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전쟁 발발
엠벨의 성주, 호가드니가 병력을 이끌고 에도피아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은 금방 로트말론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그는 호가드니가 갑자기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호가드니가 갑자기 그렇게 행동할 이유도 없었을 뿐더러, 그가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로트말론은 자신의 수하들을 시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했다.
헌데 수하들은 모두 호가드니의 병력이 에도피아를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 보고해 왔다.
자트리나오스 강은 에도피아 영지와 엠벨 영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이었다.
이 강을 건널 때는 일정 수준 이상의 병력을 데려오지 않는 것이 양측 영지간의 오래된 협약이기도 했다.
하지만 호가드니는 이를 무시하고 모든 병력을 데리고 자트리나오스 강을 건넌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가 내비치는 의사는 아주 간단했다.
“전쟁입니다 성주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저희도 방책을 세워야 합니다!”
“맞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한시라도 급히 병력들을 제자리에 배치하고 예비 병력들도 모두 준비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르체니 공주님과 제9기사단에게도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로트말론이 눈매를 좁혔다.
“공주님과 제9기사단도 이 일에 끼어들게 하자는 말인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째서? 나는 공주님과 제9기사단이 몰래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만…….”
“성주님! 마르체니 공주님과 제9기사단은 현재 에도피아 영지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작물들을 먹어왔으며 저희들에게 많은 도움들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에도 마땅히 함께 나서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들 또한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아니지, 솔직히 말해 도움을 더 크게 받은 것은 우리들이 아닌가?”
로트말론이 이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가신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에도피아 영지가 그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데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이 오고나서부터 에도피아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동안 재물이라는 것을 쌓아보지 못했던 여러 귀족들과 평민들도 이제야 재물을 쌓아가는 맛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제9기사단과 마르체니 공주 덕분이었다.
그래, 이제야 그 즐거움을 알게 되었는데 벌써 빼앗기게 생겼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주님.”
“그래. 말해보게.”
“에도피아 영지가 전보다 훨씬 부유해졌다고는 하나, 이제 겨우 시작인 단계입니다. 제9기사단에게 군사 훈련도 받고 있지만 그것도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즉, 아직까지는 우리들만의 힘만으로는 에도피아 영지를 호가드니 성주의 군에게서 지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당장 밸크로 기사단을 누가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 많은 피해를 입으며 기적적으로 그들의 군세를 막아낸다고 해도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아직까지도 마수들은 시도 때도 없이 영지를 넘어 마을 사람들을 습격해오고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새로 유입되는 사람들도 많아져 치안문제도 슬슬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그만.”
로트말론이 손을 들어 그들의 말을 막았다.
모두 로트말론도 생각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그들에게 이번 일의 희생을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마르체니 공주와 왕실기사단은 에도피아 소속이 아니었다.
당장 마르체니 공주만 해도 겨우 한낱 변방의 영지 따위에 소속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그러니 에도피아 소속을 구실로 삼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얘기다.
차라리 그들 앞에 무릎 꿇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리라.
“성주님. 마르체니 공주님과 제9기사단에게 당장 이 일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지가 적들의 손에 유린될 것입니다.”
“설마 같은 왕국의 성주가 그렇게까지 하려고… 분명 호가드니는 강하게 요구하는 바가 있어이곳까지 오는 걸 거다. 그러니 우선은 방비를 갖추고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로트말론이 우선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몇몇 가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성주님! 호가드니 성주를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그는 호시탐탐 우리 에도피아를 노렸던 인물입니다. 무엇을 빌미로 삼았든 이렇게까지 군사를 대놓고 일으켰다면 결코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아무래도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한데 저희도 제대로 응수해야 합니다.”
“언제까지고 우리 에도피아가 엠벨보다 낮다는 인식을 갖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을 기회로 삼아…….”
“자네들은 그 기회를 우리 힘으로 붙잡으려는 것이 아닌 마르체니 공주님의 힘으로 붙잡으려는 것 아닌가?”
로트말론의 말에 가신들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솔직히 지금 이곳에 제9기사단이 주둔해 있으니 해볼 수 있을 만한 일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에도피아는 엠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많이들 뻔뻔해졌구만… 그동안에는 제9기사단에게 감사의 인사를 백번이고 해도 부족하다 말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얼마나 흘렀다고 그들의 희생을 이처럼 당연하게 여긴단 말인가……?”
“그… 그건…….”
“성주님…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셔야…….”
가신들도 할 말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성주의 얼굴을 보며 끝내 할 말을 참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머리가 복잡할 사람은 성주인 로트말론일 터다.
로트말론은 우선 병력들을 준비시키게 했다.
이후의 일은 우선 대화로 풀어나가고자 했다.
대화로 풀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게 가장 좋았으니까.
무력 충돌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만약 끝내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면 나는 물러서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 에도피아의 영지민들은 이 싸움에 휩쓸려선 안된다.”
“네!”
“예!”
“우선은 금일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그렇게 가신들과의 회의는 일단락되고 말았다.
가신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로트말론이라고 마음이 가볍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 호가드니와 이번 일을 대화로 잘 풀어나갈 자신도 없었다.
호가드니가 이렇게 과감한 행동을 취했다면 분명 그에 대한 준비도 철저히 했을 것이다.
결국 로트말론은 선택해야 했다.
호가드니를 설득하는데 실패한다면 순순히 영지를 그에게 넘기던가, 아니면…….
집무실에 앉아 홀로 생각하고 있던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 했을 텐데.”
“성주님… 그게… 성주님을 찾아온 분이 계십니다.”
“나를? 이 시간에 누가 날 찾아온단 말인가?”
시간은 늦은 오후였다.
병사들도 훈련을 마치고 집이나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었고 다른 이들도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 누가 성주인 자신을 찾아온다는 말인가.
“마르체니 공주님과 게벨 단장이 찾아왔습니다.”
“공주님과 게벨 단장이? 들어오시라 해라.”
“네.”
대답이 있고 잠시 후 마르체니 공주와 게벨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로트말론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았다.
그렇지 않아도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로트말론도 마르체니 공주와 게벨 단장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가신들에게는 마음가짐의 주의를 주었지만, 그 역시도 가신들의 의견에는 십분 동의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에도피아의 병력만으로는 호가드니의 군세를 막아낼 수 없다.
그렇다고 대대로 에도피아 영지를 다스려오지도 않은 호가드니에게 무턱대고 이 영지를 넘길 수 없었다.
욕심 많은 호가드니가 에도피아 영지에서 무슨 일들을 벌일지 모르니까.
거기다 밸크로 기사단에 관한 소문은 에도피아까지 들려올 정도로 좋지 않다.
그런 그들에게 에도피아를 빼앗기게 된다면 그동안 애써 지켜왔던 이 영지가 얼마나 피폐해질지 몰랐다.
이제야 에도피아가 부흥하려는데 다시금 암울했던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마르체니 공주와 게벨을 앞에 두고 로트말론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인정해야 한다.
자신은 이 영지를 지키기에 부족한 재목이었다.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자존심 따위 없이, 고개 숙여 부탁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에도피아 영지민들이 이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자신은 백번이고 그럴 수 있었다.
굳게 마음을 먹은 로트말론이 벌떡 일어서서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주님?”
“로트말론님!?”
놀란 마르체니 공주와 게벨의 두 눈이 커졌다.
두 사람은 갑자기 무릎을 꿇은 로트말론 때문에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로트말론은 고개부터 깊게 숙였다.
“두 분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성주님께서 무엇을 부탁하시려는지 저희도 잘 알아요. 마침 그것 때문에 저희들도 성주님을 찾아온 겁니다.”
“그럼 오히려 얘기가 더 잘 통하겠군요. 두 분께는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엠벨의 성주인 호가드니가 군세를 일으켜 이곳으로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능하여 도저히 그들을 막아낼 힘이 없습니다.”
“…….”
“이대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필패일 것이 분명합니다. 허나 저는 이곳 에도피아가 좋습니다. 우리 에도피아를 부흥시키고자 평생을 바쳐 노력해왔으나, 부끄럽게도 마르체니 공주님과 제9기사단이 이곳에 와 해낸 일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
“예,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성주 자격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운 좋게 귀족으로 태어나 세습된 성주의 자리에 순서를 지키려 앉은… 그런 무능한 놈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에도피아를 다른 이들의 손에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
“이제야 부흥하려는 에도피아를 지켜내지도 못하는… 그런 못난 놈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두 분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발 우리 에도피아를 도와주십시오. 제게 평생 두 분을 위해 일하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쿵!
로트말론이 바닥에 머리까지 찧으며 부탁의 말을 올렸다.
그러자 당황한 마르체니와 게벨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덜컥!
그때 문이 열리며 몇몇 사람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부분 로트말론이 어렸을 때부터 곁에서 그를 지켜봐 온 가문의 가신들이었다.
로트말론과 함께 일해온 귀족들도 있었다.
“내 이러실 줄 알았어.”
“저희들한테는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성주님 혼자 이렇게 하실 줄 알았단 말입니다!”
“그리고 누가 부족하다 그럽니까!? 우리들에게 로트말론님은 최고의 성주님이십니다!”
“맞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가신들과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마르체니와 게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희도 함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우리 에도피아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싸워주시지 않겠습니까……!”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들의 반응에 어쩔 줄 몰라하던 마르체니가 일단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시켰다.
그녀의 손짓에 귀족들이 하나둘 말을 멈췄다.
이제야 장내가 조용해졌다.
이를 확인한 마르체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 모두 오해가 있으신 듯 한데… 저희는 여러분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의사를 전하기위해 이곳으로 찾아온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