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파란의 신병 (1)
커다란 연무장 위로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합을 맞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의 열기로 연무장의 분위기도 한층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두툼한 철검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그들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아시테르가 그들을 바라보며 두 눈을 빛냈다.
“여기가 바로 왕실검술기사들의 수련장소다.”
“합쳐서 왕실검술기사단이라고 불리는 곳인가요!?”
“그래. 왕실마법기사단은 반대편이고. 헌데 이곳부터 보려고 할 줄은 몰랐구나.”
“저는 여기가 더욱 궁금했어요. 게다가 반가운 얼굴들도 있구요.”
아시테르는 선두에 서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베드롱을 보았다.
베드롱을 포함해 함께 노스 왕국으로 갔던 몇몇 기사단 인물들이 같이 보였다.
아시테르는 그 자리에 앉아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술을 가만히 관찰했다.
그가 갑자기 집중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게벨도 딱히 그 시간을 방해하진 않았다.
“하나!!”
“흐랴압!!”
“어이!!!”
여기저기 기합성이 울려퍼진다.
아시테르는 검의 움직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우직하고 곧다.
대신 일격일격에 담겨 있는 기세가 엄청났다.
‘확실히 비체 할아버지의 검술이랑은 많이 다르단 말이지.’
비체 할아버지의 검술은 현란하며 허초가 많은 편이었다.
그 많은 허초 속에 담긴 실초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상대는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반면 이스트 왕국의 검술은 그저 우직하게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나아가는 듯한 검술.
상대가 무엇이든 돌파해나가겠다는 기상을 보여주는 듯 했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평가할 순 없겠다.
그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을 테니.
“그래도 진짜 신기하고 재밌네.”
같은 검을 쥐고 있지만 그것에서 비롯되는 검술은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판데아에게서 배운 검술도 그러했다.
아시테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게벨이 넌지시 물었다.
“너도 함께 배우지 그러냐.”
“그럴 수 있어요?”
“당연하지. 너도 우리 왕실마법기사단의 일원이니까.”
“오오 그럼 당장 달려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 전에. 갑옷은 입고가야지 성미 급한 녀석아.”
게벨이 손짓하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사내들이 다가와 아시테르에게 갑옷을 입혀주었다.
그래도 판데아와 검술 수련을 하며 갑옷을 입어본 덕분에 제법 갑옷을 입는 모양새가 능숙했다.
“어디서 갑옷을 좀 입어 본 거냐? 마도사들이 걸치는 마법로브와는 달라 불편할 텐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구나.”
“루기아 가문에서 자주 입어봤습니다.”
“호오… 루기아 가문에서 네가 갑옷을 입어볼 일이 뭐가 있지?”
“판데아님께 검술을 배운 적이 있거든요.”
“이것 참… 신기한 놈이로구만… 아, 그러고보니 그때 이그트님과의 대결에서도 검술을 보여주었었지.”
“아하하… 그때는 제대로 검술을 펼쳐보기도 전에 검이 부러져버리는 바람에…….”
아시테르가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당시 이그트와의 대결에선 잔뜩 흥분한 바람에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부딪혀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제대로 된 검술다운 검술은 펼쳐보지 못했다.
검이 먼저 깨져버리는 바람에 금방 난타전으로 번져버렸으니…….
“그나저나 이그트는 잘 살고 있으려나…….”
갑옷을 다 갖춰입은 아시테르가 연무장쪽으로 향했다.
검술 수련을 주도하고 있던 제르무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응……?”
아시테르와 함께 다가온 게벨이 그에게 다가갔다.
게벨을 발견한 제르무트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오오 게벨님……!”
“제르무트님. 이번에 온 신병입니다.”
“신병이라구요? 그런 얘기는 못들었습니다만…….”
“정식 신병은 아니고 백상 마법기사단에서 빌려온 녀석입니다.”
“백상 ‘마법’기사단에서요……?”
마법이라는 말에 제르무트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마도사를 왜 이곳으로 데려왔냐는 표정이었다.
이는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게벨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뭘 걱정하는진 알겠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소속은 어디입니까?”
“마르테니 공주님 산하 제 9 기사단 소속입니다.”
“역시나…….”
반응이 이상하다.
역시나라니.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군요’ 라든지, ‘알겠습니다’ 라든지 많은 대답들이 있는데 역시나라니.
아시테르가 베드롱과 다른 선배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와 함께 노스 왕국을 다녀온 기사단 선배들만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흐음…….”
무슨 분위기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와 시선에 누구보다 익숙한 사람이 바로 아시테르였으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아카데미 학생 시절 매일 같이 겪던 시선과 분위기가 아닌가!
물론 그때는 테르세우스와의 약속 때문에 힘의 제약이 있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제 9 기사단이 이곳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쯤은 알겠다.
제르무트의 시선이 마침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이름이?”
“아시테르입니다!”
“본래 백상 마법기사단에 적을 두었는데 제 9 기사단으로 파견나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아시테르가 일부러 힘차게 답했다.
제 9 기사단의 막내로 들어왔으니 여기서 더 힘을 주어 기운차게 보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베드롱과 다른 이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마법기사단에 있는 놈이 여긴 왜 와?”
“잘못 온 것 아냐? 마법이나 익힐 것이지… 검술 수련장에는 왜…….”
“그나저나 9기사단 놈들도 이제 완전히 가버렸구만… 마법기사단에서 사람을 빌려올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목소리들.
아시테르도 그들의 얘기를 모두 듣고 있었다.
베드롱도 무안한 마음에 표정 관리가 되질 않고 있다.
사실 이곳에서 9기사단은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체니 공주가 이곳 왕국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부터 좋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좋은 인력을 배치할 리가 없다.
9기사단에는 사고를 치고 징계를 받거나 실력이 뒤떨어지는 기사단 인원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그들을 이끌고 좋은 결과를 거둔 것은 늘 게벨의 전반적인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 9기사단은 마법파와 검술파로 나뉘어 또 자기들끼리 싸우고들 있었으니…….
사실은 엄청나게 한심한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부끄러운 민낯을 이제 아시테르에게도 적나라하게 들킨다고 생각하니 베드롱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제르무트가 아시테르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인 줄은 알고 온 거겠지?”
“물론입니다! 왕실기사단의 검술 수련장이 아닙니까!?”
“그래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그런데… 지금까지 마법이나 연구해온 그대가 이곳에는 왜 온 거지?”
“검술을 배우고 싶어 왔습니다.”
“흐음… 검술을 배우고 싶어서 왔다라…….”
잠시 생각에 잠기는 제르무트.
그의 생각을 대변하듯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크하하하하!!!”
제르무트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동안 마법에만 매진해왔을 마도사가 갑자기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이곳에 왔다.
이는 곧 평생 검에만 매진하던 사내가 갑자기 마법을 배워보겠다며 기웃거리는 것과 같다.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이 신성한 검술 수련장에 발을 들이다니.
평소 같았으면 더는 들어볼 필요도 없었을테지만 하필이면 이 자를 끌고 온 자가 게벨인지라 함부로 내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이 놈!!!”
제르무트가 아시테르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두 눈을 부릅뜬 그를 마주하고서도 아시테르는 움츠러드는 기색 하나 없었다.
“설마 이곳을 가벼운 마음으로 들러본 것은 아닐 테지!?”
“물론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안 그러면 너를 이곳까지 이끌고 온 게벨님까지도 욕보이게 하는 거다.”
제르무트가 일부러 게벨까지 끌어들여 말했다.
게벨은 곧 제 9기사단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를 욕보이게 한다는 것은 결국 제 9기사단까지도 욕 보이게 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기사는 곧 명예를 생명처럼 중시하는 자들.
특히나 투사 출신인 게벨은 더더욱 명예를 중요시하는 인물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시테르의 똑부러진 답이 튀어나왔다.
몇몇 기사들은 순진무구한 그의 표정에 아직까지도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도 아시테르가 가벼운 마음쯤으로 검술을 체험하러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시테르의 검술 실력을 경험해봤던 베드롱과 다른 9기사단 일원들은 다른 생각이었다.
“어쨌든 왔으니 환영해주도록 하지. 참고로 우리들의 훈련은 상당히 고될 테니 각오하라고.”
“바라던 바입니다!”
아시테르가 크게 웃으며 답했다.
제르무트는 손가락으로 9기사단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서 서면 되네.”
“네!”
“그럼 신병도 왔으니 체력훈련부터 다시 시작해볼까.”
제르무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렬로 나열해 섰다.
그들은 곧 무거운 검과 방패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너도 이걸 들어라.”
베드롱이 아시테르에게 검과 방패를 챙겨주었다.
철제 방패와 검.
둘다 묵직한 무게를 자랑했다.
아시테르는 그것들을 받아들어 대열에 합류했다.
한 바퀴, 두 바퀴 금방 열 바퀴를 돌았다.
몇몇 이들이 굵은 땀방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로 가득한 연무장 안에서 아시테르는 기분 좋게 뛰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제르무트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연무장 열 바퀴면 나가 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시테르보다 다른 녀석들이 거친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한심한 녀석들.
어떻게 마도사보다도 체력이 딸릴 수 있는가?
어쨌거나 그렇게 연무장을 스무 바퀴나 돌았다.
아시테르는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내면서도 호흡을 차분하게 가다듬고 있었다.
“호오… 이것 봐라…….”
그 다음은 팔과 다리에 무거운 돌을 메달고 움직이는 체력 훈련이었다.
그러면서도 등에는 방패를 짊어지고 한쪽 손에는 검을 들어야 했다.
아시테르는 이 훈련 마저도 무리없이 해냈다.
“마도사주제에 무슨 체력이…….”
“제르무트님.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 녀석은 평범한 마도사가 아닙니다.”
“평범한 마도사가 아니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듣자하니 어렸을 때부터 검술도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체적인 조건이나 체력 등도 훌륭합니다. 그러니 저 녀석을 위해 애써 체력 훈련 단계를 낮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하하하!! 이보십시오 게벨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법기사단에 들어갔다는 것은 못해도 고위급 마도사에 올라섰다는 얘기인데… 저 어린 나이에 체력 훈련과 검술 수련까지 하면서 그게 가능할 리 없지 않습니까?”
“그게… 가능하더군요.”
게벨도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반응에 제르무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게벨의 말이라지만 쉽게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검술과 마법을 동시에 익히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어쨌든 마법 실력은 의심할 수 없다.
마법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마법기사단에 들어간다는 것은 요행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니까.
분명 일정 수준 이상에 이른 마도사일 것이다.
그러면 마저 의심해볼 수 있는 쪽은 하나였다.
검술.
어디서 검 몇 번 휘둘러 보고 검술을 배웠다 하는 거겠지.
게다가 게벨은 투사 출신이니 검술에 대한 식견은 낮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제르무트가 홀로 미소를 보였다.
백상 마법기사단에서 하필이면 제 9 왕실기사단으로 파견을 보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것을 드러내주면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