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첫 수하 (1)
아시테르의 검술에 놀란 기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 이런 말은 없었잖아? 이렇게까지 실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내 말이…! 게다가 마도사라고 하지 않았어? 정보가 잘못된 건가?”
“아니야. 분명 별명이 ‘붉은 비’였던걸로 기억하는데…….”
기사들이 물러남에도 아시테르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정확히 관절 부분만을 노리며 순식간에 적들을 무력화시켰다.
“마법으로 공격해라!!”
대기하고 있던 마도사들이 아시테르를 향해 마법 공격을 날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허사였다.
아시테르가 일으킨 불꽃이 마도사들의 마법마저 깡그리 태워버렸다.
“거봐…. 마도사 맞잖아…….”
“말도 안 돼… 마도사가 무슨 검술을 저렇게 잘해?”
“내 말도 바로 그 말이야… 이건 우리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마법 실력도 심상치 않은 수준인데…. 이거 어떻게 하지……?”
아시테르가 불꽃으로 다른 기사들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는 불꽃을 위협하는데만 쓸 뿐, 직접적인 공격은 가하지 않았다.
대신에 검으로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는 수준으로만 만들어둘 뿐이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곧 허사가 되고 말았다.
후우웅―!
마치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어디선가 날아온 마력이 쓰러진 기사들을 감싸 안았다.
아시테르는 그 마력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맞다… 저쪽에는 저 사람이 있었지…….”
특이하게도 레이스부채를 이용해 치유 마법을 펼치는 엔류아.
그녀의 존재는 이런 전장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부채를 부칠 때마다 바람에 그녀의 마력이 실려 날아갔다.
다른 치유 마도사처럼 한두 명을 치유하는 수준이 아닌, 저렇게 대규모 인원까지도 치유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새삼 감탄스러웠다.
물론 선택과 집중을 한 것보다야 치유 효과는 훨씬 떨어졌지만, 그래도 저렇게 많은 인원들을 한꺼번에 치유할 수 있는 마도사의 존재는 분명 귀했다.
그런 면에서 엔류아의 마법과 재능은 정말 대단하다 말할 수 있었다.
그녀의 치유를 받은 기사들이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후우… 좋아. 그럼 다시 한번 해볼까.”
“이번에는 방심하지 말자고.”
“저놈도 조금은 지치지 않았을까?”
별동대 기사들이 자세를 갖추며 아시테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몇 번을 시도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수백 번을 덤벼든다고 해도 이들은 아시테르를 쓰러트릴 수 없다.
그만큼 이들과 아시테르의 실력 차이는 엄청났다.
손쉽게 별동대를 제압한 아시테르가 더는 가만히 있지 않고 먼저 몸을 움직였다.
“놈을 죽여라!”
“적이 온다!”
아시테르를 향해 밸크로 기사단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아시테르의 옷깃에도 스치지 못했다.
아시테르는 차분히 전장을 살폈다.
게벨을 선두로 한 제9기사단은 그 위용을 드러내며 적들을 우후죽순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동안의 훈련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마 판데아가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감격이 벅차올라 눈물을 글썽였을 터다.
반면 로트말론의 군대는 조금 위태한 지경이었다.
확실히 오랫동안 전투를 이어온 탓에 그들 모두 지친 기색에 역력해 보였다.
“일단은 저쪽부터 도와줘야 하려나.”
아시테르는 검을 들고 로트말론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이를 본 호가드니 군이 아시테르를 막아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시테르는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해 거침없는 검술을 선보였다.
그의 놀라운 검술 실력에 지켜보던 동료들마저 감탄을 터트릴 정도였다.
“마도사가 저런 검술을……!”
“우오오!! 과연 붉은 비!”
“붉은 비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로구만!”
“음?! 그게 무슨 말인가?”
“몰랐나? ‘붉은 비’라는 별명은 저자가 있는 전장에선 적들의 피가 빗물처럼 내린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잖아!”
물론 아니었다.
붉은 비는 아시테르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마법 ‘불꽃의 비’를 보고 붙여진 별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시테르의 별명이 붙여진 어원이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단숨에 적들을 돌파한 아시테르가 로트말론 군에 합류했다.
겨우 한 명이 전장에 끼어들었을 뿐인데 놀랍게도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아시테르는 눈앞에 보이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거침없이 베어냈다.
그는 목숨을 거두진 않고 그저 움직일 수 없게 관절들 위주로만 벨 뿐이었다.
이처럼 손속에 사정을 두는 아시테르를 보며 로트말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들의 목숨을 취하지 않다니…….”
그만한 여유가 있다는 얘기겠지.
그래도 아시테르 덕분에 로트말론의 군사들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 수십 명의 기사들을 감당해주는 덕분이었다.
그 사이 제9기사단도 무서울 정도로 적들을 몰아붙였다.
덕분에 밸크로 기사단의 힘도 점차 제9기사단쪽으로 몰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좋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체력이 떨어지고 부상이 늘어가는 이쪽과는 다르게 호가드니 군에는 뛰어난 실력의 치유 마도사들이 있었다.
그들 중 단연 최고는 엔류아였다.
“저 여인은 제가 맡을게요.”
마치 로트말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아시테르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로트말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 혼자서는 무리야. 보다시피 저쪽도 저 회복 마도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병력을 배치해놨어. 함께 뚫고 가서 저 여인부터 어떻게 하지 않으면…….”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성주님께서는 전열을 가다듬어주십시오.”
아시테르의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엔류아를 보호하기 위해 병사들이 겹겹이 쌓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그녀가 일부러 그쪽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놀랍게도 밸크로 기사단이나 호가드니 군대는 그녀를 지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이들은 엔류아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지… 알면서도 일부러 방치하는 건가……?”
이유는 알만하다.
대부분의 밸크로 기사단원들이 그녀를 천한 신분이라며 천대했으니까.
실력보다 신분이 중요한 곳이 바로 밸크로 기사단이었다.
더군다나 엔류아는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일전에 아시테르가 알아본 바로 그녀는 호가드니와 드웨인에게 거대한 빚을 지고 있어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나 큰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 저런 대우라니…….”
아시테르는 병사들의 포위를 뚫고 가볍게 엔류아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단숨에 이곳까지 파고든 아시테르를 보며 엔류아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엔류아씨. 이제 마법은 그만 사용해주세요.”
“아니요… 그럴 순 없어요. 지난 번에는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지만…….”
엔류아가 곤란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엔류아쪽을 확인한 병사들이 아시테르에게 달려들긴 했지만, 엔류아처럼 중요한 인력을 지키기에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병력 수준이었다.
밸크로 기사단은 역시나 그녀를 지키기 위해 따로 병력을 준비해두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아시테르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것 보세요. 이 사람들은 당신을 지키기 위해 아무런 노력조차 안 하잖아요?”
“그… 그렇지 않아요……!”
엔류아가 뒤편을 가리켰다.
때마침 밸크로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봐! 우리 물건에 손대지 마라!”
“치유 속도가 늦춰지고 있잖아!”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그들을 잠시 지켜보던 아시테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와 엔류아를 중심으로 불길이 번졌다.
삽시간에 타오르는 불꽃에 몇몇 기사들이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아시테르의 시선이 엔류아에게로 향했다.
“치유 마법은 거기까지 하세요. 당신이 치유를 하면 할수록 피해는 더욱 커질 뿐이에요.”
“네……?”
“적은 피해로 끝낼 수 있는 전쟁을 더 키울 수도 있다는 소리에요. 당신의 힘이.”
마치 벽을 이루는 것처럼 높게 타오르는 불꽃.
그 속에 있는 엔류아와 아시테르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불꽃이 시야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다른 이들의 접근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엔류아가 주변의 불꽃을 둘러보았다.
이는 주변과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함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엔류아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함도 있어 보였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아시테르가 일으킨 불꽃이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엔류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네요… 당신은 저와 적이니까 저를 죽이면 되잖아요?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지금이야 잠깐 적이지만, 크게 보면 우리는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료예요. 이번 분쟁이 끝나면 함께 발할라와 같은 적들과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데 당신처럼 훌륭한 치유 마도사를 제가 왜 죽여요?”
“제가 훌륭한가요……?”
“네! 정말 대단한 힘이에요. 솔직히 제가 알고 있는 치유 마도사들 중에…….”
단연 최고라고 말하려던 아시테르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보니 그의 기억속에는 여기 있는 엔류아보다 훨씬 더 대단하게 느껴졌던 치료 마도사가 한 명 있었다.
그녀가 문득 떠오르자 아시테르가 나머지 네 손가락을 펼쳐들며 웃어보였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요.”
“그 말씀은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사실… 제게 이 힘은 그저 저주받은 힘일 뿐이에요…….”
“네…?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는 마법이 어째서 저주받은 힘인지… 남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는 힘인데…….”
“이 마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잃었으니까요…. 제 주변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죽거든요.”
엔류아가 쓸쓸한 미소로 힘없이 답했다.
사연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제게 잘해주지 마세요. 솔직히 제게 잘해주시려는 게 부담되기도 해요. 저는 행복을 좇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저에 대해 조사도 해봤을 테니 이미 알고 계시겠죠. 저는 막대한 빚 때문에 자유조차 빼앗긴 몸이에요. 가문도 망해서 이름뿐인 귀족일 뿐… 그러니 제게 쓸데없는 희망을 심어주지 마세요.”
“그럼 이거 하나 물어볼게요. 전에 제게 그랬잖아요.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지금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저는 지금 이대로에 만족해요.”
단호하지만 어딘가 쓸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표정도 어두웠다.
아시테르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솔직히 말해 아시테르는 엔류아를 밸크로 기사단에게서 이쪽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이는 값싼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엔류아의 능력을 굉장히 높이 사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제가 지금까지 이런 말씀들을 드린 이유, 그건 값싼 동정심 때문이 아니에요.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저에겐 엔류아씨 당신이 필요해요. 저는 앞으로 저만의 마법기사단을 꾸릴 생각입니다. 그곳에 당신이 함께 있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게 제 진심입니다.”
“…….”
“물론 지금 당장 결정해달라고는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하지만 꼭 생각해보셨으면 해요.”
“당신이… 그럴 능력이 되시나요…? 듣자하니 제9기사단의 말단이라고 하던데… 도대체 제 빚이 얼마나 되는 줄 알고… 그리고 저 따위가 뭐라고 당신이 그런 막대한 돈을 내요… 말씀만이라도 정말 감사해요. 조금은 위로가 되네요.”
“예? 아니 이건 위로가…….”
아시테르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불꽃의 방벽 밖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아시테르!!!!”
그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게벨이었다.
다급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아시테르가 곧바로 마법을 해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