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빙결의 여제
아필라가 만들어낸 거대한 물방울이 글로리아의 위로 날아갔다.
파밧!
글로리아는 망설임 없이 랜스를 겨누며 뛰어들었다.
“너희들은 뒤로 빠져 있어라!”
“네!”
“알겠습니다!”
글로리아의 명령에 학생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왠지 지금부터는 자신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대단한 전투가 벌어질 것만 같았다.
아시테르도 알렌시아의 부축을 받으며 뒤로 물러났다.
“괜찮아?”
“보다시피. 이 정도면 아주 살만하지.”
“그거 다행이네.”
아필라에게 여기저기 상처를 입긴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다만 무리해서 마력을 운용한 탓에 온몸이 저릿저릿한 증상이 있었다.
그럼에도 속으로는 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도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번에도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말았다.
닿을 듯 말 듯 느껴지는 하나의 경지.
아시테르는 그 미지의 무언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에 닿았을 때, 아니 그것을 넘어섰다 느낄 때.
비로소 스스로가 조금은 강해졌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아시테르가 막연히 느끼고 있는 경지의 전투를 눈앞에서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초위급 마도사들의 전투.
글로리아와 아필라의 전투를 보며 아시테르는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접했던 학생들의 전투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범람하듯 밀려오는 파도가 글로리아를 집어삼키는 듯 했으나 이를 뚫고 나온 글로리아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얼려버렸다.
이어 그녀의 창이 빛줄기를 뿜어내자 아필라가 만들어낸 수룡도 순식간에 얼어 붙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에 수룡은 한 마리가 아니었다.
남은 두 마리의 수룡이 흉포한 아가리를 벌리며 날아 들었다.
콰라랑!!!
수룡이 글로리아를 덮쳤다.
“글로리아님!!!”
“아… 이런……!”
“설마…….”
여기저기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마법이 처음으로 글로리아에게 적중하자 아필라가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아하하하!!! 결국 한 방 먹었네!?”
콰앙!!
얼음 기둥이 여기저기 솟아올랐다.
그 사이에 서 있던 글로리아가 랜스를 겨누었다.
이를 본 학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순간 글로리아가 꼼짝없이 당한 줄로만 알았다.
서릿발 같은 마력이 여러 개의 창을 만들어내었다.
글로리아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야. 이게 얼마짜리 파이프인 줄은 아냐?”
파이프가 또다시 젖어버리고 말았다.
몇 달은 봉급을 아끼고 아껴야 살 수 있는 파이프인데.
결국 남은 하나마저 젖어버리고만 것이다.
이 사실이 글로리아로 하여금 머리끝까지 분노하게 만들었다.
“죽인다 넌.”
수많은 형상의 얼음창이 아필라를 향해 일제히 쏟아졌다.
아필라도 잠자코 있지만은 않았다.
수백 개의 물의 탄환이 글로리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물의 탄환이 얼음창을 무수히 두드렸다.
탄환의 힘에 얼음창도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물의 탄환은 얼음창을 지나 글로리아까지 노렸다.
글로리아가 랜스를 휘둘러 물의 탄환을 쳐냈다.
그러나 그 수가 너무도 많았다.
글로리아의 몸에도 여기저기 상처가 생겨났다.
쩌저적―!
그녀의 몸을 얼음이 뒤덮기 시작했다.
얼음으로 된 갑주를 입은 글로리아를 보며 아필라가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어머? 이제는 방어라는 걸 하기 시작했네?”
“닥쳐라.”
“까칠하긴.”
파바방!!
쏟아지는 물의 탄환 안에서 글로리아가 몸을 움직였다.
그녀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 얼음 기둥이 길을 만들어주었다.
카시우스의 창.
본래 그것은 닿는 것들을 모조리 얼어붙게 만들어버리는 창이었다.
그녀가 창으로 다가오는 물줄기들을 모두 얼려버렸다.
그 순간 글로리아의 두 눈에서 안광이 폭사 되었다.
휘우웅―!!
랜스를 휘두르자 서릿발 같은 마력이 커다란 길을 만들었다.
그곳을 글로리아가 걸었다.
“하?”
아필라가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렇게나 많은 마법을 사용했는데도 아직까지 마력이 차고 넘쳐 흘렀다.
슈와아아―!!
그녀의 손짓에 따라 거센 물줄기가 소용돌이쳤다.
조금 전 보였던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글로리아는 랜스를 든 채 고고히 걸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피어난 마력이 공간을 장악했다.
이를 본 아필라가 인상을 구겼다.
마나 필드(Mana Field).
고위급 마도사들은 자신의 마력을 이용해 스스로의 몸을 보호할 줄 안다.
마도사들은 그것을 스킨 실드라고 불렀다.
이 스킨 실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 바로 마나 필드였다.
자신의 마력으로 공간을 장악하는 힘.
마나 필드 안에서 자신의 마법은 더욱 강대한 힘을 낸다.
반면 상대는 마력 배열에 방해를 받아 그 위력이 반감되고 만다.
글로리아는 지금 아필라를 상대로 마나 필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질 것 같아?”
아필라 역시도 공간을 장악하기 위해 마력을 쏟아냈다.
두 개의 마력이 같은 공간을 두고 강한 충돌을 일으켰다.
그 사이에서 물과 얼음이 어지러이 충돌했다.
발밑에서 시작된 얼음이 단숨에 아필라를 꿰뚫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필라의 물이 얼음송곳을 막아냈다.
이어 파도처럼 밀려든 물이 글로리아가 있는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쩌저적―!!
물이 얼어붙자, 랜스가 그 사이를 뚫고 나왔다.
“크윽……!”
아필라가 입술에 피를 머금었다.
손으로 핏물을 닦아냈다.
몸속 구석구석 찌릿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보니 벌써 한계가 다가오고 있는 모양이다.
반면 글로리아는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피메트까지 복용하고 나서야 겨우 글로리아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그만큼 글로리아와 아필라의 격차는 컸다.
이제야 발할라의 간부들이 이스트 왕국을 얕봐선 안 된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저 마법기사단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스트 왕국은 저력이 있는 왕국이었다.
아카데미의 교관조차 이런 실력을 갖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검술을 버린 왕국.
그래서 반쪽짜리 왕국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헌데 그것은 아필라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하… 충분히 검술을 버릴만 하네…….”
이런 괴물 같은 마도사들이 존재하니 검술이 시시해 보일 수밖에.
아필라의 자조 어린 미소를 보던 글로리아가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이제 그 잔재주는 끝나가는 거냐?”
“시끄러…….”
“무슨 방법을 썼길래 단번에 이런 힘을 낼 수 있었던 거지?”
“당신한테 내가 그걸 알려주겠어?”
“뭐… 어차피 크게 궁금하진 않았다. 그딴 방법을 쓰지 않아도 나는 강하니까.”
“진짜 재수 없네 당신.”
“그런 소리도 종종 듣는다.”
글로리아가 만들어낸 얼음 덩어리가 아필라의 위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랜스가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촤라락!!
아필라가 만들어낸 물방울이 몸체를 키우며 얼음 덩어리를 밀어냈다.
빠른 속도로 커진 물방울은 랜스와 함께 글로리아마저 집어삼켰다.
물감옥 안에서 글로리아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랜스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자 물방울이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딴 건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그래. 이 정도로 널 죽일 순 없겠지. 근데 말이야…….”
얼음 사이를 뚫고 격류 하는 물이 글로리아의 몸을 수직으로 그었다.
놀란 글로리아가 두 눈을 부릅 떴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아필라가 이제야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보였다.
“그거 알아? 물은 어디에서든 흐를 수 있어. 그게 얼마나 비좁든 결국 뚫고 들어갈 수도 있다고.”
촤라락!!
사나운 물줄기가 낫처럼 휘며 글로리아의 한쪽 팔을 잘라버렸다.
“크윽……!”
방심한 것은 아니었다.
마나 필드를 펼치면서부터 글로리아는 최선을 다해 싸웠으니까.
다만 아필라의 마지막 마법은 글로리아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다.
자신의 마력으로 모든 것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헌데 아필라가 그것을 마지막 힘을 다해 뚫어낸 것이다.
설마 그 좁은 틈을 발견하고 비집고 들어올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하하… 꼴 좋다… 팔 하나는 가져갔네.”
“제법이었다.”
글로리아가 남은 한 손으로 랜스를 힘껏 말아쥐었다.
푸슉!!
연속으로 찌른 랜스가 아필라의 몸에 구멍을 만들어냈다.
피를 토한 아필라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쓰러진 그녀가 글로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끝이라고… 생각하지마… 우리들은 이제 시작이니까……!”
“얼마든지 들어와라. 이스트 왕국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으니까.”
글로리아가 상처난 부위에 마력을 사용했다.
상처가 얼어붙으며 금세 피가 멈췄다.
이를 본 아필라가 입가를 씰룩 거렸다.
“너… 인간은 맞아……?”
“피가 흘러나오는 건 안보이냐?”
“행동이 전혀… 인간답지가 않잖…….”
털썩.
아필라의 얼굴이 푸석하게 메말랐다.
그녀는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숨을 거둔 아필라를 내려다보며 글로리아가 혀를 찼다.
“내 파이프를 두 개나 해먹은 걸로도 모자라 팔까지 가져가다니… 너희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는 거지?”
글로리아가 죽은 아필라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눈엔 이게 괜찮은 걸로 보이나?”
“아뇨…….”
“됐다. 아무튼 상황 종료야.”
“그런데 다른 쪽은…….”
“거기는 걱정마라. 나만큼 성격 드러운 놈이 갔으니까.”
“예……?”
“그보다 너.”
글로리아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아시테르가 잠자코 서 있었다.
“파이프 있나?”
“없습니다.”
“제기랄. 파이프도 없어?”
“네…….”
“무슨 재미로 사냐?”
“마법 수련하고 더욱 강해지는 재미로…….”
“됐다. 말을 말자.”
글로리아가 혀를 찼다.
“아무튼 잘 싸워줬다.”
“예?”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이번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거다.”
글로리아는 아시테르뿐만 아니라 그의 팀원들에게도 고마운 인사를 전했다.
이어 다른 학생들에게도 말했다.
“너희들 모두 이미 훌륭한 왕국의 마법기사들이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어 줘서 정말 고맙다!”
그녀의 커다란 외침에 몇몇 학생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글로리아와 함께 도착했던 교관들이 그들을 위로했다.
“잘 싸웠다.”
“훌륭했어.”
교관들도 한바탕 전투를 치른 탓에 여기저기 상처들이 있었다.
이곳을 습격한 발할라는 전원 사망.
살아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글로리아님…….”
“발할라가 어떻게 미션장에 난입할 수 있었는지 철저히 조사해야 할 거다.”
“네!”
“주변에 배치해두었던 마법기사들과 교관들이 모두 죽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분명 내부에 조력자가 있었을 거다.”
“철저히 조사해서 놈들을 밝혀내겠습니다.”
“건방진 놈들… 감히 이곳까지…….”
후우웅!!
그때 강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졌다.
글로리아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필라는 결국 죽었나.”
“붉은 옷…? 발할라의 최고 간부 중 한 명이로구나. 너.”
“미안하지만 그 친구는 내가 데려가야겠어.”
“그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봐라.”
쩌저적!!
글로리아의 얼음 마법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붉은 옷의 여인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허공에 맺힌 핏방울이 채찍을 이루어 아필라의 시신을 낚아챘다.
“피?”
이를 본 글로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붉은 피를 다루는 마법은 처음이었다.
“그러게 만만하게 봐선 안된다고 했잖아. 바보야…….”`
여인은 아필라의 시신을 데리고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글로리아가 그녀를 쫓으려 했으나 그 몸으로는 무리였다.
“글로리아님 진정하세요……!”
“맞습니다. 지금 부상이 심각하십니다!”
“저 여자는 저희들이 쫓도록 하겠습니다.”
교관들이 그녀를 말렸다.
그러자 글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미 이곳을 벗어난 것 같다. 쫓을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