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동부의 슬레이어 기사단
아시테르와 제9기사단이 동부 끝자락에 온 지도 순식간에 1년이 넘게 흘렀다.
그 사이 엠벨 영지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중앙 정부에서 정밀 조사를 나와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동안 갖가지의 비리를 저질렀던 호가드니와 밸크로 기사단은 낭패를 보고 말았다.
대부분의 재산을 잃고 처벌까지 받게된 호가드니는 하루 반나절 동안 멍하니 있었다는 풍문이었다.
드웨인도 호가드니 몰래 불법적인 일을 저질러 집행부에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너냐?”
그 소식을 들은 마르체니가 아시테르를 쳐다봤지만 아시테르는 사악한 미소로 일관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들이 열심히 털어준(?) 덕분에 루기아 가문에 빌린 돈도 도로 갚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제9기사단은 에도피아에서 많은 일들을 도맡아 했다.
그동안은 침입해 오는 마수들을 방어만 했다면 이제는 먼저 마수들 사냥에 나섰다.
엔류아 덕분에 치유까지 곧바로 할 수 있어 마수들을 사냥하는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그렇게 마수들을 몰아내고 나면 곧 사람들이 정착해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다.
마을이 만들어지는 데엔 불과 두세 달이면 충분했다.
“이제 곧 성벽도 넓혀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치안이 좋아지면서 사람들의 왕래도 잦아지다 보니 이곳에 정착하는 사람들도 덩달아 많아졌다.
게다가 이들이 주변 영지들보다 에도피아로 몰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성주님. 제9기사단이 지금 저쪽놈들에게 뭐라고 소문이 나있는 줄 아십니까?”
“뭐라고 소문이 났는데 자네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사우스 왕국놈들이 제9기사단을 ‘슬레이어 기사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슬레이어 기사단?”
“예. 놈들에게 제9기사단은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들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국경을 넘기만 하면 가차 없이 죽여버리니까요. 불과 얼마 전에도 몇몇 겁 없는 것들이 이쪽을 넘보다 제9기사단에게 된통 당하고 물러나질 않았습니까.”
“하긴… 그러고보니 제9기사단이 이곳에 온 뒤로 마수들뿐만 아니라 사우스 왕국에게 입는 피해도 적어졌구나.”
“틈만나면 국경을 넘어와서 시비를 걸던 놈들이 요새는 조용합니다.”
에도피아는 그동안 다른 영지들보다 가난하고 군사력도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랬기 때문에 사우스 왕국의 군사들도 틈만 나면 시비를 걸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놈들도 전혀 그러질 못했다.
그럴 때마다 제9기사단이 달려가 박살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근처에서 활동하던 화적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아시테르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모두 소탕해버렸다.
그는 무자비하게 죽이던 사우스 왕국군과 다르게 화적들에게는 그래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바빠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제9기사단과 에도피아의 병사들이 함께 터전을 마련해주고 행정을 담당하는 귀족들이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둬야 했다.
처음에는 몇몇 귀족들이 화적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를 표명해왔지만, 이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나선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성주인 로트말론이 강경하게 일을 진행 시켰고 마르체니 공주가 그들을 보살피는 데 일조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합작을 이루어 버리니 귀족들의 반대 소리는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화전민들은 생각보다 영지에 곧잘 적응했다.
처음부터 화적인 사람은 없다.
그들 모두 본래는 평범한 영지민들이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니 다시 성실한 삶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물론 개중 몇몇은 화적민 시절을 잊지 못해 다시금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제9기사단이 나서서 해결해주었다.
이쯤되니 어느새 제9기사단은 에도피아에서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기존에 에도피아 소속 병사들과 기사들이 질투를 하거나 싫어할 법도 한데 그런 일도 없다.
함께 훈련하며 강해지고, 크고 작은 전투도 함께 치르다보니 어느새 동료애로 끈끈히 뭉치게 되었다.
게다가 훈련이 끝나고 함께 술이라도 한 잔 기울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부단장! 왜 이렇게 나와 계시나?”
술집 바깥에 나와 있는 아시테르에게 베드롱이 다가왔다.
아시테르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술이 제법 들어갔는지 불콰한 모습이었다.
“아유 참… 그냥 전처럼 편하게 불러주시면 안됩니까.”
“그럴 순 없지! 우리 기사단의 부단장인데! 내가 아시테르 너를 낮잡아 부르면 다른 녀석들도 분명 그렇게 할 거다. 네가 하도 정 없어 보인다고 그래서 이렇게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편하게 대하고 있긴 하다만…….”
“그나마 다행이에요. 저는 사실 이게 더 편하거든요.”
“얼른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아니지… 이제는 좀 익숙해질 때가 되지 않았냐?”
“글쎄요… 제가 원해서 받은 자리가 아니라 그런지 영…….”
“후후후 너는 원하지 않았지만 다른 녀석들이 원했잖아. 이 녀석아. 동료들 대부분이 추천해서 부단장 자리에 오르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복 받은 줄 알아라!”
“베드롱 형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제9기사단 여러분들을 알게 돼서 저는 굉장히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후후 알면 마르체니 공주님께도 잘해라. 마르체니 공주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만나지도 못했을 거다. 첫 만남은… 좀 안 좋았었나?”
“아니요. 좋았습니다!”
아시테르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베드롱은 테오도라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형이었다.
친화력도 좋아서 제9기사단과 함께하자마자 가장 먼저 친해진 사람이었다.
아시테르를 빤히 바라보던 베드롱이 입을 열었다.
“너 무슨 고민 있지?”
“네?”
“내가 인마, 너를 하루 이틀 보냐? 맨날 고민 있을 때면 그런 표정 짓고 있잖아.”
“아아… 그게 그렇게 금방 티가 나나요.”
“너는 얼굴에 다 드러나 짜샤. 그래서 고민이 뭔데? 이 형님께 말해 봐라 부단장님아.”
“음… 그게…….”
“너 설마 혹시 그거냐!? 드디어… 여자에 눈을 떠서…! 알렌시아 말고 다른 여자들도 눈에 보이기 시작한 거냐!?”
“……?”
“예를 들면 엔류아라든지!! 엔류아라든지…! 아아… 솔직히 인정한다. 너한테 그렇게 잘해주는 데다 귀엽기까지 한 엔류아라면… 흔들릴 만하지 암 그래… 연애상담이 또 내 전문이야. 어디 한 번 솔직하게 털어놔 봐라!”
“베드롱 형, 모태솔로라면서요…….”
“시, 시끄러 인마! 원래 안 해 본 놈들이 더 잘 아는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래요. 아무튼 그런 고민은 아닙니다.”
“그럼 뭔데?”
베드롱의 말에 아시테르가 잠시 안쪽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동안 많이 정든 사람들.
하지만 이제는 이 사람들과 이별할 시기가 찾아왔다.
“본대 복귀 명령을 받았습니다.”
“본대? 설마… 백상 마법기사단 말이냐?”
“네.”
“잘 됐구만!!”
“네에?”
예상했던 반응은 이게 아닌지라 오히려 아시테르가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자 베드롱이 뭘 그런 표정까지 짓냐며 손사래를 쳤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베드롱 형?”
“당연하지 이 녀석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는 제9기사단을 떠나서 다시 백상 기사단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잊고 있나본데 너는 원래 그쪽 소속이었어. 군단장님께서 손써주셔서 파견 온 거라 그렇지.”
“그건 알고 있죠…….”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오해하진 마라. 나를 포함한 제9기사단 녀석들 모두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단 한 번도 너를 타소속 기사단원이라 생각한 적도 없을 거다. 적어도 네가 우리 기사단에 속해 있는 동안에는 누구보다도 널 우리 기사단의 일원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다들 마찬가지일 거야. 뭐…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건 아시테르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어느 한 명 아시테르를 진심으로 대해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거기다 제9기사단 사람들은 아시테르에게 무려 부단장 자리까지 내준 사람들이었다.
아마 아시테르를 타소속 기사단원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일 터다.
“이번에는 우리 부단장이 장기 출타를 가는 거라고 생각하지 뭐.”
“아쉽진 않으세요?”
“왜. 아쉬워하진 않는 것 같으니까 서운하기라도 하냐?”
베드롱의 물음에 아시테르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이 사람들과 이별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쉬움이 잔뜩 밀려왔다.
아시테르의 표정을 본 베드롱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도 당연히 아쉽지. 하지만 언젠가는 찾아올 헤어짐이었다. 헤어짐이 있으면 다시 만남도 있는 법이고. 거기다 우리가 그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냐?”
“아니요…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우리가 아시테르 네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 아니에요! 무슨 그런 생각을…….”
“너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들은 그런 걸 느껴 인마. 우리들과 다르게 너는 훨씬 더 성장해서 크게 될 인물이다. 그런 녀석의 재능을 고작 우리들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데 낭비하게 할 순 없지. 너는 잘 모르는 듯 하지만 검술과 마법을 그렇게 능숙하게 다룬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다. 아무나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
“그러니까 여기 변방에서 썩히지 말고 더 크고 넓은 물로 나아가라. 그런 면에서 나는 잘 됐다고 말한 거야. 어차피 우리들도 곧 중앙에서 너를 불러들이지 않을까 예상했으니까. 다들 이별은 천천히 준비하고 있었다.”
“…….”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우리가 영원히 못 만나는 것도 아니고. 네가 또 백상 마법기사단에 가서 멋들어지게 활약한다면 우리들의 어깨도 덩달아 올라가는 거라고. 왜? 우리 기사단의 부단장이 저기 메이저인 마법기사단에서도 승승장구하며 나아간다는데 우리라고 안 기쁘겠냐? 평생의 자랑거리지.”
“베드롱 형…….”
“그러니까 가서도 잘 해라. 텃세 부린다고 기죽지 말고. 네 어깨에는… 아니지, 네 뒤에는 우리 제9기사단이 있잖아. 게벨 단장 명령 다음으로 우리는 네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라고.”
“알겠습니다……!”
아시테르의 대답에 베드롱도 만족한 듯 웃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시테르라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거기다 백상 마법기사단에는 아시테르의 애인인 알레시아도 있으니까.
아마 적응하는데도 문제없을 터다.
“메이저 기사단이라고 텃세 부리기만 해봐라… 가서 다 조져버릴라니까…….”
“네?”
“아니다 혼잣말이다 혼잣말! 뭐하냐! 어서 들어와라. 다들 기다린다. 엔류아도 아까부터 너만 찾더라. 네가 좋아하는 숙성 시킨 술, 그거 아무도 안 준다고 품에 싸고 돌고 있다고. 가서 제발 그 술좀 개방해줘라. 우리도 좀 마셔보자!!”
“네!!”
아시테르가 웃으며 베드롱과 함께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있던 자리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게벨이 걸어 나왔다.
“괜한 걱정이라고 말씀드렸질 않습니까.”
“쳇…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참…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말 남매라고 해도 믿을 것 같습니다.”
“에에? 게벨 아저씨. 어딜 봐서 그런 심한 말이 나와요?”
“후후 그냥 지켜보고 있으면 그런 느낌입니다. 그리고 요즘 보면 마르체니님께서 가장 편하게 대하는 사람이 바로 아시테르입니다.”
“아니 편하게 대하는 게 아니고… 저 자식이 자꾸 은근하게 날 놀려먹잖아요!!”
“그건 아가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게 다 아시테르가 먼저 건드려서예요.”
“제가 봤을 때는 아가씨께서도 먼저 아시테르를…….”
“아, 몰라몰라! 됐어요.”
돌아서는 마르체니를 보며 게벨이 미소를 보였다.
아시테르를 만나 마르체니도 상당히 밝은 모습으로 변했다.
아시테르의 부탁으로 처음 빈민가에 나가 직접 도움의 손길을 전했던 마르체니도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느낀 모양인지, 그날 이후로도 꾸준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그러면서 마르체니도 점점 성숙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혼인을 생각하실 나이가 되었어.”
사실 다른 왕족에 비해 늦은 나이이긴 했다.
괜히 입가를 실룩거린 게벨이 마르체니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아가씨. 좋아하는 사람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럼 이상형은 있습니까?”
“아시테르의 정반대.”
“으하하하!! 그렇습니까. 근데 정말 아시테르가 떠나도 섭섭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알 게 뭐예요? 저딴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