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든든한 지원군 (2)
“그럼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
호가드니가 싸늘하게 말하며 등을 돌렸다.
그를 따라 밸크로 기사단도 함께 뒤로 돌아섰다.
돌아가는 그들을 보며 로트말론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공주님과 게벨 단장의 말이 맞았군… 호가드니는 처음부터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없었던 거야…….”
그에겐 그저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다.
엠벨이 에도피아에 발을 들일 좋은 핑계거리가.
하지만 로트말론도 순순히 에도피아를 호가드니의 손에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거기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와 함께 해주기로 한 마르체니 공주와 제9기사단도 있었다.
“제9기사단의 도착은?”
“지금 각지에 흩어져 있던 병력들을 모두 모으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곳으로 오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듯 합니다.”
“그래. 그때까지는 우리들의 힘만으로 저들을 막아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제9기사단은 대부분 멀리까지 나가 훈련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돌아와 전투를 준비하는데엔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그때까지 로트말론과 에도피아 군은 호가드니의 군대를 막아서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추후 제9기사단이 지원군으로 달려와 함께 호가드니 군대를 공격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로군…….”
다른 영지에 함부로 손을 벌릴 수 없는 이유.
그것은 그들 또한 이번 일을 빌미로 또 무슨 요구를 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영지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일들을 겪어야만 했다.
호가드니를 밀어내자고 다른 맹수를 섣불리 안으로 들일 수도 없는 노릇.
자칫 잘못했으면 꼼짝없이 그런 입장을 겪으며 어렵디 어려운 선택들을 강요받았을 것인데, 운이 좋게도 마르체니 공주와 제9기사단이 이곳으로 오며 그런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공주님과 제9기사단이 후회하지 않도록 우리 또한 최선을 다해 능력을 증명해내는 거다!”
로트말론의 함성에 군사들의 사기가 창천했다.
오랫동안 로트말론과 함께 성장해온 군대였다.
더군다나 최근 제9기사단의 손길을 거치면서 한층 더 성장한 군대의 모습이었다.
로트말론이 투구를 깊게 눌러썼다.
그의 주변으로 기사들이 도열했다.
“우리들의 목표는 저들의 전멸이 아니다! 저들의 진격을 막아내기만 하면 되는거다!!”
“우오오!!”
“와아!!!”
엄청난 함성이 평야를 메웠다.
반대편에서도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선두는 역시 밸크로 기사단의 드웨인이었다.
드웨인은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만한 커다란 헬버드를 들고 앞장 서서 오고 있었다.
뒤를 이어 밸크로 기사단원들이 제법 삼엄한 기세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로트말론이 마른 침을 삼켰다.
밸크로 기사단의 실력은 로트말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그들이 몇 번 에도피아 영지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기 때문.
그러니 누구보다도 밸크로 기사단의 힘에 주의하고 있었다.
“저들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선 안된다! 양쪽으로 산개해!”
로트말론이 병력을 양옆으로 나뉘었다.
이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병들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들이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동안 드웨인은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크흐흐… 쓸데 없는 짓거리를 하는군. 그런 것도 먹히려면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해야 하는 거다.”
그는 밸크로 기사단에 대해 아주 커다란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곧 결과로 증명해주었다.
파쾅!! 파바방!!
콰아아앙!!!
밸크로 기사단에서 쏘아올린 마법이 전쟁의 시발탄이 되었다.
양측의 군사들이 중앙에서 한데 뒤엉키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부딪힌 마법들이 여기저기 폭발음을 일으켰다.
검과 창을 든 병사들도 치열했다.
섬뜩한 소리들과 함께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로트말론이 오랫동안 키워온 군대답게 진형을 시시각각 변형해도 곧잘 움직여주었다.
반면 호가드니 군은 갑자기 변하는 로트말론 군의 진형에 당황하는 눈치였다.
“멍청한 놈들! 겨우 이런 정도로 얼타지 마라!!”
드웨인이 선두에 서서 눈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무참히 내리찍어버렸다.
그의 헬버드에서 마력이 찰랑거릴 때마다, 허공에 핏물이 산개했다.
드웨인만 해도 문제인데 그를 따르는 선임기사들도 상당한 실력들을 자랑했다.
허공에서 떨어진 바위들이 병사들을 짓뭉개고 빠르게 날아간 얼음송곳들이 상대 기사들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한 전장 속에서 밸크로 기사단만큼은 그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지그렇지!! 아주 잘하고 있구만!!”
비싼 돈을 들여 키운 보람이 있었다.
드웨인이 이끄는 밸크로 기사단 앞에 로트말론 군은 그냥 장작수준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족족 상대 군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호가드니는 묘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크하하!! 봤냐!? 로트말론! 이게 바로 너와 나의 차이라는 거다. 너는 쓸데 없이 직접 발로 뛰며 병사들을 훈련시켰지만 보아라! 돈으로 사람들을 구해오고 또 값비싼 장비들로 무장시킨 나의 군대보다도 못 하질 않느냐!?”
호가드니는 이 상황에 술까지 따라 마시고 있었다.
사방으로 핏물이 튀고 여기저기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을 보며 이따금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이만큼 좋은 술 안주가 없었다.
“흐음… 로트말론의 군대가 제법 잘 버티고 있긴 하지만 이대로면 시간문제입니다.”
“그렇지?”
“예. 전술도 제법 잘 짠 것 같긴하지만… 밸크로 기사단의 힘이 상정 외였을 겁니다. 실제로 밸크로 기사단이 적들의 전술을 그대로 무력화시키고 있으니까요.”
“아주 재밌구만. 이대로 밀어붙이고 그대로 에도피아까지 나의 손으로 가져오는 거다 밸크로 기사단……!”
하지만 이는 호가드니의 단순한 바람일 뿐이었다.
이미 역풍은 다른 곳에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뒤늦게 출발한 제9기사단이 전장에 도착해버린 것이다.
“제법 화끈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구만.”
“와아… 전쟁은 정말 오랜만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동안 계속해서 마수들만 잡아왔으니…….”
“그래도 영지전을 이렇게 대놓고 벌이다니… 참…….”
제9기사단의 기사들이 아래로 보이는 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는데 그 선두에는 게벨과 아시테르, 베드롱이 있었다.
“모두 준비는 되었나?”
“네.”
“아시테르, 너는 어찌할 셈이냐? 내키지 않으면 뒤로 물러나 있어도 된다만.”
“명령이십니까?”
“그럴 리가.”
“그럼 저도 모두와 함께 참전하겠습니다.”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아시테르를 보며 게벨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수들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사람들이 죽고 죽는 전장이라면 당연히 아시테르가 싫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아시테르는 차분한 모습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빠르게 이 전쟁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죠.”
“흐음… 알겠다.”
“어차피 주목적은 저들이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알겠습니다.”
시원하게 대답하는 아시테르를 보며 베드롱이 뒤에서 미소를 보였다.
아시테르도 이제는 어엿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 그럼 가볼까!!”
게벨의 외침에 제9기사단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 모두 말을 몰아 전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아시테르도 이카루스를 타고 빠르게 안쪽으로 달렸다.
푸르히이잉―!!!
이카루스가 강한 열기를 토해내며 울었다.
사방에 튀는 피를 보며 이카루스 또한 잔뜩 흥분한 모양이었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호가드니 군과 로트말론 군도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제9기사단을 목격했다.
“지원군이다!!”
“제9기사단이 도착했다!!”
“우오오―!!!”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한 로트말론 군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불리하던 전황 속에서 제9기사단은 그야말로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호가드니 군은 제9기사단의 등장에 긴장하는 눈치였다.
몇몇 인원들을 제외하곤 말이다.
“도망가지 않고 드디어 나타났구나 제9기사단!!”
“왔구나 왔어!! 재미없던 차에 잘됐네!”
“으하하!! 모두 준비해라! 진짜 적들이 나타났으니까!”
“어서와라. 기다리고 있었다.”
헬버드로 순식간에 다섯 명의 목을 벤 드웨인이 게벨을 바라보았다.
제9기사단을 살펴보던 밸크로 기사단이 눈매를 좁혔다.
그들의 모습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누더기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던 그들이 지금은 휘황찬란한 갑옷들을 입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의 무기도 하나같이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뭐야 저것들이… 돈이 어디 있어서 저런 갑옷과 무기들을?”
“그래봤자 돼지목의 진주목걸이일 뿐입니다.”
“맞습니다. 겨우 구색을 갖춘 것 같은데…….”
“아니면 겉만 번지르르한 무기들일 수도 있지.”
다른 기사들이 비아냥거렸지만 드웨인과 몇몇 기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제9기사단이 입고 있는 갑옷과 무기는 정말로 고급진 것들이었다.
“그래도 왕실기사단이라 이건가…….”
크게 놀랍지는 않다.
제9기사단도 어쨌든 왕실기사단 소속이었으니, 저런 갑옷과 무기가 하나쯤은 있어도 이상할게 없다.
“차라리 잘 되었구나. 장비 차이라는 말은 듣지 않을 수 있겠어.”
“가자!! 놈들을 부숴버리는 거다!”
“그동안 주제도 모르고 나댔잖아. 이제 밟아줄때가 온거지!”
현재 전황은 호가드니 군에 엄청나게 유리했다.
이 모든 것은 밸크로 기사단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만큼 밸크로 기사단의 사기도 지금은 하늘을 찌르는 중이었다.
그들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제9기사단을 막아서려 했다.
“비켜라.”
콰아앙!!
게벨의 주먹이 다가오는 기사를 가볍게 날려버렸다.
이어 게벨의 주먹에서 뻗어나온 투기가 뒤편에 있는 기사들까지 간단하게 날려버렸다.
뒤편에 있던 베드롱과 다른 선임기사들도 창을 들어 단숨에 적들을 꿰뚫어버렸다.
채재재쟁!!
채재쟁―!! 스가각!!
제9기사단은 단숨에 호가드니 군의 허리춤을 뚫어버렸다.
측면에서 돌파해오는 제9기사단을 막아내기 위해 병사들과 기사들이 움직였다.
콰앙!!!
쩌정―!
어디선가 올라온 바위들이 창칼을 막았다.
이어 총알처럼 날아간 물방울들이 병사들을 공격했다.
제9기사단의 왕실마법기사들이 본격적으로 마법공격을 펼치기 시작하자, 적들이 우후죽순 쓰러지기 시작했다.
“마도사들을 노려라!”
“저놈들부터 죽여야 해!”
밸크로 기사단에서 별동대가 빠져나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왕실마법기사들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렇겐 안 되겠어요.”
별동대의 앞을 가로막은 아시테르가 검을 뽑았다.
다른 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별동대가 미소를 보였다.
“너 혼자냐?”
“재수 없는 자식. 마침 잘 됐네. 내 손으로 죽여주고 싶었는데.”
“무슨 소리야? 쟤는 내꺼다. 건드리지마.”
“이럴 시간 없다. 빨리 마도사들을 처리해야 해. 서둘러 저놈을 죽이고 마도사들까지 죽인다.”
촤라라―!
스강!!
그 순간, 그들의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아시테르가 검을 휘둘렀다.
검끝이 번뜩일 때마다 비명도 함께 흘러나왔다.
“크아아악!”
“크흡!!”
하나둘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며 별동대 인원들도 두 눈을 부릅떴다.
워낙 순식간이라 눈으로 쫓아가기도 힘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릿속으로 사고하고 또 사고했지만 나오는 답은 없다.
아시테르의 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때로는 곧은 직선을 그렸다.
그때마다 그의 앞을 막아섰던 기사들은 힘없이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아시테르는 정확히 기사들의 관절들만 베었다.
관절을 베인 기사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거나,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여러분들을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