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뜻하지 않은 만남 (3)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와 함께 지냈던 날들은 한여름밤의 꿈과도 같았으니까.
그래서 종종 생각나곤 했다.
특히나 치유 마도사들을 마주할 때면 더더욱 그랬다.
아시테르가 살아오면서 마주친 치유 마도사들 중 린만큼 뛰어난 인물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눈빛에 물든 반가움.
아시테르만큼이나 그녀 역시도 한 번씩 아시테르를 그리곤 했다.
다만 이곳에서 마주한 것이 조금 애석할 뿐이었다.
“린… 어째서 이곳에…….”
아시테르의 말에도 린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아시테르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 사이에 더 늠름해진 것 같네요?”
“그동안 세월이 꽤 흘렀으니까요. 못 보던 사이 린 당신도…….”
더 아름다워졌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린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그 말을 꺼내기가 갑자기 어려워졌다.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
“…네.”
“대체 어떤 일이길래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많이 아프세요.”
“아버님께서요?”
“네. 제 마법도 통하지 않는 병이에요. 몇 번을 노력해 봤지만 소용없었어요…….”
“당신의 마법이 통하질 않는다니… 대체 어떤 병이길래…….”
“지독한 병이에요… 지금도 아버지께선 천천히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으니까요.”
린의 말에 아시테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장 그녀를 돕겠다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때문에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 없다.
“…많이 위독하신가요?”
“네. 많이 위독한 상태예요.”
린이 고개를 들어 아시테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과 반대편에 서 있는 아시테르를 보고 있으니 괜히 심통이 나는 기분이었다.
아시테르는 이스트 왕국의 기사고 자신은 웨스트 왕국의 공주.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맞는데…….
그럼에도 불편한 기분과 마음이 자꾸만 솟아올랐다.
그래서 괜히 아시테르에게 꺼내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린의 얼굴을 살핀 아시테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당신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울게요!”
그러나 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턱대고 이렇게 아시테르를 마주하긴 했지만, 솔직히 일개 마법기사인 그에게 부탁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은 그리하면서도 괜히 아시테르의 마음을 알고 싶어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정말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우리는 함께 싸웠던 동료이자 친구잖아요.”
아시테르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반면 린에게는 ‘친구’라는 단어가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평소 되뇌였던 말인데 오늘만큼은 어째서인지 이 단어가 그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약속해 줄 수 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 도와주겠다고.”
“당연하죠!”
“바보 같은 사람… 무슨 내용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무턱대고 약속부터하면 어떻게 해요?”
“아… 그런가요.”
다급함에 고개부터 끄덕였던 아시테르가 멋쩍게 웃었다.
린도 피식 웃고 말았다.
모습은 조금 바뀌었어도 속 안에 있는 아시테르는 여전한 모양이다.
친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망설임 없이 나서는 모습.
그녀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졌다.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는 비밀도 없으니까.
“좋아요. 그럼 믿고 말해 볼게요. 사실 제 아버지를 치료하려면 세계수의 열매가 필요해요.”
“네…? 세계수의 열매요……?”
“네. 그것이 꼭 필요해요.”
“세계수의 열매라면 마녀여왕이 갖고 있는 그 열매를 말하는 거예요?”
“맞아요. 그것.”
린의 말에 아신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이 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는 아시테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린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현재 세계수 열매를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웨스트 왕국의 국왕이니까.
거기다 린은 현재 전쟁터인 이곳에 있었다.
“잠깐만요… 지금 무슨 얘기를… 그럼 설마 당신…….”
“맞아요. 제가 웨스트 왕국의 공주에요.”
“아아…….”
담담하게 자신을 밝히는 린을 보며 아시테르는 순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빈민촌에서 봤을 때부터 린에게 조금은 다른 점들이 보이긴 했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 생각했지만, 그게 설마 공주의 신분이었을 줄이야.
“많이 놀랐어요?”
“솔직히 놀랐어요… 상상도 못해봤는데…….”
“그럼 이제 우리 관계도 달라질까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아시테르의 말에 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스스로 공주임을 밝히기 싫었던 것은 아시테르와의 관계가 서먹해질까 두려워서였다.
자신이 공주라는 것을 알면 아시테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도 이스트 왕국도 아닌 웨스트 왕국의…….
하지만 아시테르는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였다.
“당신이 절 친구로 생각해 준다면 저 또한 그럴 겁니다.”
“그거 좋네요.”
진심이었다.
린은 아시테르가 지금처럼 자신을 편하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아시테르를 보며 머뭇거렸다.
둘 사이엔 아직 끝맺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저한테 세계수의 열매를 가져다 줄 수 있겠어요?”
“그건…….”
솔직히 어려운 부탁이었다.
그래서 아시테르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불가능해요.”
“크게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럼 다른 하나. 이번 전쟁에서 빠져 줬으면 해요.”
“…그것도 불가능해요.”
“어째서요? 당신 하나 참전하지 않는다고 전장의 전세가 바뀌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저는 이스트 왕국의 마법기사에요.”
그 한마디로 설명이 되었다.
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아시테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린의 두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저도 마녀들을 상대로 정말 본격적인 전쟁을 벌일 생각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들의 힘을 보여 저들에게서 세계수의 열매만 받아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하지만 전쟁이 더 치열해지면 그때는 당신 목숨도 위험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다른 큰 것도 아니고 요령 것 이번 전쟁에서만 빠져달라는 건데… 그것조차 어려운 건가요?”
“미안해요 린… 저 또한 이 전쟁에서 빠질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저만큼이나 소중한 이유인가요?”
린의 말에 아시테르가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마녀의 숲을 지키는 것.
그것은 세아츠리스가 아시테르에게 부탁한 일이기도 했다.
아시테르가 전쟁터로 향하기 전 세아츠리스는 그에게 마녀의 숲을 함께 지켜 달라는 부탁을 했다.
거기다 백상 마법기사단이 이곳으로 온 이상, 아시테르만 전쟁터에서 쏙 빠질 수도 없었다.
결국 어느 것 하나 린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른 방법은… 다른 방법은 없나요? 아버님을 살릴 수 있는…….”
“없어요… 이렇게 하는 수밖에는…….”
“이렇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당신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일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린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 역시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 한 켠에서는 계속해서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해 왔던…….
“미안해요. 지금은 이 방법밖엔 떠오르지 않아요.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이 왕국에 더 큰 희생을 몰고 올 수도 있어요.”
“…그렇군요.”
“좋아요… 당신은 당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맞겠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것 알고 있어요 저도…….”
린의 표정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머리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시테르의 단호한 태도가 린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녀도 자신이 억지스러운 부탁을 하고 있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는 그저 당신을…….”
린이 말끝을 흐렸다.
다음 말은 린 본인조차도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전쟁터에서 아시테르를 잃기 싫다는 것.
그것이 린의 또다른 속마음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하면 완전히 자신이 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떤 승부도 아니고, 싸움도 아닌데 이상하게 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말을 끝맺지 못했다.
대신에 그녀는 아시테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건 이스트 왕국과도 관련이 없는 일이잖아요… 단지, 단지 내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
아시테르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린의 곁으로 테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공주님. 더는 오래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
답하는 린의 목소리엔 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실례했어요.”
“아… 린……!”
아시테르가 그녀를 붙잡기도 전에 린은 돌아서서 떠나버렸다.
그녀에게 더 다가서려 하니 어둠속에서 몇몇 사내들이 나타났다.
“더 이상은 접근할 수 없다.”
“떨어져라.”
동시에 들리는 낮은 음성.
아시테르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린을 지키는 쉐도우 호위단이 아시테르를 주시했다.
그들도 전장에서 아시테르가 싸우는 것을 봤기 때문에 아시테르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지녔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살얼음과도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아시테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더 접근했다간 곧바로 베어 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아시테르도 더는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지금 그녀를 붙잡으려 해봤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뒤늦게 비체가 갖고 있는 약을 떠올려 봤지만, 그것이 과연 린의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결국 아시테르는 순순히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린이 웨스트 왕국의 공주였던 것은 아직도 충격으로 남았다.
한편 조용히 떠나가던 린도 고개를 돌려 아시테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보 같은 사람…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예?”
“아니야.”
“공주님. 지금이라도 저자를 제거할까요. 살려 두기엔 상당히 강한 전력입니다.”
“내 친구야. 아시테르는.”
“친구라고요? 저 사람은 이스트 왕국의 마법기사입니다.”
“맞아.”
“설마… 지난 번에 이스트 왕국에서 만났다는 친구의 정체가…….”
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떠나가는 아시테르를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해.”
“그렇습니까…….”
테라가 검을 거두었다.
과거 린을 살려 줬다던 은인이 설마 저 사내였을 줄이야.
그렇다면 적어도 아시테르의 등 뒤에 검을 꽂는 행동은 할 수 없었다.
“복잡하시겠군요…….”
“…….”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진영을 살폈다.
벌써 수많은 병사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가 애써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홀로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살려 낼 수는 없었다.
결국 전쟁은 언제나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괴물의 모습이었다.
“테라.”
“예. 말씀하십시오 공주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당연한 말씀을. 그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을 겁니다. 국왕이신 헤렌달님의 병이 낫을 수만 있다면……!”
“오늘 전쟁터에서 죽은 그 사람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고… 아버지고 어머니였겠지……?”
“공주님 그런 것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은 아버님인 헤렌달님과 공주님의 차기 왕위를 생각하셔서…….”
“그게 안 돼… 아까 들었던 말이 자꾸만 가슴에 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