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첫 수하 (6)
드웨인이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엔류아가 본능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지없이 뺨을 때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자 그녀가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런 건방진 새끼가…! 왕실 기사단의 말단 따위가 지금 날 막아선 거냐!?”
드웨인의 팔을 붙잡은 것은 아시테르였다.
그는 드웨인과 마주하고도 전혀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아시테르의 눈빛을 본 드웨인이 기가 차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 이 새끼 이거 눈빛 좀 보게!! 네놈이 날 그렇게 쳐다보면 어떻게 할 건데? 이건 우리 기사단 내부의 일이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드웨인은 금방이라도 아시테르를 때릴 것처럼 앞에 섰다.
부릅뜬 그의 두 눈이 아시테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시테르도 잠시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으나, 아직 그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현재 부상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선 그들부터 옮기고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먼저…….”
“시끄럽다!”
아시테르를 밀친 드웨인이 엔류아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드웨인에게 힘없이 끌려간 엔류아가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지켜보던 아시테르가 입을 열었다.
“엔류아씨.”
“네…….”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 물어볼게요. 전에 제게 그랬잖아요. ‘지금, 이대로에 만족한다’고. 지금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엔류아는 저번처럼 한 번에 답할 수 없었다.
선택할 수 없는 삶.
누군가에게 이끌려 다니는 삶.
얽매여 있는 삶.
어렸을 때부터 팔려오다시피 한 엔류아였다.
덕분에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이러한 삶들을 살아오고 있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갇혀 있었을 때는 상관없었다.
캄캄한 어둠뿐이었고 또 그것이 전부라 믿었기에 다른 마음이 들지 않았다.
때로 몇 번의 빛이 어둠을 뚫고 들어왔을 때, 그것을 붙잡으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어둠으로의 인도일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빛을 함부로 믿지 않게 되었다.
몇 번을 실패하니 몸을 일으키는 것도 두려워졌고 손을 뻗는 것조차도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 아시테르는 빛과 함께 자기 눈앞까지 다가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지금, 이것을 붙잡지 않으면 자신은 또 영원의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 몰랐다.
그와 동시에 처음이 될 수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해가는 삶의 첫 번째 걸음이.
엔류아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아니요… 만족스럽지 않아요…….”
“네?”
“지금의 삶에 만족스럽지 않다구요!! 저 이렇게 살기 싫어요… 이곳에 있기 너무 무섭고 힘들어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채로 인형처럼 사는 것… 이제 제발 좀 그만하고 싶어요… 너무나도 힘들고 무섭다구요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 좀… 데려가 주세요.”
엔류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을 본 몇몇 기사들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 거냐? 뭐? 무섭고 두려워!? 인형?? 하! 이게 점점 기어오르다 못해 뛰어 넘으려 드는구나! 네가 미쳤지!?”
드웨인이 더욱 거세게 그녀를 잡아끌었다.
“아파… 아파요……!”
“전투도 안 치른 년이 이까짓게 뭘 아프다고! 우리들 중에는 적들의 창칼에 맞은 사람도 있고 마법 공격에 당해 쓰러진 놈들도 있다. 그런데 뭘…….”
덥석.
이번에도 드웨인의 팔을 붙잡은 것은 아시테르였다.
그가 나서자 드웨인은 순식간에 두 둔에 쌍심지를 켜고 아시테르를 노려보았다.
“놔라.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아.”
“죄송하지만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뭐?”
아시테르는 드웨인을 상대하지 않고 엔류아를 바라보았다.
훌쩍이던 그녀도 마침 아시테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미소를 보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누구의 강요도 아닌 본인의 선택인 거지요?”
“네… 제 선택이에요… 아주 솔직한 마음이에요… 사실…. 아시테르 당신이 절 여기서 꺼내주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단 한 명이라도 절 이해해주려고, 알아주려고 노력해줬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전 다시 살아갈 수 있어요… 다시 버텨낼 수 있고요…….”
“아니요. 그런 슬픈 말은 하지 말아요.”
“사실 요 근래 몇 번씩 생각 했어요…. 제 곁에 있는 동료들이 밸크로 기사단이 아니라 당신을 포함한 제9기사단이었으면 어땠을까란 생각… 그 생각들이 자꾸만 들어서… 저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동료까지도 안 바라요… 저를 수하로라도 거두어 주세요.”
“…….”
“당신이라면 열심히 모실게요… 제발… 그렇게라도 조금씩 행복을 찾아가고 싶어요 저…….”
엔류아가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서럽게 우는 그녀를 아시테르가 다독여주었다.
“그런 솔직한 말들을 기다렸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드웨인이 코웃음을 쳤다.
이내 그는 다시 한 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너희 지금 뭐, 사랑 놀음이라도 하는 거냐?! 너무 웃겨서 눈물이 다 나는구나.”
드웨인이 다시 엔류아를 끌고 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시테르가 확실히 막아섰다.
이에 발끈한 드웨인인 두 눈썹을 찌푸렸다.
“응?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애송이. 비켜라.”
“아니요. 비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뭐?”
“이제부터 엔류아씨는 저희가 모셔가도록 하겠습니다.”
“크흐흐흐 이건 또 뭐 하자는 상황이냐. 누가 누굴 데려가?”
“엔류아씨를 이쪽으로 보내주십시오. 일 전에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으하하하하하!!!”
드웨인이 고개까지 젖히며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다.
나름 귀족가에서 태어나 얼굴까지 반반하게 생겨 호감을 드러내는 사내놈들이.
거기다 엔류아는 치유 마도사였다.
그러니 여러 사내놈들이 꼬이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때마다 놈들은 커다란 현실의 벽 앞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드웨인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놈들이 엔류아를 눈독 들여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놈들에게 엔류아는 갖지 못 하는 화폭 속의 과일일 뿐이었으니까.
바라보는 것은 허락될지 몰라도 함부로 탐을 내거나 만질 순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
드웨인뿐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눈앞에 있는 불쌍한 청년에게도 이제는 극명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잔뜩 부풀대로 부풀어난 상대의 희망을 꺼트리는 것도 하나의 재미였으니까.
“안타깝지만 말이다. 너는 이 여자를 데리고 가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여자를 사 가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 줄은 아나?”
“엔류아씨는 사고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니 엔류아씨를 모셔가는 비용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으흐흐흐 그래 그건 뭐 네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하고. 아무튼 헛된 꿈은 그만 꾸어라. 엔류아를 밸크로 기사단에게서 가져가려면 저년의 가문이 진 빚을 모두 해결해 줘야 할 거다.”
“그게 얼마나 됩니까?”
“50만 골드쯤 되지.”
“알겠습니다.”
“뭐……?”
너무나도 간단하게 흘러나온 아시테르의 답에 이번엔 드웨인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 오십만 골드가 얼마나 큰돈인 줄은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현실성 없어 보이는 아시테르의 대답에 드웨인이 누가를 파르르 떨었다.
어쩌면 이 애송이는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드웨인이 발끈해 무어라 말하려는 때 아시테르가 엔류아를 자기 뒤로 이끌었다.
“50만 골드. 엠벨 영지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 네까짓게 정말 그 돈을 감당할 수 있다고?”
“그것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엔류아씨는 저희 측이 데리고 있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네가 정말로 돈을 보내줄지 안보내줄 지도 모르는 상황에…….”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저와 제9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죠.”
“네까짓게 함부로 제9기사단의 명예를 걸 수 있다고?”
아시테르가 드웨인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제9기사단이 검을 뽑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베드롱을 시작으로 다른 기사들이 검과 검집을 바닥에 두었다.
마도사들은 마법 지팡이를 곁에 두었다.
그들의 행동에 밸크로 기사단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시테르라면 우리 기사단의 명예를 내걸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곧 우리 기사단의 부단장이 될 몸이니까요.”
“맞습니다. 아시테르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도 도와줄 생각입니다.”
“우리도 약속의 의미로 병장기들을 이곳에 두고 떠나겠습니다. 모두 우리가 왕실 기사단이 되었을 때 국왕께서 직접 하사하신 물건들입니다. 그러니 이것들은 우리들의 긍지이기도 하죠.”
“…….”
“아시테르가 그대들에게 돈을 모두 보내주었을 때, 우리도 다시 이 병장기들을 회수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의 말에 밸크로 기사단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시테르를 위해 이들이 이렇게까지 나서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시테르가 엔류아를 이카루스에 올려 태웠다.
제9기사단도 두 사람과 함께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이번엔 밸크로 기사단과 호가드니 군이 그들을 막고 서 있었다.
“이건 또 무슨…….”
“후후 이렇게 순순히 돌려보낼 수야 있나. 너희들이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린 몫도 지급하고 가야지.”
호가드니가 그들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순순히 엔류아를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거기다 뭣도 모르고 여기까지 온 제9기사단에게서 없는 것도 쥐어짜 받아낼 생각이었다.
자신과 밸크로 기사단의 힘으로만 사태를 수습하면 손해도 커진다.
엠벨 영지의 힘을 끌어다 써도 결국 최종적인 손해는 호가드니의 몫.
그러니 제9기사단에게 억지를 써서라도 무언가를 받아 낼 생각이었다.
호가드니의 말에 제9기사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희들이 무슨 행패를 부렸단 말씀이십니까?”
“그대들이 무차별로 쏟아 낸 마법들에 건물이 파괴되고 농지도 파괴되었으니… 이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해 줘야 하지 않겠나?”
“예……?”
“더군다나 그대들이 죽인 사우스 왕국 군 병사들도 결국 우리가 처리해야만 하는데…….”
베드롱은 너무나도 기가 차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급하게 달려와 급한 불을 꺼줬더니 이제는 불에 타버린 재산들은 배상해 달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호가드니의 주장에 제9기사단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호가드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거기다 엔류아는 본래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 것을 드웨인에게서 사간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질 않은가……?”
호가드니와 드웨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방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베드롱이 화가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아시테르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럼 성주님께서는…….”
“백만 골드. 그 밑으로는 절대 허락해 줄 수 없다.”
“설마 성주님께서 또 말씀을 바꾸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당연하지. 백만 골드라면 기꺼이 엔류아를 내주고 그녀의 가문이 진 빚도 청산해주도록 하마.”
호가드니가 승리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제까짓게 돈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드웨인에게 50만 골드 자신에게 100만 골드면, 무려 총 150만 골드였다.
일개 기사가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이번에도 순순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드웨인님께는 50만 골드, 호가드니님께는 100만 골드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