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라빈과 자비토의 이야기
하지만 이미 늦어버리고 말았다.
라빈은 그날 이후 오랫동안 자비토를 만나주지 않았다.
물론 자비토도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사실 그녀는 자비토를 만나주지 않은 게 아니었다.
레프레시아 가문에서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도록 손을 쓴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엔 자비토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로의 얼굴이 기억 속에 흐려질 때쯤 마침내 두 사람은 우연히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자비토는 반가움과 미안함 등 오만가지 감정들과 함께 라빈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녀의 싸늘한 반응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라빈은 광기어린 분노와 함께 자비토를 죽이려 들었다.
그때 생긴 상처들이 아직 몸에 남아있었다.
“쳇…….”
라빈을 마주하고 있으니 또다시 몸에 남은 상처들이 욱씬거리기 시작했다.
그날 죽을 뻔 했던 기억 때문에 자비토는 라빈에 대한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때문에 자신은 라빈보다 월등히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강해지려 하는 이유가 정말 복수 때문일까.
‘더욱 강해져서 그녀에게 복수 따위나 하겠다고?’
그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죽일 뻔한 라빈에게 분노의 감정을 품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똑같이 그녀를 죽이기 위해 강해지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라빈의 힘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고자 하는 것일까.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석연치 않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자비토는 아카데미에 들어와 자연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강해지려 했던 이유를.
그는 이율배반적으로 더욱 강해져서 라빈을 보호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또다시 라빈이 힘들어할 때 그녀에게서 도망치지 않도록.
못났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저 끔찍한 마법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 멋대로 생각해온 것이다.
하지만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오다보니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라빈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그녀의 마법을 끔찍이 생각하고 저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마법으로 스스로를 빛내는 길을 택했다.
그런 모습에 더 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었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세상을 원망하며 보냈을 것이다.
허나 라빈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연약하기만한 소녀가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발전시켰다.
뼈를 사용하는 기괴한 마법에 선택(?)받았음에도 말이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들로 살아온 것일까…….”
결국 모든 것을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날 라빈에게서 도망쳤던 날은 스스로의 두려움 때문에.
라빈에게 죽을 뻔했던 날들은 분노 때문에.
오직 자신의 감정에만 모든 것들을 치우쳐 생각해왔다.
그러다 우습게도 칸을 보며 뒤늦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머릿속을 메우는 생각들이 있었다.
처음 폭주했던 날 라빈을 버리고 간 자신을 보며 라빈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레프레시아 가문의 농간이 있었다곤 하지만 그렇게 버리고 간 이후 오랫동안 라빈을 찾지 않은 자신을 보며 무슨 감정들이 들었을까.
또 라빈을 위험한 사람이라며 주변에 말하고 다니는 못난 자신을 보며 그녀는 과연 무슨 감정과 생각들이 들었을까.
그렇게 자비토는 조금씩 라빈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알고 보면 비겁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지켜주겠다 말해놓고 그녀를 버리고 도망쳤으며, 두려움에 다가설 용기도 내지 못했다.
그런 자신에게 실망한 라빈의 분노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것은 자비토 자신이었다.
“결국 못난 것은 나였지…….”
“적을 눈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라빈이 자비토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뼈를 힘차게 휘둘렀다.
카가각―!!
뼈가 광석 방패에 막혔다.
라빈의 공격에도 방패에는 흠집조차 남질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비틀어 자비토의 빈틈을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자비토의 반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는 새로운 광석들을 형성해내 라빈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각!
가가가각―!
라빈의 공격이 번번이 막혔다.
뼈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광석들이 움직였다.
“쳇……!”
라빈이 뼈대를 휘둘렀다.
그러자 날아간 뼛조각이 자비토를 노리고 들었다.
빠르게 날아오는 뼛조각을 보며 자비토가 팔을 뻗었다.
흘러나온 마력이 원형의 방패를 형성해내었다.
두둑!! 투두둑!!!
콰릉!!
뼛조각이 광석에 박히고 내리치는 전격이 다른 광석에 막혔다.
그야말로 철통방어나 다름없었다.
“그럼 이것도 막아내보든지……!”
라빈이 두 개의 뼈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대지를 뚫고 여러 개의 뼈가시들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자비토는 광석 방패를 바닥에 깔았다.
이어 양쪽으로 형성된 방패들이 남은 가시들을 막아냈다.
광석이 원형을 그리며 자비토를 완전히 감싸 안았다.
콰가각!!!
콰릉―!!
하지만 뼈가시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으로 광석 방패가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비틀어졌다.
곧게 뻗은 가시들이 방패를 쓸고 지나갔다.
약해진 부분으로 알렌시아가 뇌신의 창을 쏘았다.
콰앙!!!
거친 소리와 함께 광석 방패가 벗겨졌다.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자비토가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짓을 따라 움직이던 마력이 곧바로 거대한 망치를 형성해내었다.
“온다!”
소리친 라빈이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망치가 곧 그곳을 내리쳤다.
땅이 움푹 꺼졌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망치에 몸이 으스러졌을지도 몰랐다.
알렌시아의 전격과 라빈의 뼈가 동시에 자비토를 노리고 들었다.
“크읍……!”
위력도 위력이지만 전격 마법은 그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거기에 더불어 변칙적인 라빈의 공격까지 더해지니 자비토도 하는 수 없이 전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비토는 수비에 치중하고 라빈과 알렌시아는 쉴 새 없이 공격을 쏟아부었다.
“크읍……!”
광석 마법으로 만든 방패는 엄청난 견고함을 자랑하지만 다른 마법들에 비해 속도가 느렸다.
소모되는 마력량도 상당했다.
자비토가 갖고 있는 마력이 무한대가 아닌 만큼 그의 광석 방패도 점차 견고함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됐다. 드디어 상대도 지치고 있어.”
방패의 견고함이 무뎌진 것을 확인한 알렌시아가 승기를 잡았다는 듯 외쳤다.
라빈도 자비토의 마법이 점차 무너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너도 지쳐가는가 보네.”
“미안하지만 아직 멀었어.”
주변을 살핀 자비토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가 만들어낸 방패가 모습을 감췄다.
대신에 그를 중심으로 수많은 광석침(鑛石針)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팟! 파밧!!
자비토가 발을 구르자 광석침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공격하는 마법.
이 마법에는 아군도 적군도 없었다.
때문에 자비토는 전투를 이어가면서도 동료들이 없는 곳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반면 알렌시아와 라빈은 그의 견고한 방패를 뚫어내느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크아악!”
“이게 뭐야……!?”
각자의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몇몇 호송대 인원들이 광석침에 당했다.
알렌시아는 라빈이 만들어낸 커다란 뼈방패 뒤에 숨어서 광석침들을 피해냈다.
“으아아―!”
놀란 에스파는 광석침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휘리릭!
철그럭―
그런 에스파를 휘감은 것은 에이브릴의 쇠사슬이었다.
“거기서 걸리적거리지 말고 이쪽으로 와.”
쇠사슬이 한 번에 에스파를 잡아당겼다.
에이브릴은 쇠사슬을 이용해 에스파와 데미리우스를 지켜주었다.
“아아…….”
에이브릴의 마법에 에스파가 감탄을 흘렸다.
다시봐도 에이브릴의 마법은 뛰어났다.
그런 에이브릴을 이겼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그녀는 멍하니 있는 에스파를 힐끗 쳐다보았다.
“딱히 다른 뜻은 아니야. 팀이니까 도와주는 거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알고 있어.”
“그… 그래…….”
쇠사슬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광석침들을 막아내었다.
광석침이 모두 날아가자마자 라빈이 뼈방패를 걷어내며 움직였다.
“바로 가 라빈!”
알렌시아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전기 구체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자비토를 덮쳤다.
콰드등!!!
전기 구체가 광석 방패에 막히는 찰나, 안쪽까지 파고든 라빈이 날카로운 뼈를 힘껏 던졌다.
푸슉!
그녀의 뼈가 자비토의 어깻죽지를 관통하는데 성공했다.
라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뼈검을 휘둘러 자비토의 옆구리를 베어냈다.
날카로운 뼈에 당한 자비토가 고통에 인상을 찡그렸다.
쩌저정!!
이어 떨어진 낙뢰에 자비토가 그대로 당해버리고 말았다.
허공을 메우던 광석 방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거 완전히 내 패배네.”
바닥에 등을 대고 쓰러진 자비토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자로 누운 그의 곁으로 라빈이 다가왔다.
좀 더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자비토는 오히려 개운하다는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라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말했다.
“뭐야 그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라빈. 나 말이야. 그날 너를 그렇게 버리고 간 것을 굉장히 후회했어. 네게 상처가 될 만한 말들을 한 것도 후회해. 네가 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널 찾아가지 않은 그날들도 후회하고 또 후회해.”
자비토의 말에 라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도 한때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자비토 기다린 적이 분명 있었다.
“그래서 뭐? 어쨌든 결국 넌 찾아오지 않았잖아?”
“아니야 가려고 했었어. 실제로 레프레시아 가문에도 몇 번씩이나 기별을 넣었다고.”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레프레시아 가문에서 중간에 내 편지를 가로챈 모양이야.”
“…….”
“답신이 없길래 나는 당연히 네가 날 만나길 꺼려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 후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너는 날…….”
“죽이려 했지.”
라빈의 말에 이번엔 자비토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두 사람의 얘기가 길어지는 듯 하자 알렌시아가 슬쩍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녀가 자리를 벗어나던 말던 자비토는 말을 이었다.
“대체 왜 그랬어?”
“그러고 싶었으니까.”
“뭐?”
“네가 내게 남긴 상처. 나는 그것들을 차가운 바닥에서 오랫동안을 품고 잤거든. 너를 보자마자 그때의 상처들이 생각났어.”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람을…….”
“가장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해본 기분을 알아?”
라빈의 차가운 말투에 자비토도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라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아주 기분이 엿 같거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더욱 말이야.”
“그랬구나… 많이 늦긴 했지만 그래도 꼭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이렇게 되고나서야 용기를 빌리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건데? 어디 말이나 한 번 해봐.”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
자비토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슬픈 눈동자를 한 그의 웃음은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라빈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해봤…….”
투콰앙!!!
번개처럼 몸을 일으킨 자비토가 광석 마법으로 라빈을 보호했다.
놀란 라빈이 고개를 돌렸다.
거친 타격음이 들림과 동시에 자비토가 핏물을 뱉어냈다.
“크으읍…….”
자비토가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