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에도피아 (1)
이스트 왕국에서도 가장 동쪽편에 위치한 에도피아.
이곳은 크고 작은 전투가 매일매일 끊이질 않는 곳이었다.
인류의 손이 오랫동안 닿아온 도심과 다르게 이곳은 아직까지도 다양한 마수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마르체니 공주와 제 9기사단이 에도피아에 도착하자마자 전투를 치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떨어진 오크떼가 에도피아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제 9기사단은 처음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던전이 아닌 바깥에서 이렇게나 많은 마수들을 마주친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오크떼만이 아니었다.
무리를 이루진 않지만 가끔은 트롤들도 에도피아까지 내려와 사람들을 공격했다.
덕분에 제 9기사단은 지난 3개월간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뭐만 하면 마수들이 산에서 내려와 인간들을 공격해대니 오히려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동안은 어떻게 버텨왔는지 오히려 신기할 정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당백의 인간이 둘이나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게벨과 아시테르는 내려오는 마수들을 혼자서 수십씩 상대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오길 3개월.
어느덧 에도피아에는 새로운 별명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먼저 게벨에게는 ‘강철주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모든 마수들을 맨주먹으로 패는 게벨을 보며 에도피아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아시테르는 ‘붉은 비’로 불렸다.
그가 있는 곳엔 불꽃이 비가 되어 내린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별명이었다.
실제로 아시테르를 대표하는 마법이 불꽃의 비였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도 아시테르의 별명을 썩 마음에 들어했다.
다만 아시테르는 그 별명이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렇게 불릴 때마다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하곤 했다.
어쨌든 제 9기사단이 에도피아로 와준 덕분에 마수들로부터 입던 피해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마르체니는 그동안 에도피아 사람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지식들을 전수하며 농작물과 다른 문화들을 발전시켜 나가려 했다.
안팎으로 성장세를 보이는 에도피아의 모습에 주변 영지들도 은근히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흐음… 에도피아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네. 마르체니 공주님이 오신 뒤로부터 생활수준이 현격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현격히…? 근데 그럴 수가 있나? 고작 공주 한 명이 왔다고?”
에도피아의 바로 옆에는 ‘엠벨’이라는 이름의 영지가 있었다.
이곳의 성주인 호가드니는 자신의 턱을 괴며 얘기를 듣고 있었다.
분명 엠벨보다 훨씬 더 뒤떨어지는 영지가 바로 에도피아였다.
때문에 상인들도 에도피아보다는 엠벨에서 거래를 끝마치려 한다.
헌데 요즘 들려오는 소문들이 심상치 않았다.
에도피아의 치안 문제가 해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유입이 늘기 시작했다.
엠벨은 사람들의 손을 많이 거친 지역이었다.
반면 에도피아는 자연을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고 보존하며 살아온 곳.
때문에 그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눌러 앉는 이들도 많았다.
거기다 에도피아에서는 천연 자원도 생산되고 있었다.
그것들에 눈독들인 귀족들이 여럿 있었으나, 결국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것들을 차지하고자 나서봤자 끊임없이 에도피아를 공격해오는 마수들을 막아내는 비용이 더 들어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에도피아의 성주 로트말론이 여러 지역의 성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이유였다.
아예 그 천연자원들을 모두 차지하는 거면 모를까, 성주 로트말론이랑 나눠가지면서 마수들의 침입에 대한 방어를 나눠 부담하기에는 손해 보는 장사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호가드니도 로트말론의 부탁을 거절해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호가드니의 엠벨 영지는 아주 풍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헌데 언제까지고 자신의 영지보다 아래로 취급받던 에도피아가 서서히 치고 올라오자 이것이 또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말이 되나? 마르체니 공주는 왕권다툼에서 진즉에 밀려난 인물이다. 거기다 제 9기사단은 왕실기사단 중에서도 모자란 놈들만 있는 곳이라며? 다른 왕실마법기사단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진다는 놈들인데… 그런 놈들이 왔다고 에도피아가 살만해져? 그게 맞아?”
“예… 놀랍게도… 마르체니 공주님과 제 9기사단이 에도피아에 도착한 뒤부터 급격하게…….”
“웃기지 마라!!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흐음… 그래도 이제는 꽤나 유명해졌습니다. 강철주먹 게벨과 붉은 비 아시테르는 이미 그쪽 지역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크흐흐, 그래봤자 그냥저냥하는 수준일 거다. 잘 들어봐라 해드슨. 너 같으면 이런 외곽지역에 실력 있는 기사들을 보낼 것 같으냐? 기껏해야 산을 내려오는 마수들이나 상대해야 하는데?”
호가드니의 말에 해드슨이라 불린 사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력 있는 기사들을 굳이 이곳까지 보낼 이유가 없었다.
“흐음…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게 뭔데?”
“마르체니 공주님이 에도피아로 오고나서부터 그곳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거기다 훨씬 좋은 쪽으로요!”
“크흐흐… 어쩌면 모두 거품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무엇을 말입니까?”
“정말로 에도피아가 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풀려진 소문인지 말이야.”
“만약에 에도피아가 변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한 걸 뭘 물어봐? 당연히 집어삼켜야지. 로트말론이 명망있는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곤 하나 결국엔 과거의 영광일 뿐이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로트말론님의 가문은 역사적으로 에도피아와 오랫동안 함께 해온 가문입니다. 그런 가문을 제치고 호가드니님께서 에도피아를 차지하려 한다면 분명 에도피아의 사람들도 반발이 심할 겁니다.”
“알게 뭐냐. 그놈들이 반발해봤자지.”
호가드니의 행동은 굉장히 빨랐다.
그는 곧바로 수행인들과 함께 에도피아로 향했다.
에도피아에 도착했을 땐 호가드니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뭐야……?”
분명 마지막으로 왔던 에도피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폐허같은 집들이 줄을 서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럴 듯한 건물들이 여러 채 들어서 있었다.
거기다 깔끔하게 구분된 농장들과 토실토실하게 살이 차오른 가축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그뿐인가?
에도피아 사람들의 옷도 이전과는 달랐다.
“저… 정말로 달라졌군요… 한 눈에 봐도 달라졌어요…….”
해드슨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호가드니는 곧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이건 그냥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상식 밖의 일과도 같았다.
‘이게 겨우 3개월 만에 가능한 일이라고……!?’
정말 그럴 수가 있는가?!
그동안 에도피아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마르체니 공주 일행이 이곳에 온 것 뿐인데.
그것 말고는 별다른 변화조차 없는 영지인데!
호가드니가 주변을 살피는 동안 반백머리의 중년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서오십시오 호가드니님.”
“오오 그라쿠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호가드니님께서도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저희 또한 아직까지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으하하하!! 로트말론의 얼굴도 꽤나 폈겠구만!”
“물론입니다. 성주님의 얼굴이 많이 밝아지셨습니다. 모두 마르체니 공주님과 제 9기사단 여러분 덕분입니다.”
“나참… 어딜가나 다들 그 얘기들뿐이니 나도 점점 궁금해지는군.”
“아! 그렇다면 잠시 보고 가시겠습니까? 마침 이 근처에서 제 9기사단 분들이 전투 중이실 겁니다.”
“전투?”
“예. 그렇습니다.”
“정말 잠깐 참관해도 괜찮은가?”
“네.”
“돕는 게 아니고 ‘참관’ 말일세.”
“예. 보고만 가셔도 됩니다.”
호가드니의 말에 그라쿠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온 김에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을 텐데.
확실히 태도도 달라졌다.
거기다 저 여유는 무엇인가!?
늘 어딘가 조급해보이고 불안해 보이던 그라쿠스이건만…….
“알겠네. 그럼 직접 보도록 하지.”
호가드니가 잠깐 발길을 돌렸다.
그라쿠스는 호가드니 일행을 데리고 외곽지역으로 향했다.
방책(防柵)이 세워진 곳에 병사들 수십 명이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오크 무리였다.
수백 마리가 넘도록 군집 생활을 하는 마수들이 바로 오크들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들 중 소수가 떨어져 나온 모양이었다.
대략 50마리 정도의 오크들이 방책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오크들과 용감히 맞서 싸웠다.
병장기가 휘둘러질 때마다 빛에 번쩍거렸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고 쓰러지는 병사들도 더러 있었다.
오크들의 숫자는 그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줄어들었다.
에도피아 병사들은 아직 엉성하긴 하지만 나름 전술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며 오크 무리를 제압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열 명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가슴에 박힌 ‘IX’자를 보며 호가드니가 눈매를 좁혔다.
“저들이 바로…….”
“네 맞습니다. 제 9기사단의 기사들입니다.”
“호오…….”
그라쿠스의 말에 호가드니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특히나 호가드니의 곁을 지키는 밸크로 기사단이 더욱 눈을 빛냈다.
밸크로 기사단의 대장 드웨인이 곧 낮게 비웃음을 흘렸다.
“기대 이하로군.”
“크흐흐… 저 정도면 용병들 사이에서도 높은 등급엔 못 들어갈 것 같은데…….”
“왕국의 기사들이 고작 저 정도 수준이었나?”
“뭐… 당연한 것 아니겠어? 솔직히 실전 경험만 봐도 우리들이 훨씬 더 많을 걸?”
“하나만 봐도 열을 알 수 있다고, 요즘 유명해진 강철주먹이랑 붉은 비도 별거 없겠네.”
기사들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호가드니가 내심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밸크로 기사단의 전신은 밸크로 용병단이었다.
이 근방에서 제일 잘나가는 용병단 중 하나인 밸크로 용병단을 호가드니가 많은 돈을 주고 불러온 것이다.
“성주님. 더 볼 것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만만한 드웨인의 말에 호가드니가 그럼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구색을 갖추긴 했지만 사실 호가드니의 눈에도 저들은 어딘가 엉성해보였다.
‘역시나 소문이 부풀려진 모양이구만… 하여간…….’
이래서 진실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호가드니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반면 그라쿠스는 무어라 말을 더 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밸크로 기사단에 대해서는 그라쿠스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더 말을 덧붙여서 이들을 자극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라쿠스는 연신 뒤편으로 시선을 두었다.
저곳에 있는 이들은 제 9기사단에서도 가장 실력이 뒤처지는 이들이다.
그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나머지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이라 들었다.
그와 더불어 에도피아 병사들의 수준도 함께 향상시키기 위해 같이 수련을 받는 중이었다.
“다시 봐도 놀라워… 저렇게 실전 전투를 치르면서 수련을 할 수 있다니…….”
3달 전만 해도 까무러칠 정도로 놀랄 광경이었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에도피아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였던 오크가 이제는 수련 대상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저들을 수련 시키고 있는 붉은 비 아시테르가 이런 말을 남겼다.
“오크는 수련 대상으로 아주 좋습니다! 그 이유는 번식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에요.”
“예…? 그러면 더 안 좋은 것 아닙니까……?”
“아뇨. 번식력이 매우 뛰어난 데다 성장도 빠르니 조금만 가만히 내버려두면 또 순식간에 숫자가 불어나서 오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따로 전투 연습용 상대를 만들 필요도 없잖아요! 매 주기마다 오크들이 찾아와서 좋은 연습 상대가 되어줄 텐데!!”
해맑게 말하는 아시테르의 말에 성주인 로트말론은 물론 그라쿠스도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제 9기사단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신참이자 막내라는 아시테르의 말에 반박하고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게벨은 아시테르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게 시작이었지…….”
그들이 말하는 실전 같은 연습이 정말로 실전이 될 줄은.
근데 또 어처구니없게도 정말로 이 방법이 에도피아의 병사들을 점점 강병(强兵)으로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