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왕실기사단으로서의 첫 임무 (2)
“제… 제발 살려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다 드리겠습니다……!”
손과 발이 묶여 있는 귀족들.
그리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의 가슴팍에 있는 뿌리 형상의 문양이 특히 눈에 띄었다.
문양을 알아본 누군가가 이를 악물었다.
“크윽… 발할라 놈들! 네놈들이 어떻게……!”
아무리 기습에 당했다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성을 내줄 줄은 몰랐다.
발할라 군의 습격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그들은 어둠을 틈타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을 단숨에 제압했으며, 마치 내부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성의 주요 인물들을 일시에 덮쳤다.
덕분에 성의 주인인 브뤼엘도 자던 중 습격을 받아 허무하게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놈들은 곧바로 달모르 영지의 길목들을 차단해 외부와의 연결까지 끊어버렸다.
이는 이곳의 지리를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브뤼엘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부에 놈들을 도와준 자가 있지 않고서야…….”
그때서야 브뤼엘이 혀를 찼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
누군가가 발할라와 내통해 순식간에 이런 습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그럴려면 성의 사정에 대해 훤히 아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브뤼엘이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찾았다.
없다.
매일 같이 보던 얼굴이니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금방 찾아낼 수 있는데 비슷한 얼굴조차 보이질 않았다.
“설마… 푸스티무스… 그 자가 우릴 배신한 것인가……!”
오랫동안 브뤼엘의 곁을 지켰던 인물이 바로 푸스티무스였다.
평민 출신이었던 그의 가문은 선대 때부터 줄곧 인티로던 가문을 모셔왔다.
그렇기 때문에 푸스티무스는 이곳의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브뤼엘이 모르고 있는 것조차도.
브뤼엘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역시나 푸스티무스의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이런 제기랄…! 가장 믿었던 자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브뤼엘이 이를 악물었다.
푸스티무스가 배신했다면 모든 것들이 순순히 이해가 되었다.
성안의 병력 배치나 비밀 통로 같은 것들도 푸스티무스는 상세하게 알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푸스티무스가 무슨 이유로 자신과 가문을 배신했느냐는 점이다.
“쳇… 역시 그 일 때문인가……!”
그러고보니 과거에 브뤼엘과 푸스티무스가 약간의 언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 이런 일들을 꾸민 것이 아닐까.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푸스티무스….! 결국 귀족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날 끌어내리려 하는 거냐……!”
발할라에 관한 거라면 브뤼엘도 잘 알고 있었다.
귀족도, 평민도, 천민도 없는 나라.
놈들은 평등을 꿈꾼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푸스티무스는 귀족이 되지 못할 바에야, 발할라를 도와 귀족들을 끌어내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브뤼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푸스티무스의 배신을 확신하고 있었다.
붙잡힌 가족들과 그의 사람들을 보며 브뤼엘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은 이제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신세다.
언제 이 불꽃이 꺼질지 모르는 상황.
심지어 발할라 군은, 특히나 귀족들에게 무자비하기로 유명했다.
“놈들을 끌고 왔습니다.”
그때 복면을 쓴 누군가가 다섯 명의 기사들을 끌고 왔다.
그들을 알아본 브뤼엘이 절망했다.
다섯 명의 기사들 모두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몰래 내보냈던 인물들이었다.
“죄송합니다. 브뤼엘님…….”
“면목 없습니다.”
기사들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브뤼엘이 그들을 바라보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믿을 것은 저들뿐이었는데, 저들마저 잡히다니…
이제 희망조차 없다.
“죄송할 짓은 왜 했어?”
뎅강―
다른 복면인이 검으로 기사들의 머리를 하나씩 내리쳤다.
그들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럴 수가…. 어찌 이리도 잔인하단 말이오!?”
누군가의 절규에도 복면인은 다섯 명의 기사들을 내리 참수해버렸다.
그들을 향해 분노한 브뤼엘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수장으로 보이는 듯한 청년이 이쪽을 바라보며 조소를 흘렸다.
“잔인해? 이게? 너희들은 그동안 어땠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인들을 몇이나 죽였지? 가까이에 있는 하녀들을 겁간한 건? 그런 건 너희가 귀족이니까 괜찮은 거냐?”
“그게 무슨…….”
“우리 어머니는 귀족들에게 겁간 당한 수치심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아버지는 그 귀족놈들에게 복수를 하려다 돌아가셨고. 잘난 기사놈들은 상대가 귀족이라 우리들의 말은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았지.”
그의 말에 브뤼엘이 이를 악물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가!?”
“후후 진짜 웃기지 않아? 다른 일에는 같은 귀족들이라고 감싸고 돌더니… 꼭 이런 일들에는 서로 자기랑은 관련 없는 일이래. 나는 이게 더 구역질난다니까.”
“이… 이보게…! 몇몇 귀족들이 잘못했다고 해서 다른 귀족들까지 다 죽어 마땅한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질 않은가?”
“그니까 웃기잖아. 몇몇 평민들이 잘못하면 너희들은 그 사람들과 관련된 다른 평민들까지 모조리 죽이거나 벌을 주는데 그 대상이 평민에서 귀족으로 바뀌면 왜 안 되는 거지?”
“그건…….”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 하나 말해줄까?”
청년이 비릿한 미소를 보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브뤼엘의 아들인 필렌이 있었다.
필렌은 조금 전부터 시선을 내리깔고 두려움에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내… 내 아들은 건드리지 말아다오…! 내 아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아하하!! 야 필렌이라고 했나? 네가 직접 말씀드리지 그래?”
“아…….”
필렌이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브뤼엘이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너희들!!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벌인 거냐!?”
“우린 아무것도 안 했어. 당신 아들이 여자 마음 좀 얻어보겠다고 집안을 팔아먹은 것 뿐이지.”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인까지 있으면서 말이야.”
필렌이 갑자기 차가운 바닥에 자신의 머리를 박았다.
그리곤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뭐……?”
“다… 제 잘못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필렌!!”
그때 발할라 군 사이에서 예쁘장한 외모의 여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고개 숙인 필렌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마웠어요. 필렌님. 성의 배치도까지 알아서 가져다주고.”
여인을 본 브뤼엘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평소 필렌이 여인을 밝힌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필레에에엔!! 너 설마!! 네놈이!!”
“죄… 죄송해요 아버지… 저도 속아서…….”
“닥쳐라!!”
머리끝까지 분노한 브뤼엘이 두 눈을 부라리며 필렌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발할라 군이 한껏 미소를 보였다.
“그나저나 여기 귀족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쓸모가 없어지면 다 죽여야지.”
“네. 하지만 정말 놈들ㅇ…….”
콰라랑―!!
거친 폭음과 함께 외벽이 무너졌다.
주둔하고 있던 발할라 군 전부가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벌써 놈들이 왔다고!?”
지원군이 도착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적어도 다음 날 오후쯤은 되어야 올 줄 알았는데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이곳에 있는 발할라 군을 이끌고 있던 모렌티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벌써 알고 온 거지!?”
바깥으로 지원을 요청하려던 기사들은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런데 놈들이 어떻게 알고 벌써 찾아온다는 말인가!?
그때 몇몇 인원들이 돌아와 상황을 알렸다.
“죄송합니다 조장… 놓친 녀석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뭐라고!?”
“비밀 통로로 빠져나간 자인데… 팔 하나를 자르고 한쪽 다리에 화살까지 박아 넣었는데… 놈이 끝까지…….”
“쯧… 어쩐지 빠져나간 녀석이 하나 있었나.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이곳 근처에 기사단급의 전력은 없었다. 아마 급하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잡졸들일 거다. 빠르게 처리하고 이곳을 빠져나가면 돼.”
“귀족들은 어떻게 할까요?”
“하는 수 없지. 데려갈 몇 놈 빼고는 다 죽여버려라.”
모렌티지의 명령에 수하들이 움직이려는 때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둘 순 없죠.”
화르륵―!
허공에 나타난 불꽃이 단숨에 몸집을 불리며 인질들에게 접근하던 발할라 군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번진 화염에 모렌티지가 인상을 굳혔다.
“화염 마도사인가.”
그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몇몇 수하들이 먼저 움직였다
그들은 마법으로 화염을 꺼트리려 했다.
그때 다른 쪽에서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시테르! 그렇게 너 혼자 먼저 가버리면 어떻게 하냐!?”
“죄송합니다. 베드롱 선배님. 하지만 상황이 워낙 급해 보여서요.”
“그래도!!”
“아니 잘했다.”
게벨이 안쪽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죽은 이들은 기사 다섯.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구해내야 했다.
“오오!! 왕실기사단이 와주다니!!”
게벨과 베드롱의 갑옷을 확인한 브뤼엘이 환호에 찬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곧 그들의 행색을 보곤 입꼬리가 슬쩍 내려가 버렸다.
“마도사는… 마도사는 겨우 한 명 뿐인가…!? 나머지는 다 검사들이라니…….”
기사들은 모두 검을 차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이곳에 온 자들 모두 검사라는 뜻.
그나마 한 명 정도 마법을 쓸 줄 아는 모양인데 그마저도 검을 차고 있다.
“마도사들은… 마도사들도 후방에 있는 거겠지?”
브뤼엘이 게벨을 바라보며 물었다.
애석하게도 게벨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온 기사들 중 마도사는 저 녀석과 다른 한 명. 두 명뿐이오.”
“아… 아아……!”
게벨의 답에 브뤼엘의 표정이 경직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속에서 검사들만 잔뜩 데려오다니!
발할라는 마도사들이 즐비한데다 숫자도 왕실기사단 보다 훨씬 더 많다.
브뤼엘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마도사들도 없이 어떻게 하려고……!”
“으하하하―!”
그때 먼발치서 서 있던 모렌티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럼 그렇지.’
어쩐지 너무 빨리 도착했다 싶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해보니 근처에 있던 검술기사들만 황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저기 두 명의 마도사는 운좋게 끼어 있었던 모양.
마법기사들이 없는 검술기사들은 그야말로 반쪽짜리 왕실기사단이 아니겠는가.
잔뜩 경계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것 참… 우리들이 어지간히도 만만히 보였나보군… 마도사들도 없이 이곳에 들이닥치다니!”
“것참… 있는데 자꾸 없다고 하니 듣는 마도사 녀석이 서운해하겠구만.”
“시끄럽다! 모두 뭐하고 있어!? 저 녀석들을 처리해라!”
모렌티지가 수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찮은 검술 따위로 자신들을 어찌 상대하겠다는 건지.
결국 두 가지 중 하나다.
자신들의 실력을 너무 과신하고 있거나, 반군인 발할라의 전력을 너무 얕보고 있거나.
아니면 둘 다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부터 몸소 깨닫게 해주면 되니까.
저들이 무슨 실수를 범했는지 말이다.
모렌티지의 명령을 받은 수하들이 일제히 뛰어들었다.
“레이몬드!!”
“맡겨주십시오!”
레이몬드가 검을 들고 빠르게 뛰쳐나갔다.
그러자 두 명의 발할라 군이 앞으로 마주나왔다.
“으라랍!!”
레이몬드의 검이 빠르게 십자를 그렸다.
붉은 핏물이 하늘 위로 튀었다.
순식간에 두 명을 쓰러트린 레이몬드가 방패를 들어 올렸다.
파바방!!
날아온 돌덩이들이 방패에 막혔다.
방패를 올리고 레이몬드의 검이 일직선으로 나아가자 또 한 명의 발할라 군이 비명을 토해내며 쓰러졌다.
“우오오!”
순식간에 세 명이나 해치운 레이몬드가 함성을 토해냈다.
뒤이어 뛰어든 왕실검술기사들이 마주 오는 적들을 쓰러트렸다.
“방패!”
게벨의 명령에 기사들이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라랑!!
쏟아지는 마법 공격들을 방어해낸 기사들이 일제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안에서 튀어나온 검들이 다가오는 적들을 무참히 베어버렸다.
아주 잠깐의 교전이었지만 모두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모두가 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이만큼이나 성장했다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수하들을 보며 게벨도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