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첫 수하 (3)
습격당한 마을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벽 밖에 있던 마을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우스 왕국군은 마구잡이로 마을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그나마 있는 식량들까지도 모두 약탈해갔다.
“모두 챙겨라.”
“네!”
군대를 이끌고 온 지휘관 헤임토가 짧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영지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로군. 이미 도착하고도 나았어야 할 로트말론의 군대가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야.”
“헤임토님. 정말로 놈들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뭐… 어디까지가 진실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들이 챙길 것들만 잘 챙겨가면 돼.”
헤임토는 느긋하게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벌써 에도피아를 둘러싸고 있는 외성 가까이로 왔다.
심지어 헤임토가 이끄는 기사들은 벌써 외성을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외성이 함락되면 곧바로 외성과 내성 사이에 있는 마을들을 습격할 생각이었다.
이곳과 다르게 그곳에는 평민들도 상당수 살고 있으니 이곳보다야 훨씬 짭짤할 것이다.
“그러면 얻을 만한 것도 훨씬 많겠지.”
헤임토가 준비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를 위시한 기사들이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헤임토님. 놈들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놈들이라니?”
“로트말론과 그 수하들 말입니다.”
“후후… 드디어 온 건가. 그럼 오랜만에 전투를 즐겨볼 수 있겠군.”
헤임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의자를 가져갔다.
그들은 그대로 말에 올랐다.
“가자. 놈들이 있는 곳으로.”
“예!”
“예!!”
* * *
헤임토가 사우스 왕국군을 이끌고 외성으로 향하고 있는 동안 로트말론 군은 성벽 위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들에 분통을 터트렸다.
“제기랄 사우스 왕국놈들……!”
“당장 달려나가겠습니다!”
“놈들의 위치는 모두 파악했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에도피아의 기사들이 로트말론을 향해 소리쳤다.
로트말론도 분노로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있었다.
게벨도 로트말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영지민들을 구하고 사우스 왕국군을 무찌르는 거다!”
로트말론이 가장 먼저 성밖으로 나섰다.
그의 뒤를 에도피아의 병력들이 따랐다.
게벨도 제9기사단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섰다.
“단장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우리들은 무슨 역할입니까?”
“설마 또 후방 보조 같은 것은 아니겠죠?”
“이번에는 우리들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놈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9기사단의 기사들이 한데 뭉쳐 소리쳤다.
그들이 이렇게 분노를 터트리는 이유가 있었다.
성 밖의 마수들을 토벌할 때 제9기사단도 종종 마을들을 들렸다.
이들은 제9기사단이 마수들을 토벌해주는 것에 늘 고마움을 표했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이들도 있었고 혹시나 옷이 뜯어지거나 헤지면 와서 기워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들도 스스럼없이 제9기사단에 다가와 자신들도 장차 기사가 되어 왕국을 위해 싸울 것이라 말했다.
제9기사단은 종종 마을 사람들에게 성벽 안으로 들어와 살 것을 말했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답했다.
자신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선조들이 이곳에 터를 두고 살아왔다고.
그래서 함부로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이들이 성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불편해하는 평민들이나 귀족들 때문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천민이니, 평민이니 하는 신분 차별도 근래에는 조금 약해졌다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앙부에서나 속하는 얘기였다.
이곳 변방의 영지들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신분제를 지켰으니까.
그게 어느 정도인지 엠벨 영지의 귀족들은 천민들을 가축 정도로 여길 정도였다.
그나마 에도피아는 워낙 가난한 영지여서 그 구분이 조금은 흐려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천민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영지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다.
이것까지 제9기사단이 함부로 관여할 수는 없었기에 그들도 더 권유하는 것은 포기했다.
하지만 그들이 오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자리를 내어주고 환영해주겠다는 로트말론의 뜻이 있었으니 길은 늘 열려 있다고 말해왔었다.
“그런데 어째서……!”
“제기랄!! 그래서 내가 성벽 안으로 들어와서 살라고 말했잖아요들!!”
“으아아!!”
이미 성 밖의 마을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들었던 제9기사단이었다.
어쩌면 성 안에서 늘 훈련을 해왔던 로트말론의 군대보다 더욱 정이 들었을지 몰랐다.
매일같이 바깥으로 나가 마수들을 사냥하고 전술 훈련을 받았던 제9기사단이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바닥에 즐비했다.
개중엔 따뜻한 미소로 과일을 건네주던 아이도 있었고, 수줍은 얼굴로 다가와 편지를 건네던 소녀도 있었다.
듬직한 왕실기사단 덕분에 이 왕국의 미래가 밝다며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것이 후회되지 않는다는 노인도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으며,
제9기사단이 함께 밭일을 도와줬던 부부도 서로를 부둥켜안고 죽어 있었다.
그 광경들을 목격한 몇몇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 눈물을 훔쳤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사우스 왕국놈들……!”
“씨X…! 다 죽여버리겠어!!!”
“게벨 단장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제9기사단이 게벨을 향해 소리쳤다.
게벨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 역시도 이곳 사람들과 많은 정을 통했었다.
다만 지휘관은 이런 일들에 쉽사리 감정을 내비춰선 안 된다.
그 감정은 곧이곧대로 수하들에게 흘러가 전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니까.
그래서 게벨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옆에 있는 엔류아에게 말했다.
“정말로 성 안에 있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네. 저도 전장에 남아 부상병들을 치료할게요.”
“아니요. 그렇다면 그보다 먼저 해주셔야 할 게 있어요.”
“네? 그게 무슨……….”
“저희들보다 다친 에도피아 사람들부터 치료해주세요. 죽은 사람들도 많지만 살아남기 위해 버티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부디 그 사람들부터 치료해주세요.”
“아… 알겠어요!”
당황한 엔류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기사단과 병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천민이었다.
그런데도 아시테르는 자신들보다 그들부터 치료해달라 말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엔류아도 처음이었다.
밸크로 기사단 같았으면 천민들은 결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적들과 싸워야 하는 밸크로 기사단이 무조건 우선이었다.
늘 우선순위는 밸크로 기사단과 귀족들이었다.
그래서 엔류아는 순간 아시테르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문하고 말았다.
“저기… 정말 괜찮은 건가요? 다친 사람들부터 치료해도…….”
“당연한 걸 뭘 물어요. 위독한 사람들부터 치료해주세요. 지금 이 순간 엔류아씨가 우리와 함께 온 것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치유 마도사들을 몇 명 데리고 있는 엠벨과는 달리 에도피아는 치유 마도사가 없으니까요…….”
“아…. 그치만 저들은 천민이잖아요……?”
“그게 왜요? 사람의 목숨은 누구나 소중하고 귀한 겁니다. 천민이고 평민이고 귀족이고는 중요치 않아요. 그러니 위급한 사람부터 치유를 부탁드릴게요.”
머리를 한 방 쎄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동시에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괴롭혀 왔던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단호하게 답한 엔류아가 의기를 다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밸크로 기사단과 후일에 대한 생각도 잊었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아시테르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말단이긴 해도 아시테르는 왕실기사단의 일원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까지 깊게 감사를 표하니 엔류아는 순간 얼떨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밸크로 기사단에 팔려오다시피 한 이후로 누군가 이렇게까지 감사 인사를, 아니 이렇게까지 자신을 존중해주는 태도를 보여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열심히 할게요!!”
“감사해요. 그럼…….”
아시테르는 근처의 동료 기사들에게 엔류아를 호위해줄 것을 부탁했다.
대부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나름대로 그들을 배려해 후방 보조 및 지원으로 배치해둔 것이다.
이를 확인한 게벨이 미소를 보였다.
이어 그가 기사단 전원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제9기사단은 잘 들어라.”
“예!!!”
“예!!!”
“예!!!”
“예!!!”
기사들이 일제히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게벨의 명령을 기다렸다.
이는 아시테르도 마찬가지였다.
“겁도 없이 침략해온 사우스 왕국군을 모두 죽인다. 우리들의 오늘 임무는 그것 하나뿐이다. 로트말론 군에서 말린다고 해도 망설이지 마라. 내가 책임지겠다. 그러니 너희들은 적들을 섬멸하는 것에만 집중해라!!!!”
“네!!”
“네!!”
“네!!”
커다란 목소리가 일제히 울렸다.
장엄하기까지 한 그들의 분위기에 순간 근처에 있던 에도피아의 병사들마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조금 전 엠벨 영지의 군사들을 상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한편 제9기사단의 동료들도 내심 놀라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앞에서 걸어가는 아시테르 때문이었다.
아시테르가 저렇게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입꼬리에 미소를 꼬리표처럼 붙이고 있던 아시테르였으니…….
그런 아시테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동료 기사들조차 순간 당황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것에 대해 말을 꺼내진 않았다.
아시테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이미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그들 또한 아시테르와 같은 마음이었다.
“와아아―!!!”
“우오오!!”
그때 먼발치서 거친 함성과 함께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마법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로트말론이 이끄는 군대와 헤임토가 이끄는 사우스 왕국의 군사들이 본격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한 것이다.
“진격이다!!”
게벨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9기사단도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의 선두로 나간 아시테르가 빠르게 몸을 날렸다.
화륵!
아시테르의 손끝에서 여러 개의 화염구가 만들어졌다.
그는 가차없이 그것들을 적들에게로 날렸다.
화염구는 각기의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이것을 확인한 사우스 왕국군이 화염구를 막아내려 했다.
“화염구라니! 기본적인 마법이구만!!”
“적들이 이곳에도 나타났다!!”
“왕실기사단인 제9기사단인 것으로 추정!”
“주의해라! 아무리 실력이 없다고 소문이 났어도 왕실기사단은 왕실기사단이다! 방심하지마라!!”
그들의 조장격인 기사가 주변의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시테르가 쏘아낸 화염구가 방패에 닿는 순간이었다.
콰라라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화염구에 닿는 모든 것들이 폭발했다.
폭발에 휘말린 사우스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비명을 토해냈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수백 명의 사우스 왕국군이 주둔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에도피아 사람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아시테르가 이를 악 물었다.
그는 단숨에 몸을 날려 그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뭐… 뭐야!?”
“흡?!”
“적이다!!”
“근데 한 명이잖아?”
“뭐야? 미친 건가?”
아시테르를 발견한 사우스 왕국군이 조롱하듯 말했다.
아시테르는 조용히 자신의 앞에 프레임 오브를 형성했다.
후우웅―!!
오브에서 폭발하듯 타오른 불꽃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 적들마저 잠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자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화륵!
불꽃이 어느 병사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뭐… 뭐야? 불꽃?”
하늘에서 불꽃이 빗방울처럼 떨어지다니,
이것에 신기해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동료들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어……?”
놀란 병사들과 기사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릉― 화르륵―!! 화르르르륵!!
불줄기가 소나기처럼, 하늘에서부터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