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발할라의 사내 (1)
밸크로 기사단을 무력화 시킨 것은 단 한 명의 사내였다.
사내는 눈에 띄는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흠…….”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무거운 공기가 아시테르를 짓누르는 듯 했다.
사내는 놀랍게도 한 손으로 기사 한 명을 들고 있었다.
“병력이 더 있었나.”
“붙잡고 있는 사람을 놓아주십시오.”
“이 녀석 말인가.”
사내의 시선이 눈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기사에게로 향했다.
기사는 공포에 젖은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가 순순히 기사를 집어던졌다.
털썩.
힘없이 날아간 기사가 바닥을 굴렀다.
아시테르가 주변을 살폈다.
바닥에 쓰러진 이들이 반절 정도는 돼 보였다.
나머지는 두 발을 딛고 서 있었지만, 그다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단신으로 밸크로 기사단을 이 정도로…….’
다른 마수들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사내의 동료들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밸크로 기사단 중 한 명이 아시테르에게로 다가왔다.
“이 빌어먹을 년!! 감히 우리들을 두고 도망을 쳐!?”
그의 불같은 시선이 닿은 곳은 엔류아였다.
기사는 엔류아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아…….”
엔류아가 강한 힘에 이끌려 뒤로 넘어졌다.
기사가 그런 엔류아를 보며 소리쳤다.
“빨리 치료해라!! 뒤에서 치료나 해야 할 네년이 도망치니까 우리가 당한 거잖아!”
“하…… 하지만 우리들만의 힘으로는 저 사람을…….”
당해낼 수 없다는 말이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막상 입밖으로 내뱉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아시테르를 올려다보았다.
아시테르는 온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발할라의 옷을 입은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이렇게까지 긴장한 모습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동안 몇 번 합동 작전으로 마수들을 사냥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시테르는 늘 여유있는 표정으로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헌데 지금은 웃음기가 싹 사라진 진지한 얼굴이었다.
사내도 아시테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옷…….”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은 발할라의 문양이 그려진 붉은 옷이었다.
일전에 들은 적이 있다.
발할라의 최고 간부들은 모두 붉은 옷을 입고 있다고.
그 말은 즉, 저 사내가 바로 발할라의 최고 간부 중 하나라는 얘기였다.
“붉은 옷에 대해 알고 있나. 그럼 내가 누군지도 눈치챘겠군.”
“발할라 소속입니까.”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시테르도 자연스럽게 자세를 갖췄다.
그의 전신에서 천천히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본 사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이렇다 할 것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제보니 마력을 감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시테르에게서 천천히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사내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마력을 감출 줄 아는 건가?”
“잔재주를 좀 익혔습니다.”
“그렇군.”
짧은 답과 함께 사내가 바닥에 있는 작은 목함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소중히 품안에 넣었다.
아시테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사내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아시테르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엔류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괜찮으시겠어요?”
“네. 저는 걱정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부상당한 동료들부터 챙기세요.”
아시테르가 엔류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엔류아와 함께 있던 기사는 아직도 성질을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엔류아는 아시테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아직 도와준 것도 없는걸요.”
“그래도…….”
“서두르세요. 부상이 심한 분들도 몇몇 있는 것 같아요.”
아시테르의 말에 엔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시테르와 더 말을 나눌 새도 없이 다른 기사의 손에 이끌려갔다.
기사가 엔류아를 곧바로 데려간 곳은 드웨인이 있는 곳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드웨인은 엔류아가 보이자마자 두 눈을 부라렸다.
“이 쓸모없는 년…! 어딜 갔다 오는 거냐?!”
“도움을 요청하고 왔어요…….”
“도움이라니……! 누구 마음대로!!”
“하지만… 이대로 두면 우리 모두 저 사람에게 당할 것 같았어요.”
“네년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냐…! 네년이 계속 이 자리에 남아 우리를 치유하기만 했어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진 않았을 거다……!”
“죄송해요…….”
“시끄럽고 빨리 치료나 해!”
드웨인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붉은 옷을 입은 사내에게로 향해 있었다.
상대가 한 명이라고 방심하고 말았다.
다시 싸우면 이렇게 쉽게 당하진 않을 터다.
“치잇……!”
이를 빠드득 깨문 드웨인이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 사내는 자신이 꼭 죽이고야 말겠다.
그가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는 때, 정작 붉은 옷의 사내는 아시테르쪽만 신경 쓰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때문에 이런 짓을 한 겁니까?”
“…….”
“하긴… 발할라의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시테르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사내의 앞에 섰다.
일전에 테오도라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발할라의 최고 간부는 총 네 명.
그들을 마주하게 되면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말을 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바로 그 네 명 중 한 명일 터다.
“나는 그대들과 싸울 이유가 없다. 조용히 보내준다면 나 또한 조용히 지나가겠다.”
사내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적의가 없다.
거기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가 부상만 당했을 뿐 죽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게 이상하던 차였다.
지금까지 만났던 발할라는 살인에 거리낌이 없었다.
심지어는 미치광이처럼 사람들의 목숨을 취하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다.
아시테르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하자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는 아시테르와는 대화가 통할 거라 여긴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그러니 더는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니… 그게 뭡니까?”
“그것까지 내가 그대에게 알릴 이유는 없을 것 같군.”
“저도 그것을 알아야 보내드릴지 말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호오…….”
슈와아―!!
사내에게서 방대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눈앞의 사내는 초월급 수준의 마도사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의 마력을 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청난 마력을 흘려내는 사내를 눈앞에 두고도 아시테르는 차분했다.
화륵―.
아시테르의 손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사내도 아시테르의 불꽃을 확인했다.
“화염 마도사인가.”
“말씀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면 말씀해주십시오. 이곳에서 무엇을 하신 겁니까?”
사내의 시선이 아시테르를 넘어 뒤쪽으로 향했다.
뒤편에서 더 많은 병력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제 9기사단을 확인한 사내가 이만 마력을 거두었다.
“그대들에게 피해가 갈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라크네의 핵이 필요했을 뿐이야.”
“아라크네의 핵이요…? 그게 왜…….”
“더는 알려고 하지 마라.”
“아…….”
“어쨌든 다른 것들에는 관심 없다. 저들에게도 분명 그리 말했거늘. 내 말을 믿지 않고 먼저 싸움을 건 것은 저들이다.”
“그랬군요…….”
아시테르도 불꽃을 꺼트렸다.
그러자 오히려 사내의 두 눈이 커졌다.
정말로 아시테르가 마력을 거둘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도 귀찮은 일들을 벌이기 싫어 말을 꺼내 봤을 뿐,
쉽게 벗어날 순 없을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다.
헌데 아시테르가 순순히 물러나는 듯 하자 오히려 사내가 의문을 드러냈다.
“개소리!!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대화에 끼어든 것은 치료를 마친 드웨인이었다.
그가 헬버드를 어깨에 걸치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를 확인한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치료 마도사가 있었나.”
“크흐흐. 왜. 이제야 잘못 건드렸다 싶나?”
드웨인에 이어 치료를 받은 몇몇 기사들이 함께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들은 으르렁거리는 눈으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드웨인이 아시테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멍청하게 적의 말에 넘어가다니! 네가 그러고도 이스트 왕국의 기사냐?”
“예? 하지만 드웨인님…….”
“시끄럽다! 어차피 너 같은 사기꾼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 따위는 없었으니 뒤로 물러나 있어라. 잘 들어둬라. 우리 밸크로 기사단은 제9기사단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없고 앞으로 도움을 받을 생각도 없다.”
중간에 저 사내가 나타나긴 했지만 안쪽의 아라크네들을 모두 처치한 것은 순전히 밸크로 기사단이 해낸 일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가져갈 수 있는 부산물들도 모두 밸크로 기사단의 몫이었다.
이제와 한 입 걸쳤다고 제9기사단과 나눠가질 수는 없는 노릇!
드웨인은 한 번 더 확실하게 못을 박아두었다.
“제9기사단은 뒤로 물러나 있어라. 너희들이 낄 자리가 아니야.”
“그래. 뒤로 물러가.”
“이제와 한 입 거들려고? 어림없지.”
“한 다리 걸쳐볼 생각에 부리나케 달려왔을 텐데 아쉽게 되었네.”
다른 기사들도 조롱하듯 아시테르에게 한 마디씩 해댔다.
그들의 사이에서 아시테르가 드웨인을 불러세웠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드웨인님. 지금 밸크로 기사단은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거기다 상대는…….”
“시끄럽다! 주제를 알고 나서라 제9기사단의 막내. 네놈이 왕실기사단이라고 우리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 같나?”
“아니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때 아시테르의 뒤에서 누군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곧바로 달려온 게벨이었다.
게벨이 아시테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게벨 단장님…….”
“그만하면 됐다.”
아시테르를 말린 게벨이 드웨인을 향해 말했다.
“그럼 우리 제9기사단은 이번에도 역시 뒤에서 보조를 맞추는 식으로 하겠소.”
“필요 없수다. 어차피 상대는 한 놈인데. 처음엔 우리가 방심해서 당한거지만 두 번은 없지. 우릴 만만하게 보지 마시오.”
“밸크로 기사단을 만만하게 보는 것이 아니오. 상대가 상대다보니 조심할 필요가 있어 보여서 그렇지.”
게벨도 아시테르가 왜 이렇게 진지한 낯빛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눈앞에 서 있는 붉은 옷의 사내.
그에게서 풍겨오는 기도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드웨인은 게벨의 말은 듣지 않고 앞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사내를 바라보며 웃었다.
“자아… 덕분에 왕실기사단 앞에서 창피는 당했다. 이제 그 설욕전을 시작해볼까.”
“이해할 수 없군. 나는 조용히 이곳을 지나가려는 것 뿐인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내게 집착하는가?”
“당연한 걸 뭘 묻나.”
“끝내 제대로 피를 봐야겠다는 말이로군.”
사내의 주변으로 마력의 파장이 일었다.
이를 본 드웨인이 곧바로 헬버드를 휘둘렀다.
휘콰아앙!!
놀랍게도 사내는 맨손으로 헬버드를 받아내었다.
이를 본 드웨인이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상대는 나만 있는 게 아니다만.”
콰라랑!!
파쾅!!!
연이어 날아온 마법 공격이 사내의 몸에 꽂혔다.
드웨인이 곧바로 몸을 비틀었다.
그의 헬버드가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내를 내리찍은 헬버드가 우뚝 멈췄다.
“흡!?”
놀란 드웨인이 반응할 틈도 없이 주먹이 날아왔다.
파앙!!
거친 타격음과 함께 드웨인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어 붉은 옷의 사내가 몸을 날렸다.
파박! 파바박!! 퍼벅!!
순식간에 이어진 공격에 다섯 명의 기사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붉은 옷의 사내가 손아귀를 펼치자 유형화된 마력이 주변의 기사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