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마녀 구출 (2)
“크음…….”
“왜 그러십니까?”
아포칼립스 문을 바라보던 비체가 연신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유미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몰래 술 마시다 아레나에게 들키신 겁니까?”
“끄응… 내 나이가 몇인데…….”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오늘따라 평소 스승님답지 않은 얼굴을 하고 계십니다.”
“그게 말이다…….”
비체가 아포칼립스 문을 가리켰다.
자연스레 유미르의 시선도 아포칼립스 문으로 향했다.
“네놈 눈에도 보이느냐?”
“아…….”
그때서야 유미르도 비체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포칼립스 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보통 보랏빛을 띠었다.
헌데 지금은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더군다나 진동하듯 아포칼립스 문이 눈에 띠게 떨고 있었다.
“저건… 대체 왜 저러는 겁니까?”
“아무래도 너희들이 위로 올라갔다 와야 할 것 같구나.”
“예? 저희들이요?”
“저건 말이다. 아포칼립스 문이 웃고 있는 거다.”
“예에…? 스승님 설마 벌써 정ㅅ…….”
“예끼 이놈아! 장난칠 때가 아니다.”
“그럼 정말 아포칼립스 문이 웃고 있단 말입니까?”
“아둔한 놈. 문이 어떻게 웃어?”
“아니 스승님…….”
괜히 장난스럽게 말을 내뱉었던 비체가 다시금 진지해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말투는 장난스러웠을지 모르나 그의 눈빛만큼은 줄곧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인지라 유미르도 덩달아 조용해졌다.
“웃고 있는 것은 저 너머에 있는 놈이다.”
“예……?”
“예전에도 아포칼립스 문이 저렇게 부르르 떨어대며 기운을 뿜어댄 적이 있었다.”
“그랬습니까? 혹시 저건 어떤 일의 징조라든지…….”
유미르가 검을 말아쥐며 눈빛을 달리했다.
아포칼립스의 틈에서 강한 마수라도 튀어나오면 금방이라도 상대해줄 기세였다.
“아서라. 저건 이쪽의 일이 아니다.”
“예?”
“어비스 던전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만약 어비스 던전에 막강한 마수들이 쏟아져 나올 징조였으면 신수도 이렇게 잠잠하게 있진 않았을 거다.”
“그럼 무슨 징조입니까? 저건…….”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정말 아포칼립스 문이 신나서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기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사특한 기운.
그것 때문에 괜히 더 불안한 느낌이었다.
“제자야.”
“네.”
“아레나와 함께 바깥 세상에 다녀오너라.”
“바깥에요?”
“그래.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마수놈이 나올 것 같다.”
“아포칼립스 안의 마수가 바깥에 나타난단 말입니까?”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다른 곳에 생성된 던전이 브레이크 되어 안의 마수들이 바깥으로 흘러가거나 아니면 어떤 미련한 놈이 마수를 직접 소환해내는 경우가.”
“왜 그런 짓을…….”
“실제로도 몇 번 있던 일이다. 그리고 이번엔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괜히 아시테르가 걱정되는구나.”
“아…….”
아시테르의 이름이 나오자 유미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라면 분명 마수를 죽이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 설 터였다.
“정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껄껄… 네가 없다고 뭐 여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그러는 거냐?”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너라. 여기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알겠습니다.”
유미르가 비체에게 고개 숙여 답했다.
확실히 그가 없다고 해서 당장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아시테르의 얼굴도 보고 싶었다.
아마 아레나도 이 소식을 들으면 좋아할…….
“정말 다녀와도 괜찮겠어요?”
“응? 아레나, 너는 언제 온 거냐?”
“계속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흘흘흘… 너도 아포칼립스의 문지기가 다 된 모양이로구나.”
“저도 이곳에서 오래 살았으니까요.”
“그래. 오랜만에 둘이 나가서 데이트나 하고 오거라.”
“아버님…….”
“나는 신경 쓰지 말아라. 나 그렇게 센스 없는 영감 아니다.”
비체가 일부러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유미르와 아레나에게 좋은 시간을 주기 위함도 있지만 정말로 바깥세상이 걱정되기도 했다.
“그나저나 저 사특한 놈이 저렇게까지 좋아하다니… 대체 어떤 놈이길래…….”
* * *
“고맙습니다…….”
“정말 너무 감사해요…….”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는 어린 소녀들.
아 아이들은 모두 마녀숲의 마녀들이었다.
폭행까지 당했는지 여기저기 상처 난 마녀들을 보며 아시테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곳에 붙잡혀 온 아이들은 너희가 다냐?”
“네… 다른 친구들은 이미…….”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다른 인간들에게 팔려갔다는 얘기였으니까.
팔려가지 않았더라도 이 아이들이 그들의 소재에 대해 알 리가 없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이렇게 도움을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인걸요…….”
그중에 제일 나이가 있어 보이는 소녀가 가이우스의 말에 답했다.
씩씩한 소녀의 말에 가이우스가 그녀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레이아가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반응에 아시테르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뭘요.”
“그냥 아까부터 뭔가 이상해서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흐음… 글쎄요 딱히 꼬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운데… 아무튼, 가이우스 씨는 아이들을 엄청 좋아하나 봐요.”
“당연하죠.”
“……?”
이유를 묻는 표정이었다.
아시테르의 표정을 읽은 프레이아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가이우스님께는 딸이 있어요.”
“아…! 그래서…….”
이제야 가이우스가 이들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기다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이유.
아마 저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딸이 겹쳐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따님분이 많이 아픈 상태입니다.”
“아픈 상태라니… 어떻게요……?”
“손가락 끝이 시꺼멓게 죽어가고 있고 매일같이 피를 토하시는 데다… 아니, 아니 잠시만… 근데 제가 이 얘기를 어째서 아시테르 씨에게 말하고 있는 거죠?”
“흐음… 딸이 아프다니…….”
“그래서 가이우스님께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따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약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치료 마도사는요?”
“소용없었어요.”
잠시 엔류아를 떠올려봤지만, 소용없었다는 프레이아의 말에 이내 그만두었다.
아시테르의 시선이 가이우스에게 머물렀다.
어쩐지 마녀들을 구하는 일에 그가 가장 먼저 앞장섰다.
임무를 수행하는 느낌이었던 켈링턴 일행과 다르게 가이우스는 마치 자신의 지인이 붙잡혀 있었던 것처럼 다급해 보이기도 했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당신이니까 하는 말인데요.”
“네?”
“에도피아 쪽에서도 느꼈겠지만 가이우스님은 발할라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에요.”
“근데 왜 발할라에 있는 거에요? 신분상의 이유로?”
“후후 아니요. 가이우스님은 그런 것에 관심 없으셔요.”
“그럼…….”
“모두 따님인 릴리아님을 위해서예요.”
“따님을 위해서라니요?”
“발할라에서 릴리아님을 치료해주고 있거든요. 그래봤자 상태호전이 아닌 생명연장 정도지만요…….”
“아…….”
“처음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뭐 사실상 릴리아님이 인질이 되어버리고 말았죠.”
인질이라는 단어에 아시테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프레이아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릴리아님의 치료를 돕겠다는 말로 접근해서… 결국에는 릴리아님을 인질로 가이우스님을 마음껏 이용하고 있어요. 심지어 이제는 가이우스님이 말을 듣지 않으면 릴리아님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고 있는 상태에요.”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저는 가이우스님이 다른 최고 간부들과 다르게 가장 인간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다른 간부들과 다르게 억지로 발할라에 소속되게 되었지만… 가이우스님은 순수한 본인의 실력만으로 최고 간부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지금도 위태로운데 만약 그런 가이우스님이 망가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아시테르가 프레이아를 쳐다보았다.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줄곧 가이우스에게 머물러 있었다.
“가이우스님은 정말 좋은 수하를 두셨네요.”
“예?”
“지금 제게 그 말씀을 하시는 이유. 도와달라는 말씀이시죠? 가이우스님이 망가지지 않게.”
“아… 그건…….”
“근데 어째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저는 발할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왕국 마법기사단 소속인데.”
“그냥… 당신이라면 도와주실 것 같아서요. 에도피아에서부터,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당신을 지켜봐 왔거든요.”
그녀의 말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이우스의 사정이 딱하긴 했다.
다른 것보다 소중한 딸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발할라에게 더욱 화가 치밀었다.
“알겠습니다.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럼 제가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프레이아가 품에서 푸른 빛의 구슬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를 부르고 싶을 때 이 구슬을 깨세요. 그럼 제가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아아… 알겠습니다.”
아시테르와 프레이아가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가이우스와 켈링턴의 거래도 끝나가고 있었다.
켈링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정말 다 당신 소행으로 만들어도 되겠소? 분명 벨제부트의 지배자가 당신을 쫓을 텐데.”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되어도.”
“당신이 강한 것은 알겠지만… 벨제부트의 지배자를 얕보지 마시오. 놈은 이 무법지대를 다스리는 놈이요.”
“저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아이들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이우스는 마녀들의 신변을 백상 마법기사단쪽에 맡겼다.
그 편이 더욱 안전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켈링턴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책임지고 이 아이들을 마녀의 숲으로 돌려보내겠소.”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왜 붙잡힌 것인지…….”
샤를이 어린 소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답해주었다.
“언니가 배신했어요.”
“언니?”
“우리는 마녀의 숲 바깥으로도 나간 적 없는데…… 타샬리아 언니가 우리들을 데리고 와서 인간들에게 팔아넘겼어…….”
“맞아! 마법을 가르쳐준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그녀들의 말을 들은 샤를이 말없이 마녀들을 안아주었다.
상황은 대충 알겠다.
이들은 마녀의 숲 바깥으로 나왔다가 인간들에게 납치된 것이 아니었다.
동료라고 믿었던, 가족이라고 믿었던 마녀가 이들을 속였고 배신한 것이다.
“인간만 그런 줄 알았는데… 마녀들도 결국 똑같네.”
그녀의 말에 몇몇 소녀들이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아시테르와 디안드레가 그녀들을 달래주는 동안 가이우스도 프레이아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보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가이우스님…….”
“상관없다. 그보다… 쓸데 없는 말을 했더구나 프레이아.”
“아… 다 들으셨나요…….”
“다시는 내 얘기를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마라.”
“혹시 모르잖아요. 저 사람이 정말로 저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훗… 웃기는 군. 나는 발할라의 간부다. 반면 저 청년은 이스트 왕국의 마법기사야. 우리는 섞일 수가 없는 관계다. 그러니 괜한 쓸데없는 기대는 버려라.”
“아니요. 저는 저 사람이 정말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프레이아는 확신에 찬 눈길로 아시테르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