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어쩌다 들어온 복덩이 (1)
아시테르가 슈밥을 쓰러트렸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덕분에 덩달아서 제 9기사단도 왕실검술기사단 검사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야-!! 요녀석! 검술 실력이 꽤 있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 걸!?”
“그러게! 슈밥 선임기사를 쓰러트릴 정도면… 진짜 엄청난 거라고!”
“근데 그 검술은 누구한테 배운 거야!?”
제 9기사단 검술기사들은 현재 축제 분위기였다.
눈엣가시 같던 슈밥을 신참인 아시테르가 보기 좋게 쓰러트렸으니 다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베드롱도 멋지게 활약해준 아시테르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들은 아시테르가 어떻게 슈밥을 쓰러트릴 수 있었는지 궁금해 했다.
마법 실력이 뛰어난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설마 검술 실력까지 슈밥을 쓰러트릴 수 있는 수준일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시테르는 선배들에게 과거 루기아 가문에서 판데아와 검술 수련을 해왔던 것을 말했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기사들은 대신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덕분에 시원한 한방이었다!!”
“맞아. 슈밥 그 사람 맨날 우리 9기사단만 대놓고 무시해왔단 말이지!?”
“근데 신참한테 깨졌으니… 지금쯤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있을 거다.”
“그때 그 어안이 벙벙해 하던 표정 봤어!? 난 아직도 그 얼굴이 두 눈에 선해. 올해 본 장면들 중 최고의 장면이었다!!!”
그들이 잔뜩 신나하고 있던 때 게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표정을 살핀 베드롱이 슬쩍 입을 열었다.
“게벨단장님은 별로 기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아니. 아시테르가 슈밥을 쓰러트린 것은 통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예……?”
“너희들은 그대로이질 않느냐.”
“아…….”
모두가 숙연해졌다.
다들 알면서도 은근히 모른 척 하고 있던 사실을 게벨이 보기 좋게 꼬집어주었다.
그렇다.
사실 크게 변한 것은 없다.
그저 아시테르가 잠깐의 통쾌함을 선사해주었을 뿐.
그가 슈밥을 쓰러트렸다고 해서 제 9기사단의 인식이 바뀌는 것도, 하루아침에 대우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너희가 바뀌지 않으면 결국 소용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희가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바뀌려고 해도…….”
그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게벨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현실을 직시시키고자 말을 꺼내긴 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아시테르가 슬쩍 손을 들어올렸다.
“바뀐다고 하면 역시 우리 기사단이 더 강해진다는 의미일까요?”
“그래. 그렇지 않으면 다른 기사단 녀석들은 언제까지고 우릴 은근하게 무시할 거다.”
“그런데 게벨님이 계신데 무슨 문제죠!?”
게벨이라면 충분히 다른 기사들을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있다.
거기다 그때 본 게벨의 무력이라면 결코 어디가서 무시받을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시테르의 말에 게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본래 투사다. 거기다 나의 힘은 노스 왕국에 근간을 두고 있지. 때문에 나는 이들에게 함부로 나의 훈련 방법들을 알려줄 수 없다.”
게벨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테르는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만약 이곳에 있는 기사들에게 투사들의 수련법을 알려주면 그것은 곧 노스 왕국의 비밀 수련법을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스 왕국에서 투사들이 어떻게 길러지고 키워지는지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있는 만큼, 게벨 또한 투사로서 그 비밀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뭐 어차피 투사를 키운 팔할은 노스 왕국의 시련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장 투사들의 투기 운용법과 검사들의 마나 운용법은 그 궤부터 달리하기 때문에 게벨이 이곳의 검사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도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심지어 게벨은 남들을 가르쳐 본 경험도 거의 없다.
“그렇군요…….”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시선이 제 9기사단 일원들에게로 향했다.
아마 이러한 것들도 어쩌면 왕실 사람들의 계산 속에 있었겠지.
마르체니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염려한 누군가가 철저히 마르체니 공주를 왕권다툼에서 배척하기 위한 조치 같았다.
“그럼 아까 그 제르무트란 분은…….”
“제 6,7기사단의 훈련을 책임지고 계시는 분이다. 동시에 6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계시는 분이기도 하고.”
“아… 그랬군요…….”
“기사단을 훈련시키고 강하게 만드는 것도 본래 기사단 단장의 임무 중 하나… 하지만 나는…….”
게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동안 그가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이었다.
그 짐을 덜기 위해 더더욱 임무에 열심히 나선 것도 있었다.
그런 게벨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렸던 제 9기사단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게벨과 함께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만 해서는 소용없었다.
목적 없는 노력은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으니까.
강해져서 도움이 되고 싶어도 어떻게 강해져야 할지 모르겠으니…….
방향을 잃고 배회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싫어 부끄러움은 접어두고 다른 기사단의 훈련에 합류해 검술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어느 단장이든 기초적인 훈련 정도는 같이 해줬지만 정말 핵심이 되는 훈련들은 늘 자신의 기사단만 데리고 훈련을 했다.
그들을 비난할 순 없었다.
그것이 곧 각 기사단의 힘의 차이를 나타내는 방법이었고 또 선의의 경쟁을 유지하는 방법이었으니까.
아마 제 9기사단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이 반복되니 제 9기사단도 점점 의욕을 잃어갔다.
거기다 이런 상황은 검술기사들만 해당되는 얘기도 아니었다.
왕실마법기사쪽도 비슷한 상황.
아니, 오히려 그들이 더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단장이 검사라면 보통 부단장은 마도사가 맡아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데, 제 9기사단은 부단장도 공석인 상태였으니까.
덕분에 게벨이 마법기사들도 함께 이끌어야 했다.
그나마 그들 모두 게벨이란 사내를 인정했기 때문에 임무에선 수월한 편이었지만, 제 9기사단에 소속된 마법기사들은 하필 자존심까지 쎄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는 하지 않으려 했다.
“하아…….”
그 말을 들었을 때 아시테르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튼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
이것이 제 9기사단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었다.
“어쩐지…….”
영감, 아니 테르세우스가 수련이 끝나면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 제 9기사단에게 잘해달라 부탁하더니…….
아무래도 이런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그런 말을 남긴 모양이었다.
아시테르는 홀로 고민에 잠겼다.
이제 대충의 상황은 알겠다.
지금까지처럼 마냥 배우고 즐길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물론 이들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시테르 본인은 충분히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또 이들에게 받은 도움도 많았기에 은혜를 갚고 싶었다.
자신에게 잘 해준 제 9기사단과 그들이 모시는 마르체니 공주.
솔직히 마르체니에게 감사한 마음도 컸다.
그녀 덕분에 노스 왕국에도 다녀와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아시테르는 그 이후로도 마르체니 공주와 꾸준히 왕래하며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마르체니 공주는 아시테르의 부탁으로 시작한 빈민가 사람들을 돕는 일을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그녀 덕분에 이렇게 맘 편히 테르세우스와 수련까지 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으니 이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보니 정말 많은 도움들을 받았구나……!’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이 움직여 그 은혜에 보답해줄 차례였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한번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뭐!?”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앞뒤 생략하고 말해버린 탓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홀로 의미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일단 강해지고 싶으시죠?”
“물론이지!”
“당연한 말이다!”
“말해 뭐해…….”
“우리들이 강해져야 마르체니 공주님을 더욱 안전하게 지킬 수 있고 게벨 단장님의 부담도 덜어드릴 수 있겠지. 어디 그뿐이냐? 우리들이 강해지면 더 이상 다른 기사단 놈들에게 무시 받지 않아도 된다.”
“그래… 솔직히 우리들만 무시 받는 건 견딜 수 있는데… 게벨님과 마르체니 공주님까지 다른 놈들이 입에 담는 것은 굉장히 열 받는다고……!”
“맞아… 아마 우리들 모두 같은 생각일 거다. 마법기사쪽도 말이야.”
기사들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아시테르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럼 강해지기 위해서 죽을 각오로 노력할 마음들도 있으시구요?”
“당연하지!”
“물론이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온몸의 뼈가 다 부러진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건 좀…….”
“맞아. 너무 갔어 멀시.”
어쨌거나 그들의 마음은 아시테르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눈빛들은 불타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하신 말씀들과 그 마음들을 절대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근데 그건 왜?”
“너 설마… 네가 우리들을 가르쳐보겠다 뭐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
“에이… 설마 아무리 슈밥 선임기사를 쓰러트렸다지만 그런 얘기를 하려고…….”
“맞아. 참아라 아시테르… 네 마음은 알겠지만 마도사인 네게 우리들이 검술을 배웠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더욱 비웃음거리가 될 거다…….”
아시테르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 생각을 아예 안해 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비체의 검술은 이스트 왕국 검술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해 가르져주기 어려웠다.
비체의 검술을 배우게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지금까지 이룩해놓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에 덤벼들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들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도 없거니와 아시테르가 그들을 제대로 설득해낼 자신도 없었다.
그렇다고 루기아 가문의 검술을 함부로 이들에게 가르칠 수도 없었다.
아시테르는 루기아 가문의 일원이 아니니까.
하지만 루기아 가문의 사람이 이곳에 온다면?
“그럼 얘기가 달라지겠죠. 거기다…….”
판데아라면 이들의 검술 스승으로 흠잡을 곳이 없다.
사실 따지고보면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닐까 싶었다.
판데아에게는 왕실검술기사단의 스승이라는 이력이 생기고, 이들에겐 본래 검의 명가라 불리웠던 루기아 가문의 검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까.
거기다 판데아는 루기아 가문의 검술로 다시 인정받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
아시테르가 직접 배우고 겪으며 판단해봤을 때 루기아 가문의 검술은 결코 약하지 않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검술기사들이 루기아 가문의 검술을 익혀 세상에 위명을 떨친다면!?
아시테르의 얼굴에 벌써부터 미소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조금 전 체력훈련을 겪어봤을 때 그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러니 체력훈련 같은 경우는 아시테르가 슬쩍 자신의 방식을 집어넣어 판데아에게 부탁해보면 된다.
비체로부터 시작해 자신이 조금씩 변화시켜낸 바로 그 체력훈련 방법을 말이다.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함께 강해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아시테르는 그것들을 한시라도 빨리 시작하기 위해 곧바로 움직였다.
그가 가장 처음 한 것은 역시 루기아 가문에 있는 판데아에게 연락을 취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