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발할라의 난입 (4)
체레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에이브릴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를 똑바로 마주하진 못했다.
“미… 미안하다…….”
“뭐가?”
“너에게 심한 말을 해서…….”
에이브릴이 체레드의 앞에 앉았다.
상처 많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체레드가 눈을 크게 떴다.
“나 때문에…….”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린 모양이네.”
“그래… 내가 잠깐 미쳤었어… 네 말을 안 듣고…….”
“근데 너무 늦었잖아 바보야…….”
“그것도 미안하다…….”
체레드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다행이었다.
뒤늦게나마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에이브릴. 오늘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렇고 내가 한 말들은 전부 진심이 아니었어.”
“알아.”
“마음에 두지 말아주라.”
“걱정 마.”
에이브릴의 대답에 체레드가 미소를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에스파쪽을 바라보았다.
에스파는 둘이 얘기할 수 있도록 이미 자리를 비켜주었다.
쉬지 않고 마력 화살을 쏘는 에스파를 보며 체레드가 입을 열었다.
“저 녀석… 많이 변했어.”
“맞아. 엄청 변했더라.”
“훨씬 더 멋있어졌다. 부러울 정도로 강해지기도 했지만 훨씬 더 남자다워졌어. 아마 내가 세상 불평만 하며 멈춰있는 동안 저 녀석은 홀로 끊임없이 노력해온 덕분이겠지…….”
“…….”
“그거 알아? 예전에 저 자식이 널 좋아한다고 해서… 그래서 나는 저놈을 괴롭혔다.”
“뭐……?”
“하찮은 천민놈이 널 좋아한다고 말하니까 괜히 부아가 치밀더라고.”
“못났네 너나 나나.”
에이브릴의 말에 체레드가 눈물을 보였다.
그가 흐느끼며 입술을 들썩거렸다.
“저 녀석에게도 못할 짓을 많이 했고… 너에게도, 도거스에게도 그리고 자토에게도 잘해준 것 많이 없는데… 너무나도 후회만 밀려온다…….”
“그런 말은 이제 됐어. 그만 말해.”
“후후… 마지막인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 근데 말이야. 난 진짜 못난 놈이긴 한가보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이 순간에도 난 저 녀석에게 질투가 나.”
“무슨 질투가 나.”
“에스파 저 녀석은 앞으로도 네 곁에 있을 수 있잖아. 나는 이제 더 이상은 불가능해 졌는데.”
“뭐라는 거야 이 바보가. 너도…….”
에이브릴이 말을 도중에 멈췄다.
체레드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체레드…….”
에이브릴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숨이 완전히 끊겼다.
눈을 감고 있는 체레드의 입은 희미하게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체레드…….”
에이브릴도 참았던 눈물을 보였다.
그때 먼발치에 있던 에스파가 다가와 체레드의 시신 위로 자신의 옷을 덮어주었다.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
에이브릴은 말없이 울고만 있었다.
그녀가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에스파가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다행이 전투의 상황은 상당히 좋았다.
아시테르와 칸의 활약으로 복면인들의 숫자도 많이 줄었다.
그들도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는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강한 녀석들이 많다.”
“조사가 잘못 된 것 같은데.”
“이쪽에 좀 더 많은 인원이 투입되었어야 했어.”
“쳇… 저 화염 마도사랑 바람 마도사가 문제야.”
“저 둘 때문에 더는 나아갈 수 없다.”
아시테르의 화염 마법이 일자로 퍼지며 복면인들을 가두었다.
그곳으로 칸이 만들어낸 바람의 칼날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파바방!!
촤랑-!
여기저기 폭발음이 들리고, 복면인들이 만들어낸 쉴드가 무참히 깨져버렸다.
지독한 화염이 엄청난 열기를 몰고 왔다.
그 열기를 피해 달아나면 날카로운 바람이 온 몸을 사정없이 찢어대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모두 물러난다.”
“우리들은 여기까지다. 어차피 작전의 메인은 이곳이 아니니까.”
“퇴각이다!!”
복면인들이 수신호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을 놓칠 아시테르가 아니었다.
“어딜 달아나려고.”
아시테르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의 발끝에서 살아난 불길이 단숨에 그들의 퇴로를 막아버렸다.
“동감이다. 올때는 너희들의 마음대로지만 갈 때는 아니야.”
칸이 만들어낸 바람의 화살이 그들을 노렸다.
복면인들의 움직임이 멈춰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들이 퇴각하려면 아시테르와 칸을 뚫어내야만 했다.
“이 애송이들이……!”
“모두 공격을 집중해!”
그들의 공격 마법이 칸과 아시테르를 향했다.
그러자 알렌시아와 라빈 등의 다른 학생들이 일제히 마법으로 받아쳤다.
허공에서 어지러이 마법의 충돌이 일었다.
화염기둥을 만들어내던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언가를 발견한 그가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수많은 마법이 충돌하는 중이었다.
헌데 그 틈을 비집고 아시테르는 안쪽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무모했다.
저 사이로 저렇게 억지로 들어가면 십중팔구 다른 마법들에 휘말릴 터였다.
“저 바보가……!”
칸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여러 개의 바람이 형성되었다.
그 바람들이 한데 뭉쳐 두 개의 바람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현재 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 중 하나.
여러 개의 바람을 응집시켜 하나로 겹치면 위력이 배로 늘어났다.
칸은 이것을 ‘겹바람의 길’이라 불렀다.
휘와아앙!!!
그 위력을 보여주려는 듯 강렬한 바람이 주변의 마법들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덕분에 한순간이나마 마법의 공백이 생겼다.
아시테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쓰러져 있던 여인을 재빠르게 들어 올렸다.
파앙!!
대지를 박찬 아시테르가 단숨에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대단해!!”
“조금 전 저건 뭐야!?”
“마도사가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니……!”
이를 본 학생들이 감탄을 흘렸다.
칸의 마법을 칭찬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겹바람의 길은 아시테르를 보호해줌과 동시에 세 명의 복면인들을 단번에 쓰러트려 버렸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위력의 마법이었다.
“역시 칸이로군…….”
“우리들의 대장인 이유가 있다니까.”
“괴물 같은 자식…….”
뒤에 물러나 있던 자비토도 칸의 마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베릴니아를 구해낸 아시테르가 그녀를 안전한 장소에 내려놓았다.
그녀를 발견하고 뒤늦게 덱스가 달려왔다.
그는 가장 먼저 베릴니아의 상태부터 살폈다.
“베릴니아는!! 베릴니아는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요. 숨도 붙어 있고, 상처도 치명상은 없어요.”
함께 상태를 살펴본 아시테르가 말했다.
그의 말에 덱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그도 베릴니아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여러 사람들과 뒤엉켜 그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헌데 저 전장의 한 가운데에 쓰러져 있었다니…….
그야말로 아찔한 상황이었다.
“정말 고마워 아시테르.”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이에요.”
아시테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기서 시간을 죽일 틈이 없었다.
그의 두 손에서 화염이 일어났다.
“이제는 그녀를 잘 지켜주세요.”
“맡겨두세요.”
아시테르 팀과 칸의 팀이 동시에 활약하며 전장의 상황은 빠르게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실력 있는 학생들만 모아놓은 칸의 팀이 활약한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헌데 아시테르 팀의 눈부신 활약은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심지어 그들의 팀워크는 한눈에 봐도 대단할 정도였다.
마치 서로가 어디를 향해 무슨 마법을 사용할 것이란 걸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하듯, 그들은 유기적으로 손발을 맞춰 적을 상대했다.
“저게 바로 팀이라는 거구나…….”
“마법기사단에 들어가면 저렇게 호흡을 맞춰 전투를 벌이는 건가?”
“솔직히 이번에 많이 놀랐다. 아시테르 팀이 이 정도의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니…….”
“어쩌면 호송대 팀이 전투에서 승리했을 지도 모르겠어.”
전투를 끝낸 다른 학생들도 아시테르 팀과 칸의 팀을 두고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이곳에 쳐들어 왔던 복면인들의 숫자는 총 63명.
사망한 이들이 30명쯤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학생들의 손에 붙잡혔다.
그들 중 그나마 대장격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칸이 다가갔다.
“너희들은 누구지?”
“애송이. 내가 너희들의 질문에 답을 할 것 같나?”
“하기 싫어도 하고 싶게 만들어 주겠다.”
칸의 손아귀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의 협박에 사내가 웃었다.
“귀엽구나. 그런 협박이라니. 하지만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실패했지만 다른 녀석들은 성공했겠지…….”
“뭐!? 그 말은……!”
사내가 혀로 입안을 굴리더니 무언가를 깨물었다.
따각!
사내는 곧 게거품을 물기 시작하더니 이내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붙잡힌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하나둘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모두가 자결을 택한 것을 보며 칸도 심히 놀라는 중이었다.
다른 학생들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그들도 복면인들의 선택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뭐… 뭐야…….”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이건 너무 하잖아……!”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택한 건가?”
“입안에 모두 독약을 갖고 있었어요.”
그들의 입안을 손으로 헤집어 뒤져본 데미리우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말은 즉, 붙잡힐 것까지 대비해 미리 자결책을 마련해놓았다는 얘기였다.
다른 일행들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지독하다 정말…….”
“발할라… 지독하고 잔인한 자들이지.”
아시테르가 숨을 거둔 복면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는 알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누군지.”
“응. 알고 있어. 이들이 소속된 단체의 이름은 발할라. 왕국의 전복을 꿈꾸는 자들이야.”
“왕국의 전복이요…?”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는 이유로 귀족들과 그들의 사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죽이려는 자들이라고 들었어.”
“아…….”
“세상에…….”
칸이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너는 어떻게 이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지?”
“일전에 이들과 전투를 벌인 적이 있었거든.”
“무슨 수로? 아카데미 학생이 이들과 부딪힐 일이 있나?”
“마르체니 공주님과 노스 왕국에 다녀온 적이 있었어. 그때 발할라가 마르체니님의 목숨을 노렸고.”
“그랬었군… 그럼 그때 너도 발할라에 대해 들은 거냐?”
“그래.”
아시테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알렌시아와 자비토가 끼어들었다.
“부상자가 많아. 일단은 이들부터 치료해야 해.”
“우리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대로 계속 미션을 진행할 건가?”
자비토가 칸과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상 이곳의 결정권자는 이 둘이었다.
모두가 이 둘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싸웠으니 말이다.
아시테르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션은 중단이야. 조금 전 저자가 한 말을 들어보니 지금 이곳 말고도 다른 쪽도 똑같은 상황일지도 몰라.”
“같은 의견이다. 지금은 미션이 중요한 게 아니다.”
“좋아.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한다니 다행이네.”
“지금 바로 갈라져서 다른 학생들을 도와주도록 하죠.”
“곧 아카데미 측에서도 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지원 병력들을 보내줄 거야. 아니, 어쩌면 이미 알아차렸는지도 모르지.”
“그래도 일단 가야 한다.”
아시테르와 칸이 동시에 시선을 마주쳤다.
칸이 먼저 아시테르에게 팔목을 내밀었다.
이에 아시테르가 그의 팔목을 맞잡았다.
“아까보니 제법이더군.”
“너도 엄청난 바람 마법이었어.”
“가서 죽지마라. 우리들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죽지마라 칸.”
아시테르가 오른쪽 칸이 왼쪽 날개로 향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일행들을 이끌고 곧바로 길을 떠났다.
자비토가 칸의 옆으로 붙었다.
“너는 저쪽으로 가야하지 않나?”
“나도 일단은 네 팀인데?”
“하지만 정혼자가 저쪽에 있질 않나.”
“그러는 넌? 알렌시아가 저쪽으로 가는데 가봐야 하는 것 아냐?”
“알렌시아는 그렇게 약하지 않다. 나의 보호 따윈 필요 없어.”
“그건 라빈도 마찬가지야. 거기다 라빈의 동료들도 함께 있고.”
“훗. 아주 저쪽 팀에 반해버린 모양이로군.”
“그러는 지도 아시테르를 인정했으면서.”
“인정할만한 남자였다.”
“그러게. 솔직히 대단하더라.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야. 그나저나 크로제 그 녀석은 어딜 간 거야?”
함께 움직이던 베드커만은 보였는데 크로제는 자비토의 시선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때 베드커만이 자비토의 곁에 붙어 말했다.
“크로제는 급하게 해야 할 임무가 있다면서 떠났어. 칸에게는 비밀로 해달라더라.”
“흐음……?”
자비토가 순간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베드커만과 크로제는 오랜 친구들이었다.
그들이 칸에게 해가 될만한 일들을 할 리는 없었다.
“전에 너희들에게 신세 졌던 건 이걸로 갚을게 그럼.”
“고맙다 자비토.”
“별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