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이별주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어색한 얼굴로 함께 앉아 있었다.
에스파가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라빈과 다른 이들도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체 언제부터야?”
에스파가 먼저 운을 뗐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머리를 긁적였다.
“오래되진 않았는데…….”
“최근이라는 소리야?”
“응… 최근에…….”
“아니 근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될 수 있지!?”
라빈의 시선이 알렌시아에게로 향했다.
알렌시아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것 봐라.
알렌시아가 라빈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늘 당당하기만 하던 알렌시아의 모습은 어디 갔을까?
심지어 볼을 붉히며 얼굴을 숙이기까지 한다.
“하아-?”
라빈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 와중에 더욱 기가 차는 것은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크으… 청춘이다! 뜨거운 청춘이어요!!”
데미리우스가 박수치며 말했다.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아까부터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헤벌쭉 웃고 있는 이는 데미리우스만이 아니었다.
크로마제도 곁에서 바보 같이 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도대체 너는 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거냐.’
라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스승님! 축하드립니다. 알렌시아 누님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아니 적극 추천입니다!!”
크로마제가 쌍수 들고 환영하듯 외쳤다.
데미리우스도 옆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에스파도 슬쩍 그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솔직히 알렌시아라면… 그래. 알렌시아라면 오히려 내 친구에 비해 너무나도 아깝지. 얼굴도 이쁘고 키도 훤칠하고 마법 실력까지 뛰어난 알렌시아가 대체 왜 내 친구랑 연애를 시작한 걸까? 왜? 이것 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아무튼 축하한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에스파는 부러운 눈으로 아시테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러운 새끼…….
속으로 전하는 말이 아시테르에게 적나라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멋쩍은 미소를 보였다.
“축하해.”
가장 뒤늦게 팀으로 합류한 에이브릴이 알렌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
“솔직히 둘이 잘 어울리네.”
“그렇게 말해주니… 크흠…….”
알렌시아가 말을 하다 멈췄다.
마저 말을 이으려니 갑자기 낯부끄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시테르가 그녀의 손을 다독여 주었다.
“어라!? 그러고보니 못 보던 분이 계시네요?”
크로마제가 이제야 에이브릴을 확인하며 물었다.
참으로 빠른 눈치에 몇몇 사람들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자는 스승을 닮아간다더니…….’
‘아, 벌써부터 이러면 안되는데…….’
크로마제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에이브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개를 바라는 눈치였다.
아시테르가 이때다 싶어 말을 돌렸다.
“아, 여기는 에이브릴이라고 해. 우리 팀에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했어.”
“오오오!! 그럼 제 후배인 겁니까?”
라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새파랗게 어린 게 무슨 후배타령을.
“뭐라는 거야? 쟤는 내 언니야. 그리고 너는 아직 우리 팀에 정식으로 들어온 것도 아닌데 무슨 후배 타령이야? 죽을래?”
“아니… 라빈 선배. 벌써 잊은 거에요? 시련의 던전에서 우린 그 뜨거운 무언가를 함께 나누었잖아요!?”
“야… 그… 그… 그 뜨거운 게 뭔데!? 너 말 똑바로 안 할래……!?”
당황한 라빈이 순간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크로마제는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야 당연히 끈끈한 동료애 아니겠습니까!?”
“후후 그건 맞지만. 아직 크로마제 당신은 아카데미 학생도 아니지 않습니까?”
“에이, 꼭 아카데미 학생이어야 팀원인가요!? 서로의 등을 맞대고 마수들과 함께 맞서 싸웠으면 다 동료죠.”
“그거 어디서 많이 들은 말 같다?”
“맞아요. 스승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죠.”
크로마제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었다.
역시나 우등생인 녀석.
그는 던전에서 아시테르가 가르친 것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뿌듯함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뭐… ‘임시’로 받아줄게 그럼.”
“에에? 그걸 왜 라빈 선배가…….”
“왜긴 왜야? 내가 부팀장이니까.”
라빈이 당당하게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에스파와 알렌시아의 눈썹이 동시에 찌푸려진다.
데미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걸 결정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맞아. 누가 그래? 네가 부팀장이라고.”
“이건 저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군요.”
모두가 반발했다.
이에 라빈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아? 그럼 어디 한 번 붙어볼래?”
“얼마든지.”
“나도!”
“크흠… 일대일은 좀…….”
잠자코 듣고 있던 에이브릴이 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라빈이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뭐야? 언니도 할 말 있어?”
“나도 참가할래.”
“뭐!? 언니는 왜?”
“왜긴, 나도 이제 이 팀의 일원이잖아.”
“아니 그니까…….”
라빈이 낮게 한숨 쉬려는 때 크로마제가 번쩍 손을 들었다.
그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아시테르 스승님의 옆자리는 제가… 아니 옆자리는 이제 아닌가? 그럼 바로 뒤는 제가! 차지해보겠습니다.”
“야! 꿈이 크다 너? 아시테르의 바로 뒷자리는 나야 임마.”
에스파가 발끈했다.
그러자 크로마제도 지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에스파 형님이라도 봐 드리지 않을 겁니다.”
“이게…! 오호 그래! 정당하게 승부로 겨루자! 나도 이제 좀 강해졌다고!!!”
투닥거리는 그들을 보며 아시테르가 미소를 보였다.
알렌시아가 슬쩍 그의 볼을 꼬집었다.
“어……?”
“인기가 많으시네요.”
“에이 인기는 무슨…….”
“좋겠네 좋겠어.”
알렌시아의 삐진 말투에 아시테르가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이에 알렌시아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지금 뭐하는 거야?”
“아니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싶어서.”
“아직도 안 믿겨져?”
“으응…….”
그가 아직도 꿈속을 헤메는 듯한 얼굴을 하자 알렌시아가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드래프트 미션이 끝나고 먼저 고백한 것은 아시테르였다.
여러모로 수줍어하고 어색해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시테르는 알렌시아에게 담담한 고백을 전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알렌시아의 입장에서 바라본 아시테르였지, 실제로는 많이 달랐다.
에스파는 모른 척 연기했지만 사실 그도 아시테르와 알렌시아의 일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나마 주변에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이가 에스파였기 때문에 아시테르는 몰래 그에게 물었었다.
“뭐 별 것 있어!? 가서 확! 내 여자가 돼라!! 해버려!”
에스파는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과감하게 말했다.
그는 과장된 몸짓까지 보였다.
“남자답게 빡!!! 어!? 네 얼굴에 그 능력에! 뭘 망설여!?”
사실 이날 에스파는 술을 한잔 걸친 상태였다.
어쨌거나 아시테르도 순간 에스파의 말에 혹해 그렇게 해볼까 싶었다.
하지만 그를 살린 것은 형인 테오도라였다.
그는 아시테르에게 담백하게 말을 전하라는 조언을 담겨주었다.
“거창할 필요 없어. 그저 담담하게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돼. 진심을 전달하는 게 중요해.”
그의 말을 듣고 아시테르는 알렌시아를 찾아가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느꼈던 바와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들.
그것들을 과장없이 전했다.
알렌시아는 며칠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 했고, 아시테르는 그날 이후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수련에 매진했다.
그녀의 고민이 길어질 때 공주인 마르체니가 한 마디 더붙였다.
“망설이고 있는 거네. 그럼 이때 네가 한번 더 다가가봐. 그냥 가지말고 이거.”
마르체니는 근처 하인들을 시켜 정원의 꽃을 꺾어오게 했다.
그리곤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재주가 있으셨다니…….”
“왜. 나는 뭐 맨날 놀고먹고 하는 줄만 알았어?”
그녀는 만든 꽃다발을 아시테르에게 건네며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널 위해서 준비해왔다 뭐 그런 말 말고 그냥 이렇게 해. 오다 주웠다.”
“네……?”
“그러면 성공할 수 있어. 이게 바로 노스 왕국 고백법이야.”
“아니 공주님께선 이스트 왕국에 계신데 어떻게 노스 왕국의 고백법을……!?”
“다 아는 수가 있어. 아무튼 그렇게 해봐. 아마 알렌시아도 뻑갈걸?”
“알렌시아인 것은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너 바보야? 알렌시아 얘기할 때만 그렇게 웃고 있는데 어떻게 몰라? 내가 또 눈치 백단이야.”
“허어…….”
“그리고 조금은 미안하게 되었다.”
“네?”
아시테르는 처음에 마르체니 공주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런 것보다 알렌시아와의 관계 진전이 더욱 중요했다.
어쨌든 마르체니 공주의 조언을 듣고 아시테르는 알렌시아를 찾았다.
“뭐야 그 꽃은?”
“그… 그냥… 갑자기 네가 생각나서 사봤어.”
아시테르가 괜히 멋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고장난 얼굴 표정에 알렌시아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아시테르가 가져온 꽃다발을 받으며 동시에 아시테르의 마음도 받아줬다.
그렇게 그들의 연애가 시작되었고, 나중에서야 마르체니 공주가 사과를 전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근데 아시테르 너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어디 마법기사단에 들어가기로 했어?”
“당연히 백상 마법기사단이겠지. 거기에…….”
알렌시아가 있잖아.
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아시테르의 표정이 마치 울상짓는 것처럼 변했다.
“백상 마법기사단은 맞아… 아칼 단장님께서 날 받아주셨거든… 근데 문제는…….”
“문제는……?”
“나는 바로 왕실로 파견을 가게 되었다.”
“왕실로……!?”
“정확히는 마르체니 공주님 산하 왕실기사단으로…….”
“에에!?”
“그럴 수가 있나?”
모두가 놀라는 때 아시테르 혼자만 울상이었다.
알렌시아가 그런 아시테르를 위로 했다.
“너무 그런 얼굴 하지마. 어쨌든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널 찾은 거잖아.”
“마법기사가 되고 싶었는데…….”
“어쨌든 소속은 백상 마법기사단 소속이잖아. 그러니까 마법기사는 된 거지.”
“근데 대체 왕실기사단에서 날 왜…….”
아시테르가 아쉬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알렌시아와 연애를 하게 되었으니 같은 기사단에서 맘껏 활동하는 미래를 펼쳤는데… 가볍게 무산되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친구들이 그런 아시테르를 위로했다.
술잔을 들어올린 에스파가 크게 외쳤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각자의 길로 떠나지만! 꼭 다시 뭉치자!”
“물론이죠.”
“당연한 말을.”
“어차피 아시테르 스승님이 마법기사단을 이끌 겁니다.”
“호오… 그럼 그때 제대로 결정해보자고. 부단장으로 누가 어울릴지 말이야.”
“어라? 그거 되게 괜찮네요.”
“찬성. 그때까지 각자 알아서 강해져와.”
“근데 아시테르 씨는 마법기사단장이 돼서 뭘 하려고…….”
모두가 에이브릴을 쳐다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이 묘하다.
“아직도 아시테르 씨라니…….”
“하이고… 팀원이라더니 그 어색한 호칭은 뭡니까?”
“편하게 말해. 괜찮아.”
에스파까지 그녀에게 한 마디 전해뒀다.
그러자 에이브릴이 괜히 얼굴을 붉혔다.
그때 벌떡 몸을 일으킨 아시테르가 술잔을 들어올렸다.
“자! 아무튼!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우리 꼭 다시 뭉치자고!!”
“좋다!”
“네!”
“알겠습니다.”
모두를 둘러본 아시테르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다시 너희들을 찾을 테니까 그때까지 무사히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한다. 이건 다음 만남을 위한 이별주다!”
이 말을 끝으로 모두가 함께 이별주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