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어쩌다 들어온 복덩이 (2)
가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판데아는 아시테르의 부름에 기꺼이 응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아들이 입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이런 기회를 주어서 너무나도 고맙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하죠.”
못 보던 사이 판데아의 몸집은 한층 더 커져 있었다.
아무래도 아시테르의 조언을 살려 그동안 신체 능력을 더욱 끌어올린 모양이었다.
아시테르가 느끼기에 루기아 가문의 검술을 좀 더 완전하게 다루기 위해선 기본적인 신체조건이 받쳐줘야 했다.
그래서 떠나기 전 아시테르는 자신이 느낀 바를 판데아에게 남김없이 전해주었다.
어디까지 참고용으로 들어주길 바래서였다.
하지만 판데아는 아시테르의 조언을 살려 신체를 더욱 강하게 단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그의 검은 더욱더 날카로움을 더해갔다.
결국 아시테르의 조언이 옳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너에게 큰 도움을 얻었다.”
“제가요?”
“그래. 네가 내게 해준 말 덕분에 나 또한 크게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판데아의 말은 정말이었다.
아시테르는 판데아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전보다 그의 기운이 훨씬 더 갈무리 되어 있다.
거기다 풍기는 분위기도 이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판데아는 아시테르를 따라 곧바로 제 9기사단 연무장으로 향했다.
별궁 뒤편에 자리한 만큼 다른 누군가가 이곳을 훔쳐볼 일도 없었다.
거기다 시끄럽고 요란하게 수련해도 상관없다.
그것을 불편해할 사람은 기껏해야 마르체니 공주와 그녀를 수행하는 사람들뿐이니까.
잠시 연무장을 둘러본 판데아가 곧 미소를 보였다.
“이 정도면 더없이 훌륭한 수련 장소가 될 것 같군.”
“그런가요?”
“후후후.”
판데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제 9기사단 인원들 앞에 섰다.
검을 찬 기사들만 이곳에 자리해 있었다.
왕실마법기사들은 아시테르의 특별한 주문으로 이곳에 없었다.
어쨌든 검사들의 면면들을 살펴본 판데아가 크게 외쳤다.
“반갑다! 내 이름은 루기아 판데아!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검의 길을 걷고 있는 사내다.”
애초에 검술 스승으로 초청된 만큼 판데아는 처음부터 말을 편하게 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반발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제 9기사단 대부분은 평민출신이었다.
신분적으로도 그가 먼저 말을 편하게 했다고 해서 불만을 가질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그대들에게 검을 가르칠 스승이기도 하다.”
“예!”
“예!”
“예!”
우렁찬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기세를 확인한 판데아가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다만 과연 저 기세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루기아 가문의 검술을 가벼운 마음으로 가르치러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어떻게 해서든 저들에게 루기아 가문의 검술을 제대로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이들이 루기아 가문의 검술로 위명을 떨칠 수 있을 터.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은 죽었습니다.’
아시테르는 가르치는 맛은 있었지만 훈련시키는 맛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를 테지.
벌써부터 이들을 잔뜩 굴릴 생각에 판데아의 머릿속엔 행복회로가 가동되고 있었다.
어쨌든 판데아의 훈련은 그날부터 바로 시작되었다.
아시테르도 그들의 사이에 껴서 훈련을 시작했다.
그때 먼발치서 누군가 걸어왔다.
“훈련은 나도 함께 받도록 하지.”
“네!? 게벨 단장님도요?”
“물론이다.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에는 나이도, 직위도 상관없질 않겠나.”
“그건 그렇지만…….”
“나 또한 그대들과 같은 검술을 익히며 새로운 무에 도전해보겠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게벨의 시선이 판데아에게로 향했다.
판데아로서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게벨만큼 루기아 검술에 특화된 몸은 없었다.
균형 있게 몸을 발달시킨 게벨이라면 분명 위력적인 루기아 검술을 펼쳐낼 수 있을 것이다.
“성심성의껏 가르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게벨도 다른 이들과 같이 훈련용 갑옷을 입고 수련에 참가했다.
판데아는 큼지막한 돌을 짊어지고 돌산을 오르내리게 하고, 무거운 중검을 들고 일부러 천천히 검을 내리치게 만드는 등 갖가지의 힘든 수련들을 아낌없이 시켜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루기아 검술의 1식, 2식 등 검식을 알려주어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첫날부터 고되게 훈련을 시켰음에도 불구 어느 누구 하나 포기하며 쓰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텨내며 모든 수련들을 끝마쳤다.
“후아……!”
“으으… 으으…….”
“주… 죽겠다.”
“이러다 진짜 죽을 지도 모르겠는 걸…….”
손아귀에 물통을 들 힘도 없었다.
너무 힘이 들어 팔이 아예 올라가지 않는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많은 기사들이 곡소리를 내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게벨도 낮은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단장님.”
그에게 물을 가져간 베드롱이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도 온통 땀범벅인 얼굴이었다.
하기사 이런 강도의 훈련을 받고 멀쩡한 얼굴을 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라고 생각한 순간 게벨은 아시테르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시테르는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연무장 위에 서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직 성에 차지 않는지 홀로 남아 판데아와 검술 대련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사이 초위급 마도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예!? 아니 그 사실을 어떻게 벌써…….”
“후후 우리 루기아 가문의 정보력을 얕보지 마라.”
“아니죠… 테르세우스 영감님이 입이 가벼우신 거겠죠.”
“크하하하!! 테르세우스 군단장님께 영감님이라니! 역시 자네다워.”
카앙!!
판데아의 검과 아시테르의 검이 허공에 부딪혔다.
판데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마법 연구만 하느라 검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법과 검은 제 오른팔, 왼팔과도 같습니다.”
“다행이군. 그렇다면 어디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아니면 그대로인지 확인해볼까!?”
판데아의 검이 수평으로 섰다.
아시테르가 그의 검끝에 집중했다.
판데아가 검을 휘두르자 검끝이 기이한 각도로 기울었다.
이를 확인한 아시테르가 빠르게 발을 놀렸다.
캉! 카가강!! 카강!!
허공에 불꽃이 번쩍번쩍 튀었다.
아시테르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이면 판데아의 검이 간결한 움직임으로 흐름을 끊으려 들었다.
하지만 아시테르의 검은 끝까지 곡선을 유지했다.
“하압!!”
기합을 내지른 판데아가 검끝을 돌렸다.
짧은 움직임으로 아시테르의 검을 튕겨낸 판데아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촤락!
기이하게 꺾인 검이 아시테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호오……!”
“우와!!”
“방금 그건!!”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게벨도 놀랍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판데아의 검이 아시테르의 뺨을 스쳤다.
놀란 아시테르가 뒤로 몸을 물렸다.
“이야! 확실히 대단하구만! 본능적으로 나의 검을 피하다니 말이야.”
“방금 그건…….”
“놀랐지? 이게 바로 진짜 루기아 가문의 검술이다.”
“와아…….”
아시테르가 놀라움과 신기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이럴 때면 당황할 법도 한데 아시테르는 마치 조금 전 그것을 가르쳐달라는 눈빛으로 판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아시테르. 조금은 당황한 빛이라도 보여야 하는 것 아냐?”
“아뇨 이래보여도 진심으로 당황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검로로 공격해 들어오시다니…….”
“후후 네가 아니라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치명상을 입었을 거다.”
아시테르가 다시 검을 고쳐잡았다.
판데아가 얼마든지 들어와 보라는 듯 손짓했다.
아시테르가 호기롭게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의 검과 판데아의 검이 쉴 새 없이 부딪혔다.
그 사이 게벨이 베드롱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가. 훈련은 할 만한가?”
“아직 첫날이라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지금까지 받아왔던 훈련들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다른 느낌이라니?”
“흐음… 가르치는 사람의 정성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뭐 그런 느낌 있지 않습니까. 죽을 둥 살 둥 검을 배우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데 그 와중에 느껴졌거든요. 판데아님이 얼마나 진심을 다해 저희들을 가르치고 계시는지…….”
“그것은 나도 느꼈다. 저 사람은 단 한 명의 기사들도 허투루 살펴보지 않고 있었으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놀랐고 또 기쁘기도 했습니다.”
베드롱이 판데아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뭔가 목적지가 생긴 느낌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걷는 느낌이 아닌… 뿌연 안개 속에서 마침내 길을 찾아낸 기분입니다.”
“후후… 판데아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나?”
“지금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그 실력을 의심하겠습니까?”
콰아앙!!
판데아의 검에는 어느새 옅은 오러가 맺혀 있었다.
그가 보이는 검식들을 보며 아시테르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게벨 단장님.”
“응?”
“저는 왜 이렇게 흥분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솔직히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다들 말은 안 해도 제 9기사단이 마르체니 공주님을 모시는 기사단으로써 주류에서 밀려나는 곳이라 생각해왔을 겁니다.”
베드롱의 말에 게벨이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마르체니가 왕실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그러했으니 그녀를 모시는 기사단의 위치라고 다를 것 없었다.
그러니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근데 보통 이런 곳에 오는 기사들이면 대게 자포자기한 상태로 주저앉게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우리 기사단 사람들은 게벨님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든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점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네.”
“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그것도 공주님이 데려온 뜻밖의 인연 덕분에 말이죠. 저희는 어렵게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러고보니… 참 재밌는 아이가 아닌가. 갑자기 합류해 노스 왕국에선 이그트님과 동수를 이루더니… 군단장님이신 테르세우스님의 총애를 받아 그분에게 따로 수련을 받고… 이제는 우리 제 9기사단의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주고 있다니… 어떻게 보면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친구로군.”
“아니요.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게벨님은 저희들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게벨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완전 오합지졸 그 자체였을 겁니다. 게벨님이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해주셨다면 저 복덩이 녀석은 우리들에게 길을 안내해주고 있는 겁니다.”
베드롱의 말에 게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아시테르는 제 9기사단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자마자 이곳의 문제들을 막힘없이 척척 해결하고 있었다.
검술기사들에게는 판데아라는 검술 스승을 데려와 주었고, 왕실마법기사들은 단번에 시련의 던전으로 보내버렸다.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 아시테르의 말에 따라 왕실마법기사들은 순순히 시련의 던전으로 향했다.
거기다 그곳에는 또 다른 마법스승이 붙었다고 한다.
심지어 훈련에 필요한 물자들도 아시테르는 자연스럽게 해결해버렸다.
“아, 그거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려 두 개의 가문에서 훈련을 지원해주었다.
한 곳은 판데아가 있는 루기아 가문이었다.
판데아가 직접 이곳으로 온 데다, 루기아 가문의 프라울리 가주도 가문의 검술이 판데아의 뜻에 따라 다시 빛을 발했으면 싶었기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은 뜻밖에도 체르도네 가문이었다.
어쨌든 두 귀족 가문이 지원해준 덕분에 훈련에 대한 걱정도 덜었다.
그 모든 것들을 짧은 시간 내에 해내버린 아시테르를 보며 베드롱이 혀를 내둘렀다.
“진짜 대단한 놈이라니까요…….”
“후후… 정말 어쩌다 들어온 복덩이로군.”
게벨이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