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발할라의 사내 (2)
“크아악!!”
“커헉!”
방어 마법을 펼쳐도 소용없다.
붉은 옷의 사내가 쏘아낸 마력은 그것들을 가볍게 부숴버렸다.
후우웅…….
사내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쓰러진 기사들을 치료하고 있는 엔류아가 보였다.
“성가신 존재가 있었군.”
치유 마도사가 있으면 몇 번이고 회복해서 다시 덤벼오겠지.
엔류아의 마력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마력이 잔존하는 동안 회복은 계속될 터.
그럴 바엔 가장 성가신 치유 마도사부터 노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저 여자부터 노리는 것이 좋겠어.”
사내의 움직임이 순간 가속화되었다.
그의 몸이 튕겨져 나가듯 앞으로 향했다.
“놈을 막아라!”
“죽여라!!”
“저 새끼 잡아!”
밸크로 기사단의 기사들이 빠르게 사내를 쫓았다.
하지만 사내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뒤늦게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사내를 발견한 엔류아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이에 치료받던 기사가 그녀를 더욱 다그쳤다.
“뭐하고 있어!? 빨리 치료해!”
“하… 하지만… 지금…….”
“저 새끼는 어차피 다른 기사들이 막아줄 거야. 그러니 너는 치료에만 전념하란 말이다!”
“네… 네에……!”
엔류아가 애써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녀의 마력이 다시금 기사를 덮었다.
“흐음?”
이를 본 사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두 사람의 행동에 붉은 옷의 사내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은 지금 치유 마도사를 노리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따로 이목을 돌린 것도 아니었으니, 그의 의도는 적들에게도 충분히 비춰졌을 터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치유 마도사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미끼로 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다.
누구는 공포를 억지로 견뎌내며 동료들을 믿고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데, 그 동료라는 것들은 아무래도 저 여자를 지켜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역겨운 놈들이로군…….”
적들의 행동에 구역질이 났지만 그래도 별 수 없다.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치유 마도사는 여기서 쓰러져줘야 했다.
거기다 그냥 두기엔 치유 마도사의 실력이 워낙 좋았다.
겨우 이런 놈들과 함께 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실력.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주지 못하는 동료들과 있는 것도 엔류아의 운이라면 운이었다.
콰앙!!
사내가 주먹을 휘둘러 가로막는 기사를 때려눕혔다.
그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마침내 엔류아의 지근거리까지 당도한 사내가 주먹을 들어올렸다.
이 때를 노린 것처럼 여기저기 마법 공격이 쏟아졌다.
후우웅!!
사내의 전신을 감싼 마력이 마법 공격을 막아냈다.
놀랍게도 그 많은 마법 공격들을 맞고도 사내는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말도 안 돼…….”
괴물 같은 그의 모습에 엔류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에게 감정은 없지만… 미안하다.”
“아……!”
엔류아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잠깐이지만 사내의 주먹이 순간 멈춰버렸다.
사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엔류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 둘 사이에 난입하는 이가 있었다.
화르릉!
불꽃이 치솟자 붉은 옷의 사내가 뒤로 물러났다.
다른 마법 공격들은 몸으로 받아내던 사내가 처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미안해요. 더는 두고만 볼 순 없어서요.”
엔류아를 등지고 선 것은 아시테르였다.
그는 붉은 옷의 사내를 주시하며 불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결국 나서기로 한 것인가.”
아시테르를 보며 사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뒤이어 제9기사단도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확인한 사내가 뒤로 물러났다.
이를 확인한 드웨인이 크게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나!? 어서 저 자를 잡아라!”
그의 명령에 밸크로 기사단이 움직였다.
사내는 가볍게 포위망을 뚫어버렸다.
그는 마치 단단한 바위 같았다.
사내를 상대하는 밸크로 기사단은 달걀 수준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공격해도 사내에겐 흠집조차 남지 않았다.
그러자 답답해진 드웨인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요!? 빨리 저자를 잡지 않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게벨이었다.
그러나 게벨은 팔짱을 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더욱 답답해진 드웨인이 씩씩거리며 게벨에게로 다가왔다.
“뭐하냐고 묻질 않소!”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오.”
“그러니까 왜!!”
“드웨인 단장. 당신이 한 말을 잊은 것 같군. 밸크로 기사단은 제9기사단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없고 앞으로 도움 받을 생각도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건…….”
물욕이 앞서는 바람에 실언을 해버리고 말았다.
혹시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줬다고 해서 제9기사단 측에서도 보물에 대한 소유권을 일부 주장할까봐 미리 해놓은 말이었다.
드웨인의 시선이 붉은 옷을 입은 사내쪽으로 향했다.
“제기랄!!!”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한 번 내뱉은 드웨인이 대지를 박찼다.
붉은 옷의 사내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핏물이 허공에 튀었다.
얼음송곳이 날아오면 주먹으로 깨부순다.
물방울들이 빠르게 날아왔지만 사내의 몸에는 상처조차 남기지 못했다.
“크으……!”
그래도 고통은 있는 모양이었다.
마법 공격에 맞을 때마다 사내의 표정은 일그러졌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내의 거대한 마력이 넘실거릴 때마다 밸크로 기사단의 기사들은 우후죽순 쓰러지기에 바빴다.
전투는 그만큼 일방적이었다.
“아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엔류아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비켜주세요. 저는 지금 가야 해요…….”
“어딜요.”
“빨리,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러…….”
“아니요. 지금은 그만두세요.”
“그럴 수 없어요. 저는 제 동료들을 치료해야만 해요…….”
“그 몸으로요?”
땅을 짚고 있는 엔류아의 손은 심하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거기다 그녀의 몸에 흐르고 있는 마력도 불안정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제대로 된 치유 마법을 사용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아시테르는 그녀에게 휴식을 주려 했다.
“저는 가야… 제가 가야해요… 제가…….”
“일단 침착하고 정신 차려요.”
아시테르가 엔류아의 두 팔을 붙잡고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엔류아의 두 눈동자와 마주쳤다.
잠시동안 아시테르를 바라보던 엔류아가 곧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아… 아으아… 아아…….”
붉어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시테르는 그런 엔류아를 말없이 다독여주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려는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가 미칠 것 같아서요… 제 가치를 잃을 것 같아서…….”
“…….”
가치를 잃는다는 말.
그 말이 아시테르의 가슴을 묵직하게 때렸다.
엔류아는 밸크로 기사단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찾으려 노력했다.
밸크로 기사단이 단순한 치료 도구 취급을 해도, 그녀는 가엾게도 그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 마음이 어땠을지, 무슨 감정과 생각들로 그런 마음까지 갖게 되었을지 아시테르로선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크아아악!!!”
“끄악!!”
“커헙!”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가 들릴 때마다 엔류아의 몸이 발작을 일으키듯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제가 가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괜찮아요.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기야 하겠지만 죽진 않을 거예요.”
아시테르의 말에 엔류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자신해요……?”
“저 붉은 옷을 입은 사람. 지금까지 밸크로 기사단 사람들을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어요.”
“그게 언제까지고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아뇨.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은 처음부터 여기 있는 누구도 죽일 생각이 없었어요. 당신을 노릴 때도 잠깐이지만 주먹이 멈추었는걸요.”
아시테르도 그걸 보고 사내를 공격하기보다 위협용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내는 분명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죽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발할라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케이스였다.
“오히려 마치 전투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에요.”
“그러고보니…….”
엔류아가 대놓고 자리에서 벗어날 때도 저 사내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 밸크로 기사단과 마주했을 때도 사내는 그저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을 뿐이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그러니 이번에는 지켜보자구요.”
“네? 뭘…….”
“저 사람들도 크게 한 번 당해봐야 정신들을 차릴 것 같아서요.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깨달아야 돼요, 저 사람들.”
“아…….”
아시테르의 말에 엔류아의 귀가 빨개지기 시작했다.
막상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부끄러워졌다.
게벨이 아시테르에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저 사내. 정말 대단하구나… 무슨 마법을 사용하는 건지…….”
“저도 느끼고 있어요. 살아 있는 단단한 바위 같아요…….”
그 표현이 딱 맞았다.
붉은 옷의 사내는 마법 공격에 당하고도 멀쩡한 모습을 유지했다.
심지어 그는 손으로 마법을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덕분에 밸크로 기사단은 일방적인 전투를 당하고 있었다.
철검마저도 손으로 부숴버리는 사내를 보며 기사들도 기가 질리고 말았다.
“크아아!! 제기랄!!!”
분노한 드웨인이 있는 힘껏 헬버드를 휘둘렀다.
콱!!
하지만 헬버드도 사내의 손에 막히고 말았다.
“그대에게는 과분한 무기가 아닐까 싶군.”
붉은 옷의 사내가 빠르게 안으로 파고들며 드웨인을 때렸다.
동시에 그의 손날이 드웨인의 팔목을 때렸다.
강한 충격에 드웨인이 헬버드를 놓치고 말았다.
“헙……!”
놀란 드웨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붉은 옷의 사내가 헬버드를 집어던졌다.
“이쯤하지. 이제부터 정말로 날…….”
그 순간 한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복면을 쓴 그들의 가슴엔 발할라를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가이우스님!!”
“너무 늦으셔서 달려 와봤습니다!!”
수십 명의 인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게벨도 수신호를 내렸다.
명령을 대기하고 있던 제9기사단도 일제히 움직였다.
두 집단이 동시에 움직이니 순식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발할라와 제9기사단의 사이로 두 사람이 빠르게 난입했다.
콰앙!!
헬버드가 직선을 그리자 선명한 선이 대지에 새겨졌다.
이어 바로 옆에서 일직선으로 불길이 피어올랐다.
두 집단의 중앙에 가이우스와 아시테르가 섰다.
“멈춰라.”
“멈춰주세요!”
두 사람의 말에 거짓말처럼 발할라 군과 제9기사단이 멈춰 섰다.
놀란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가이우스와 아시테르도 서로 놀란 눈치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나와 마음이 통하는 자였군.”
“피차 같은 마음인가 보군요.”
“조용히 보내주면 이대로 물러가도록 하지.”
“그래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가이우스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 머물렀다.
아마 이 청년과 제9기사단이 처음부터 끼어들었다면 전투의 양상은 또 다르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그럴싸해 보이는 오합지졸들을 잔뜩 모아놓은 밸크로 기사단과 달리,
제9기사단은 훈련을 잘 받은 강병들의 기세를 지니고 있었기에, 가이우스도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던 차였다.
반면, 아시테르도 가이우스의 수하들이 근처에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많은 마력들이 느껴졌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이곳에서 많은 희생을 치를 수도 있는 전투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놈들을 죽여야 한다! 이대로 보낼 순 없어……!!”
이제는 악에 받친 드웨인이 광기 가득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그 때문에 밸크로 기사단 기사들도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화르륵!!
아시테르가 바로 앞에 작은 불길로 된 선을 만들어냈다.
이어 그가 밸크로 기사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선은 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