겁하며 소리쳤다.
노인은 몸을 날려 알렌시아를 노렸다.
휘릭―
화르릉!!
발밑에서 솟아오른 불기둥이 노인의 앞을 막았다.
“키야아아―!!”
노인이 고통스런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불길에 닿지 않기 위해 물러나는 노인을 보며 아시테르가 입을 열었다.
“저기…….”
“크으으…….”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노인의 입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다른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두 사람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쪽으로 움직였다.
그곳에는 새하얀 피부의 노파가 서 있었다.
그녀는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 인간이 들어오다니… 혹시나 그 여자가 보낸거냐?”
“……!? 인간의 말을 할 줄 아시는 겁니까?”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
“그야… 통로가 나있길래 저쪽에서부터 걸어 들어왔습니다.”
“걸어들어왔다? 올리비아가 있는 한 그럴 수 없을 텐데…….”
“올리비아요?”
“이곳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여자 말이다. 우리를 이곳으로 몰아넣은 주범이기도 하고.”
노파가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인간과 다름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두 눈동자는 새빨간 붉은색이었다.
“아…! 혹시 죽은 그 분의 이름이 올리비아입니까?”
“올리비아가 죽어……?”
아시테르의 말에 노파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녀의 반응에 알렌시아가 슬쩍 뒤로 물러났다.
아시테르도 혹시 몰라 그녀를 경계하는 중이었다.
노파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긴장하는 두 사람을 보며 노파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올리비아와 관련이 없는가 보구나. 그럼 됐다.”
“예?”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 나는 너희들을 어떻게 할 생각도 없으니… 너무나 오랜만에 대화를 나눌 사람이 생긴 것 같은데. 혹시 잠시 얘기나 나눌 수 있겠니? 보다시피 우리 일족은 대부분 죽거나 저렇게 이지를 잃었거든.”
“일족이요……?”
“그래. 우리는 멸족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마치 과거의 어느 왕국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설명에 아시테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혹시… 발도르 왕국과 관련이 있으십니까?”
아시테르의 물음에 노파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발도르를 알고 있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만…….”
“그곳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발도르 왕국은 다른 인간들에게 멸망당한 지 오래인데…….”
이번에는 노파가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에 아시테르는 노파가 발도르 왕국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선뜻 얘기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노파는 잠시 아시테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아시테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발도르 왕국의 마지막 생존자를 알고 있거든요.”
“거짓말마라!!!”
슈파앙―!!
노파의 외침과 함께 대기가 순간 일렁였다.
동시에 곁에 있던 노인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노파가 부릅뜬 두 눈으로 아시테르를 노려보았다.
한순간이었지만 그녀에게서 뿜어져나온 기세는 엄청났다.
단순한 마력의 파동만으로 대기가 일렁이는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똑바로 대답하는 것이 좋을 거다. 네가 발도르의 마지막 생존자를 알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만.”
아시테르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이를 확인한 노파가 다시 이성을 찾았다.
“쿨럭!!”
조금 전 무리를 한 탓인지 그녀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노파의 상태를 확인한 알렌시아가 마력을 끌어모았다.
“아시테르. 위험한 사람일지도 몰라.”
“알렌시아 잠시만.”
아시테르가 알렌시아를 멈춰 세웠다.
그는 노파의 앞으로 다가갔다.
“정말입니다. 그분이 제 스승님이시거든요.”
“크흐흐… 지나가는 박쥐가 키득거리겠구나. 마력을 사용하는 네놈이 어떻게 발도르 왕국 사람의 제자가 된다는 말이냐?”
“발도르 왕국에 대해 잘 아시나봐요?”
“당연하지.”
“그럼 우선 이것부터 한 번 봐주시겠어요?”
아시테르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그리곤 곧바로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비체에게 배워온 검술이었다.
발도르 왕국의 정수가 담겨 있다는 검술.
아시테르는 그것을 천천히 펼쳐보였다.
처음엔 아시테르가 무얼하나 지켜보던 노파의 입이 점점 떡하니 벌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녀는 아시테르의 검술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눈치였다.
반면 알렌시아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잠자코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너… 그 검술을 어떻게…….”
“그분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겁니다.”
“아이야, 그 사람의 이름이 뭔지 물어도 되겠니……?”
“그 분의 성함은 ‘비체’입니다.”
“……!!”
아시테르의 대답을 듣자마자 노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 정말 그 이름이 맞는 거냐……?”
“네. 제 스승님이자 제 할아버지이기도 해요.”
“네가 그 사람의 손자라고…? 거짓말… 그분은 혼인을 하지 않았어.”
“맞아요. 제 아버지도 어머니도 비체 할아버지의 진짜 자식은 아니지만, 두 분은 비체 할아버지를 부모처럼 따르고 계세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비스 던전에서 만나 가족이 되었다고 했어요.”
“아… 아아……. 어비스 던전……!!”
어비스라는 말에 노파가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흐느껴 울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는 우두커니 서서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눈물을 보이던 노파가 다시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아까보다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 검술은 분명 발도르 왕가의 검술이다. 게다가 비체님은 발도르 왕국의 왕자셨지. 찬란하기만 했던 그분은 어느 날 갑자기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어비스 던전으로 향하셨다… 어비스 던전을 알고 있고 그곳에서 본 거라면… 정말 너는 비체님을 알고 있는 거겠지…….”
“네! 당신도 비체 할아버지를 알고 계시나 보네요?”
아시테르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상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라면 비체를 기억할 수 없으니까.
“혹시 발도르 왕국의 사람인가요?”
아시테르의 물음에 노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답 대신 그녀는 아시테르의 뺨을 어루만졌다.
“비체님의 아이라니… 고맙다… 덕분에 살아갈 이유가 생겼어…….”
그녀가 아시테르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니?”
“예? 예에…….”
아시테르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노파가 그의 손에 입을 가져갔다.
곧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