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첫 수하 (4)
“와아…….”
아시테르의 마법을 본 엔류아는 순간적으로 부상자들을 치유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늘에서 불꽃이 비처럼 내리는 광경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후후… 치유 마도사님께서는 아시테르 기사님의 마법을 처음 보는 모양입니다.”
“네? 네에…….”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희도 처음 봤을 때는 저게 꿈인가 현실인가 싶었습니다. 하늘에서 불꽃이 비처럼 쏟아지다니요…. 심지어 그 안에 있는 모든 마수들은 불타 사라져버립니다.”
“아아…….”
엔류아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화려한 마법 뒤에 펼쳐지는 광경들.
사우스 왕국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고통 속에 울부짖는 그들의 모습은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물과 얼음을 다루는 마도사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불을 꺼트려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불꽃은 계속해서 대기를 뒤덮으며 쏟아져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을 멈추지 않는 이상 결국 임시방편 수준일 뿐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그 속에서 아시테르는 가차 없이 적들을 베고 있었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네요…….”
엔류아에게 저런 아시테르는 굉장히 낯선 모습이었다.
사우스 왕국의 병사들 앞에서 아시테르는 자비가 없었다.
그의 마법이 발동될 때마다 사우스 왕국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비명을 토해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십수 명의 기사들이 아시테르를 노렸다.
“앗… 조심ㅎ…….”
엔류아가 소리치기도 전에 아시테르의 발밑으로 마력이 퍼져나갔다.
이를 본 사우스 왕국의 마도사들이 황급히 마법을 캐스팅했다.
아시테르는 그들의 마법을 확인하고도 자신의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소용없어요.”
발밑에서 뻗어올라온 불꽃기둥이 단숨에 적들을 집어삼켰다.
불꽃기둥은 다른 마도사들이 만든 돌덩이와 얼음벽도 간단히 부숴버렸다.
초월급 마도사인 아시테르 앞에 아직 중급 정도에 머물러 있는 마도사들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들은 막강한 마법을 펼치는 아시테르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 정도로 강한 마도사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냐…….”
“초… 초월급 마도사임에 틀림 없다…! 그럼 이스트 왕국 마법기사단의 부단장급은 된다는 얘기인데…….”
“마법기사단의 부단장급이 어째서 여기에 있어!? 이런 변방까지 왜…….”
“아무래도 운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건 말이 다르잖아!! 로트말론의 군대에 초월급 마도사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왕실기사단 소속인 것 같은데… 제9기사단은 왕실기사단 중에서도 수준이 가장 낮은 기사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된 정보를 받은 것 같다…….”
마도사들과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조장들과 지휘관들도 술렁이고 있었다.
초월급 마도사인 아시테르의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이었는데, 제9기사단의 실력도 평가 이상이었다.
특히나 게벨과 선임기사들의 실력이 완전 예상 밖이었다.
그들을 막아서기 위해 사우스 왕국의 마도사들이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게벨은 그들의 마법 공격을 뚫고 끝내 사우스 왕국 마도사들 곁으로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부턴 일방적이었다.
게벨의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사우스 왕국의 마도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맨몸으로 적들을 깨부수는 게벨을 보며 로트말론 군이 뜨거운 함성을 터트렸다.
그들의 사기가 올라갈 무렵, 파죽지세로 적진의 한가운데까지 파고든 제9기사단이 말 그대로 적진을 휘저어 놓기 시작했다.
“놈들을 막아라!!”
“진형을 유지해라!”
“마도사들!! 마도사들은 뭣 하고 있는 거냐!?”
사우스 왕국군이 당황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제9기사단이 놓칠리 없었다.
마수들은 전술적인 움직임을 할 수 없다.
대신 놈들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전투를 이어간다.
따라서 초반에는 놈들을 제압하기 쉬울지 모르나 진형이 무너져 각개전투 형식으로 바뀐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우스 왕국의 군대는 그런 마수들만도 못하고 있었다.
전술적인 움직임도 엉망이었고 그나마 유지하던 진형도 흐트러지니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도 제9기사단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철저히,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적들을 무너트리는데만 집중했다.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제9기사단의 공격에 결국 헤임토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퇴각한다!! 모두 물러나라!!”
그의 명령에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도사가 마법으로 퇴각신호를 보냈다.
그것만을 기다린 것인지 기사들과 병사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상대만큼 죽이기 쉬운 것은 없다.
제9기사단이 무섭게 그들의 뒤를 쫓았다.
아시테르와 왕실마법기사들도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사우스 왕국군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었다.
“굉장해…….”
제9기사단의 전투를 본 엔류아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제9기사단은 밸크로 기사단을 상대할 때도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임한 적이 없었을지 모른다.
저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말 그렇게까지 생각될 정도였다.
엔류아가 바라보기에 제9기사단은 사우스 왕국군에게 죽음의 사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지독하리만치 적들을 쫓고 있었다.
사우스 왕국에 많은 원한을 품고 있는 에도피아 군마저 제9기사단을 바라보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대체 무슨 원한이 있길래…….”
“같은 편이라 정말 다행이구만 그래…….”
“마수들 사냥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제9기사단은 정말 강하군요…. 정말 왕실기사단 중 최하위라 불리는 것이 맞습니까? 저들이 저 정도인데 그럼 나머지 왕실기사단들은 대체…….”
가벼운 오해들도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9기사단의 귀에 그들의 말이 들려올 리 없었다.
그들은 사우스 왕국군에 죽어간 왕국민들의 복수를 가하기 위해 적들을 죽이는데 전념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적들을 추격한 끝에 마침내 게벨이 손을 들어올렸다.
추격 중지를 알리는 신호였다.
그 신호를 확인한 제9기사단이 거짓말처럼 추격을 중지했다.
한순간이었지만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았던 그들이었다.
“퉤! 다시는 우리 왕국을 노리지 말아라.”
“감히… 우리 왕국까지 쳐들어와 영지민들을 죽이다니!!”
“씨X! 더 죽였어야 했는데!”
“으아!! 아직도 열받는다!!”
아직도 잔뜩 흥분한 기사들이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이는 왕실마법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분노를 토해내는 동안 아시테르는 달아난 사우스 왕국군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시테르. 네가 이렇게까지 적들을 상대할 줄은 몰랐다.”
“부모님께서 그러셨어요. 사우스 왕국군의 손에 죽은 동료들과 가족들, 영지민들이 엄청나다고…….”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냐…….”
“거기다 저들은 마을 사람들까지 무참히 살해했잖아요. 용서할 수 없었어요.”
“훗… 잘했다.”
베드롱이 아시테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했다.
이로써 모두에게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전투 중 보이는 그의 판단도 나쁘지 않았다.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는 이성적인 선택.
그것을 치열한 전투중에도 베드롱은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확인할 수 있었다면 게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거기다 제9기사단의 기사들도 아시테르의 지시를 군말 없이 따라주었다.
이는 검술기사들은 물론 마법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이가 안 좋은 왕실검술기사들과 왕실마법기사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그런 아시테르가 역시 부단장의 자리에 적격이었다.
“후우… 후련하구만.”
“또다시 쳐들어올까요?”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놈들을 추격하면서 쫓아냈으니… 개인적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만… 아마 놈들은 또다시 기회만 생긴다면 쳐들어 올 거다.”
“역시 그렇겠죠…….”
전열을 정비하는 제9기사단 쪽으로 로트말론이 다가왔다.
그는 제9기사단의 활약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와 함께 이곳까지 온 본론을 얘기했다.
“그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바로 엠벨 영지로 달려가 줄 순 없겠나?”
“그들이 습격 받은 것이 걱정되는 겁니까.”
“아마 우리 영지보다 그들의 피해가 더욱 심각할걸세.”
“엠벨의 호가드니 성주는 개인적인 사심 때문에 에도피아를 노렸던 자입니다. 헌데도 그 자를 도와주러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부탁하겠네, 게벨 단장. 이유야 어찌되었건 같은 왕국의 영지민들이 아닌가…….”
로트말론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호가드니 쪽이 아니었다.
그는 엠벨 영지의 평범한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게벨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그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어야 할 사람도 있으니.”
게벨의 시선이 엔류아쪽에 닿았다.
엔류아는 본래 밸크로 기사단의 인물.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와 영지민들을 치유케 했으니, 그들이 이 일을 물고 또 무슨 시비를 걸어올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엔류아는 다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주어야 했다.
“제9기사단 모두가 움직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단장님. 반절로 나뉘어서 1진은 이곳의 수비와 수습을, 나머지 2진만 엠벨 영지로 향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2진을 이끌고 가는 것은 베드롱. 자네가 하게.”
“알겠습니다.”
베드롱은 곧바로 엠벨 영지로 향할 인원들을 추렸다.
부상이 있는 사람들은 곧바로 제외시켜버렸다.
베드롱의 곁으로 아시테르가 다가왔다.
“너도 함께 갈 생각이냐?”
“네.”
“좋다. 그럼 함께 가자.”
베드롱은 인원을 모두 추리자마자 엠벨 영지로 출발했다.
이카루스를 탄 아시테르가 엔류아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엔류아에게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이 정도로 그렇게까지 감사 인사를 표하지 말아요… 저도 이스트 왕국의 사람이에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같다구요… 당연한 일을 한 거니까…….”
“후후 누가 뭐라고 했나요.”
아시테르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단번에 이카루스의 등에 그녀를 태웠다.
“이제 밸크로 기사단이 있는 엠벨로 데려다줄게요.”
“하지만 이곳에 아직 부상병들이…….”
“괜찮습니다. 이제 전쟁은 마무리 되었으니 로트말론님과 에도피아의 실력 있는 사람들이 이 사태를 잘 수습해주실 거예요.”
“아…….”
“그보다 우리는 더욱 급한 쪽으로 가는 거죠. 엠벨은 얼마나 피해를 입었을지 모르니까요…….”
“네……!”
이카루스가 빠르게 달려 금방 베드롱의 본대와 합류했다.
그들은 쉬지도 않고 단숨에 엠벨까지 달려갔다.
멀리서부터 엠벨의 이곳저곳이 불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에도피아와 마찬가지로 성벽 밖에 있는 마을들은 이미 사우스 왕국군에 철저히 짓밟힌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엠벨은 외성까지 함락당하고 말았다.
외성 안쪽에서도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사우스 왕국군의 깃발이 군데군데 보였다.
“상황은 여기가 훨씬 안좋군…….”
“바로 도우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자, 가서 엠벨을 돕고 사우스 왕국군을 물리친다!”
베드롱의 말에 모두가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엠벨성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길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며 엔류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꽉 잡아요.”
“네…….”
아시테르는 이카루스와 함께 누구보다 먼저 외성 안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