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던전에서 온 사람들 (3)
유미르와 아레나가 있는 곳으로 곧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들의 선두에 있던 여인이 주변을 살폈다.
“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있던 거죠……?”
마수들의 잔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시체에서 나온 피는 대지를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헌데 이상한 점은 다른 쪽은 마치 불에 그을리기라도 한 것처럼 대지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여인의 곁에 있던 사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많던 마수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이는 맨크라이아 도시의 병력들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 무키우스님! 이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오르테말로!! 무사히 살아서 빠져나갔었구만!!”
“네. 마침 근처를 지나던 공주님 일행이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고… 공주님……!”
무키우스가 그때서야 린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의 뒤편에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린에게 예를 갖췄다.
유미르와 아레나는 린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무례하구나! 감히 공주님께!!”
“됐어요 바르말. 그보다… 마수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건가요?”
“보시다시피 모두 처치했습니다…….”
무키우스가 허허로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가 유미르와 아레나를 가리켰다.
“여기 있는 이 두 분이 해낸 일입니다.”
“두 분이 해낸 일이라고요?”
“네… 저희들은 그저 뒤에서 지켜보는 것 밖에는…….”
“거짓말치지 마라! 저 많은 마수들을 겨우 여기 있는 두 명이 처리했다고?!”
린의 곁에 있던 바르말이 소리쳤다.
그러자 무키우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입니다… 두 분께서 해낸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두 분을 모셔서 크게 대접하려고 했던 차입니다.”
“이곳 도시의 사람들이 아닌가요?”
“예. 이방인들입니다. 아니면 도시를 잠시 지나는…….”
“제가… 이 두 분께 도움을 요청했었습니다.”
유미르와 아레나에게 길을 안내해 주었던 중년인이 손을 들었다.
린의 시선이 유미르와 아레나에게로 향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묘하게 낯이 익었다.
거기다 행색들도 이제 보니 특이했다.
이쪽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옷가지였다.
“두 분께서는 어디 사람인지…….”
이렇게 묻는 것도 조금 웃겼다.
그러나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유미르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저희들은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예? 그럼 태어난 곳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후후 저희는 그저 역사 속에 사라진 사람들일 뿐입니다.”
유미르의 말에 아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린의 시선이 아레나에게 고정되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옆에 있는 사내도 선한 인상과는 다르게 탄탄한 근육질의 몸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검을 갖고 있는 것을 보니 검을 쓰는 자일게 분명했다.
반면 여인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린은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쪽 분은 마도사이신 모양이군요.”
“그… 그렇습니다! 세상에 처음 봤습니다! 푸른 불꽃을 사용하는 마도사가 있다는 얘기는!!”
푸른 불꽃이라는 말에 린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유미르와 아레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린이 갑자기 두 사람을 살피기 시작하니, 유미르와 아레나도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두 분… 잠시만… 아주 잠시만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지금 급히 가야할 곳이 있어서요.”
“실례지만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급하게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러 오느라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아레나의 물음에 린이 미소를 보였다.
“실례했어요.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제 소개를 드리지 않았군요. 제 이름은 하이시아 린. 웨스트 왕국의 공주이자, 아드님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웨스트 왕국…? 그럼 설마 여기가 웨스트 왕국이란 말입니까!?”
“잠시만요. 아들의 친구라고요?”
유미르가 놀라는 동안 아레나는 인상을 굳히며 린을 쳐다보았다.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혹시 모를 오해를 풀고자 린이 말을 덧붙였다.
“네. 두 분 아드님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슬하에 아들을 두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이곳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 따로 장소를 마련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떤가요? 이곳은 듣는 귀가 많아서요.”
린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이제는 유미르까지 눈빛이 달라졌다.
린과 웨스트 왕국의 군사들을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의 기세가 바뀌자 웨스트 왕국의 기사들도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이를 본 린이 외쳤다.
“무례한 행동은 말아요! 이분들은 우리 왕국의 도시를 구해 주신 은인들입니다.”
“죄송합니다.”
바르말이 곧바로 검에서 손을 뗐다.
린의 시선이 유미르와 아레나에게로 향했다.
“두 분께 위해를 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잠깐의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래요. 개인적인 이유로요.”
“뭐…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당신?”
“들어나 보자고. 우리 아들의 친구라잖아.”
“하여간…….”
유미르가 먼저 검에서 손을 뗐고, 이어 아레나까지 경계를 풀었다.
린은 곧바로 아레나와 유미르를 안내했다.
따로 마련해 둔 임시 막사 안에서 세 사람이 마주했다.
린이 먼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우리 아들과 친구라고요?”
유미르가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그러자 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테르가 두 분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해줬어요. 아버지인 유미르님께서는 달빛 검기를 다루는 강한 검사라는 말을 했었고, 어머니인 아레나님께서는 푸른 불꽃을 다루는 훌륭한 마도사라는 것을요.”
린은 잠시 숨을 쉬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두 분이 끼고 계신 레티나의 반지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답니다. 푸른 불꽃이라는 말에 혹시나 싶었는데, 두 분께서 끼고 있는 반지를 보고 확신했어요. 아시테르의 부모님이시구나 하고…….”
“호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말씀이신지…….”
“우리 아들한테 이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친구가 있을 리 없는데…….”
유미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레나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우리 아들 녀석이 공주님께 무슨 무례라도 범한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이 고약한 놈이 약점을 잡았다거나……?”
“전혀요. 오히려 제 목숨을 구해 준 적 있는 은인이에요. 아시테르는…….”
“엥? 우리 아들이 공주님의 목숨을 구해요? 어허, 어허허허……!”
유미르가 고개까지 젖혀 가며 웃었다.
린은 두 사람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던 아레나와 유미르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이스트 왕국에서 그런 일이 있었군요…….”
“녀석… 많이 힘들었겠어…….”
“아시테르가 그럴 정도라면…….”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라니까… 하여간 고집은…….”
그때 유미르가 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우리 아들 녀석이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신 거로군요. 아비로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시테르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을 거예요.”
“아뇨… 저희는 서로 위로를 해준 겁니다. 저 역시도 아시테르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거든요.”
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미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뒷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현재 아시테르는 마녀의 숲에 있어요.”
“그 녀석이 거길 왜요?”
“최근까지 웨스트 왕국과 마녀들이 전쟁을 치렀거든요. 이스트 왕국의 마법기사단이 마녀들을 도왔고요.”
“이스트 왕국이 마녀들을요…? 마녀들에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저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요. 그 자존심 강한 마녀여왕이 이스트 왕국에게 도움을 청할 줄은…….”
“마녀여왕은 아닐 겁니다. 아마 다른 마녀가… 아…! 그때 그 아이일지도 모르겠네.”
“누구? 세아츠리스?”
“그래. 아시테르의 친구. 그 아이가 도움을 요청한 걸 지도…….”
“흐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야.”
두 사람의 얘기에 린이 멀뚱멀뚱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레나가 피식 웃었다.
“아시테르가 처음 사귄 친구가 글쎄… 마녀지 뭐에요.”
“마녀랑… 친구라고요……?”
“네. 그래서 우리도 놀랐지 뭡니까. 마녀와 친구를 맺다니… 으하하하!! 하여간 내 아들이지만 허무맹랑한 녀석이라니까.”
이것은 린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아시테르에게 마녀 친구가 있었다니.
이건 그 당시에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그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순수하고 착한데 조금 맹한 구석도 있고. 엉뚱한 구석도 있고.”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교육을 해놔서 어디 가서 폐를 끼치고 그럴 아이는 아니에요.”
“그건 그렇죠. 늘 힘의 가치와 책임에 대해서도 얘기했고… 아니 근데 글쎄 이 녀석이…….”
유미르는 아시테르의 어렸을 적 얘기들을 자연스럽게 풀어 나갔다.
아시테르의 어렸을 때 모습을 상상하며 린도 어느새 그 얘기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신나서 얘기를 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미르가 멋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시테르가 마녀들을 도왔다면 웨스트 왕국군과 싸웠다는 얘기인데… 우리가 여기서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보였다.
“두 분께서는 우리 왕국의 도시를 구해 주셨잖아요. 거기다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시테르는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에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서운하죠?”
“네?”
“얼굴에 다 써져 있는 걸요. 우리 아들에게 서운하다고.”
“아…….”
정말로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괜찮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표정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 정도 감정조차 숨기지 못하다니 아직도 멀었다는 얘기였다.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부모니까… 아시테르와 관련된 일은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들을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부디 우리 아시테르를 너무 원망하진 말아 주었으면 해요.”
“네… 원망하진 않아요… 오히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아시테르가 걱정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유미르와 아레나, 두 사람 앞에서 어째서인지 이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유미르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아들 녀석은 대체 무슨 복이 있어서… 이렇게 아리따운 아가씨들만 곁에 꼬이나…….”
“다 당신 닮아서 그렇지.”
“뭐… 그건 그렇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아레나를 보며 린이 순간 두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대화가 갑자기 이리로 튀는 것일까.
그러나 순간 그녀는 유미르가 일부러 분위기 전환을 위해 말을 돌렸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때문에 그녀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시테르는 착하고 정도 많잖아요. 거기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만하지 않아요. 심지어…….”
계속 말을 잇는 린을 빤히 바라보며 유미르가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가 아시테르와 똑 닮아 있었다.
“우리 아들을 좋게 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시테르에 관한 얘기들을 하는 동안 공주님의 표정이 너무나 밝아 보여 저희들도 듣는 내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만큼 아시테르를 좋게 생각하고 또 녀석과 좋은 추억이 많기 때문에 그런 표정이 절로 나온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비로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아시테르의 곁에 오래오래 있어 주세요. 아… 웨스트 왕국의 공주시니 그건 힘드시려나……?”
“당신도 참… 당연히 힘들지.”
“어쩐지 아쉽구만… 우리 아들에게 좋은 짝이 생긴다면 딱 이런 여성이었으면 했는데…….”
유미르가 지나가듯 혼잣말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들은 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발그레 지기 시작한 그녀의 볼을 들키기 싫었던 것이다.
아레나가 그런 린에게 물었다.
“웨스트 왕국이 마녀들과 전쟁을 시작한 이유가 뭐라고 했죠?”
“아. 그건 제 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웨스트 왕국의 국왕이 아파서 마녀들과 전쟁을 치렀다고요?”
“네. 아버지의 병세가 나으려면 마녀들의 세계수에서 나오는 열매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그렇다고 마녀들의 세계수 열매를 빼앗으려 하다니… 너무 무모했어요.”
“…그 말씀이 맞아요. 마녀여왕의 힘은 저희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막강했어요.”
린이 무거운 표정으로 답했다.
아레나가 그녀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 그것 갖고 있지 않아요?”
“뭐?”
“그거 있잖아요.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