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뒤풀이
대결이 끝난 후 제9기사단은 모두 에도피아의 커다란 술집인 컬럼포스에 모였다.
비록 대결에서는 패했지만 그들 모두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장과 선임 기사들 없이도 사이클롭스라는 무시무시한 마수를 사냥해냈다.
그동안에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던 일.
정말로 판데아와 아시테르를 따라 열심히 수련했더니 얻을 수 있는 쾌거였다.
“나 진짜 감동했다고…! 솔직히 내가 그동안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단 말이야…….”
“자네 말에 동의하네… 우리가 정말 강해지긴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맞아…. 계속해서 수련장을 구르기만 했지… 우리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실감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확 느낄 수 있었다니까……!”
“이게 모두 판데아님과 아시테르 덕분이라고!!”
“그리고 오늘 여기는 아시테르가 다 산다고 했으니 마음껏 즐겨!”
오랫동안 기다려온 만찬이었다.
사실 아시테르는 대결 전에 모두가 무사히 사이클롭스를 쓰러트리면 그 후에 술을 사겠다 말했다.
덕분에 제9기사단은 오늘 완전한 회식이었다.
판데아에게 수련 받은 이후로 이렇게 마음 편히 회식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처음으로 내일 수련이 없을 테니 코가 삐뚤어지도록 즐기라 말하고 있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키는 아시테르였으니 그들은 마음 놓고 술과 음식들을 시켜대기 시작했다.
“고맙다 아시테르!!”
“이게 다 네 덕분이야!”
“드디어 우리들도 조금은 강해진 것 같다 이 말이야!!”
그들이 곁에 있는 아시테르에게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시테르도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말을 받아주었다.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선배님들 모두 판데아님과 제 말에 잘 따라주셔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제가 아무리 말을 해도 선배님들께서 열심히 따라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러니 오늘 이 만찬의 주인공은 선배님들이십니다. 마음껏 즐겨주세요!”
화끈하게 내뱉는 아시테르를 보며 제9기사단이 또다시 열광했다.
컬럼포스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제9기사단의 분위기에 술집 주인도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요리는 부족함 없이 준비해주세요. 술도 마찬가지고요.”
아시테르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겉보기에는 돈도 별로 없어 보였는데 오자마자 한 개의 금덩이를 내놓아 버렸다.
그것을 보자마자 컬럼포스의 주인 네모르도 눈알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9기사단 덕분에 장사도 잘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음식값까지 후하게 쳐주니 아시테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든지요!! 미리 준비시켜 놓았으니 오늘 하루는 마음껏 즐기세요.”
네모르가 사르르 눈웃음치며 말했다.
조금만 젊었어도 아시테르를 어떻게 꼬셔 봤을 테다.
잘생긴 얼굴에 훤칠한 키.
거기다 저 젊은 나이에 왕실기사단까지 입성하다니.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미래!
부드러운 성격에 주변사람들과 쉽게 어우러지는 친화력은 덤이다.
에도피아의 젊은 여인들이 왜 아시테르에게 반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덜컹!
그때 문을 열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 자리 있나!?”
그들을 알아본 네모르가 황급히 뛰쳐나갔다.
“아니 드웨인님께서 여길 어떻게…….”
“오늘 이곳을 전세 내러 왔다!”
“아이고… 죄송해요 드웨인님. 이미 먼저 와계신 손님들이 있습니다.”
“손님들? 누구?”
드웨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저쪽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왕실기사단이 먼저 와있었나.”
“네… 왕실기사단 여러분들이 먼저 와서 술을 마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은…….”
“어차피 남아도는 것이 자리 아닌가? 저들이 1층을 사용하고 있으니 우리들은 2층으로 올라가겠다.”
“아니… 그게…….”
네모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밸크로 기사단분들도 오늘 고생하셨는데 저희들만 이곳에서 즐길 수 있나요. 함께 하시죠. 즐거움도 나누면 두 배가 된다고들 하잖아요.”
“크흐흐… 배알도 좋은 녀석이로군.”
오늘 패배한 것은 제9기사단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풀 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저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왁자지껄 떠드는 면면들이 미소꽃이 피어 있었다.
“쳇… 대결에서 진 것들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저렇게 신나있는 거야?”
“꼴에 사이클롭스를 잡았다고 기쁜가보지.”
“8시간이나 걸려서 누가 못 잡아? 우리도 8시간이나 주면 손쉽게 잡겠다.”
“놔둬라. 저들이 즐기겠다는데 우리가 무슨 상관이냐?”
밸크로 기사단 일원들이 한 마디씩 했다.
그들 사이로 엔류아의 모습도 보였다.
금백발의 머리를 양갈래로 정갈하게 땋은 그녀가 조용히 제9기사단을 살피고 있었다.
아시테르는 저도 모르게 엔류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의 치료 마법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질 않았다.
커다란 부상도 금방 치료해버리는 실력은 솔직히 말해 대단하다고밖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속도가 조금 느리긴 했지만 만약 치유 속도까지 빨라진다면!?
거기다 한 번에 한 명이 아닌 한 번에 여러 명을 치유할 수 있는 마법을 익히게 된다면!
그녀의 성장은 더욱 어마무시할 터였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겠는가.
그녀는 이미 밸크로 기사단에 속해 있는 상태였다.
“쩝…….”
“이봐. 남의 치료도구는 왜 자꾸 쳐다보는 거냐?”
“예……?”
“남의 치료도구는 왜 그런 눈으로 계속 쳐다보는 거냐고.”
“아, 죄송합니다…….”
드웨인이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내며 말하자 아시테르가 한 발 물러섰다.
이런 자리까지 와서 괜히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순순히 물러나는 아시테르를 보며 드웨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운 좋은 놈… 그렇게 빠져나갈 줄이야. 뭐? 자기가 전투에 끼면 대결이 성사가 안 된다고? 하! 그래서 그 잘난 왕실기사단께서 8시간이나 걸쳐 사이클롭스를 사냥했나?”
“크크큭…….”
“큭큭…….”
드웨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때문에 1층에 있던 제9기사단원들에게까지 적나라하게 들려 버렸다.
시끄럽게 떠들던 그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드웨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런 것쯤에 움츠러들 드웨인이 아니었다.
그는 당당하게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런 드웨인의 뒤로 남은 밸크로 기사단원들이 따랐다.
2층으로 올라가면서도 그들은 은근하게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우리들이 너희들보다 뛰어나다.’라는 메시지를 대놓고 티내려는 듯 보였다.
“그럼 수고하라고 겁쟁이 양반.”
“크흐흐… 내가 봤을 때 제9기사단은 겁쟁이들만 모아놓은 것 같던데? 아니 근데 얼마나 모자란 놈들이면 기사단의 막내라는 놈에게 맥을 못 추는 거야?”
“내비 둬라. 그러니까 소문이 그렇게 도는 거지.”
아시테르를 지나치며 몇몇 밸크로 기사단원들이 저들끼리 속삭였다.
말이 자기들끼리 속삭였다는 거지 그들의 말은 다른 이들에게까지도 똑똑히 들렸다.
“저것들이……!”
“지금 쟤네들이 우리 막내한테 시비 건 거냐?”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실력이 뒤쳐져서 제9기사단으로 배정받은 이들도 있지만 왕실기사단 내에서 사고를 쳐서 제9기사단으로 발령받은 이들도 있었다.
때문에 개중에는 성격 좀 드러운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는 곳이 바로 제9기사단이었다.
몇몇이 욱하는 성질머리를 드러내며 그들에게 들이받으려 했다.
하지만 재빨리 아시테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재밌게 즐기는 것만 생각해주십시오.”
“하지만 아시테르…! 저 자식들이…….”
“에헤이…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게벨 단장님도 없이 사이클롭스 같은 높은 등급의 마수를 사냥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시테르가 그들을 중재하며 말했다.
덕분에 발끈했던 사내들도 이만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래.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 굳이 얼굴 붉힐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자리도 제9기사단은 1층, 밸크로 기사단은 2층이니 더는 마찰이 벌어질 일도 없을 터였다.
“에이… 제기랄! 술이나 마시자!”
“누가 술통 좀 더 갖고 와봐!”
결국 그들은 아시테르의 말에 따라주었다.
다시 술이 나오고 분위기는 점점 더 무르익어갔다.
2층에서도 시끄러운 소리들이 오갔다.
이렇게 아무일 없이 흘러가는 듯 했으나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쿵!!
“흡……!”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엔류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워낙 소리가 커서 1층에 있던 사람들도 위를 올려다 볼 정도였다.
“지금 뭐라고 했냐!?”
“죄… 죄송해요…….”
“부럽다고!?? 저기 있는 왕실기사단놈들이?”
“아니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 많은 동료들을 잃었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뭘 안다고 감히 목소리를 내는 거냐!? 엔류아. 그 사이에 내가 널 너무 많이 봐준 거냐?”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드웨인님…….”
엔류아가 곧바로 무릎을 꿇고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도 인상을 찌푸렸다.
“쯧…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노예인 모양이군.”
“노예요……?”
“그래. 아직까지 지방에서는 노예들이 거래되는 걸로 알고 있다. 아무래도 저 여자는 노예 신분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납작 엎드리진 않겠지…….”
“아니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네?”
한쪽에서 들려온 네모르의 목소리에 왕실기사단 인원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딱한 시선으로 엔류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가씨는 본래 귀족 가문의 여식입니다.”
“귀족 가문의 여식이 왜 저러고 있는단 말입니까?”
“왜 저러고 있겠어요. 가문이 쫄딱 망하다못해 멸문해버렸으니 저렇게 되었지…….”
“예에…? 아아… 몰락한 가문의 딸이었군요…….”
“아마 엄청나게 큰 빚을 지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돈을 평생 동안 갚기 위해 저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들었어요.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요…….”
“아이고… 그런 딱한 사정이…….”
왕실기사단 인원들이 혀를 차며 엔류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나서는 일은 없었다.
사정이 딱하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다.
거기다 그들이 모르는 자세한 사정도 따로 있을 터다.
그러니 함부로 참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퍽!!
퍼벅!!
몇몇 밸크로 기사단 인원들이 엔류아에게 폭력을 가했다.
그녀는 웅크리고 앉아 폭력을 견뎌냈다.
엔류아를 지켜보던 1층의 기사들이 혀를 찼다.
그때 아시테르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아시테르.”
기사들이 아시테르의 팔을 붙잡았다.
그들도 오랫동안 아시테르를 지켜봐 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아시테르 성격에 분명 저 여인을 구해주기 위해 움직이려는 것이다.
그러니 말릴 수밖에 없었다.
“저건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래. 그러니 앉아라. 안쓰럽긴 하지만 저건 밸크로 기사단 내부의 문제다.”
“우리가 나서면 문제만 더 커져.”
아시테르는 주먹을 쥐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엔류아의 얼굴이 부어 있었다.
아시테르는 지금 왜인지 모르게 그녀에게서 토흐의 얼굴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뭐냐 너. 이 여자한테 관심이 있나?”
드웨인이 아시테르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새하얀 이를 드러낸 그를 올려다보며 아시테르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 여자는 내 소유다. 갖고 싶으면 돈을 가져와야 할 거다. 그러면 네게 넘겨주도록 하마. 크흐흐. 이 여자는 내게 돈을 다 갚기 전까지는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거든.”
“또… 돈인가…….”
아시테르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