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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02화 (202/424)

202화 발할라의 계획

“아…! 스승님께서 주신 것……?”

유미르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푸른색 빛깔의 약이었다.

“이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흐음… 스승님께서 늘 이 약이 세계수 열매와 견줄 수 있는 보물이라고 입에 달고 사셨으니… 그 말씀이 정말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네…? 이 약이 무엇이길래…….”

“그냥 고대 왕국의 보물이라고 알아 두면 돼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데 내용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었다.

아레나는 정말로 별거 아니라는 듯이 푸른색 약을 집어 린에게 건넸다.

린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레나를 바라보았다.

“이걸 왜…….”

“가져가요.”

“예? 하지만 고대 왕국의 보물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런 것을 제게 함부로 주셔도…….”

“상관없어요. 당장 우리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니까요. 그러니 이 약이 더 알맞게 쓰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아… 그래도 이건…….”

“받아 둬요. 가서 이 약으로 아버님의 병세를 고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귀한 것을…….”

린이 눈물까지 흘리며 두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우리 아들의 친구잖아요. 그러면 도울 이유는 충분해요.”

“거기다 우리에게는 당장 필요 없는 물건이고.”

“두 분께서는 정말 우리 왕국의 은인이세요…….”

린이 아레나와 유미르를 향해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눈가는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보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후후 우리들에게 갚지 말고 왕국민들에게 돌려주세요. 이번에 마수들이 습격해서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당장 먹고 사는 것부터 걱정해야 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몰라요.”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이곳 도시가 다시 정상화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도 오늘과 같은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니 경계를 강화시켜야겠어요.”

“아주 좋네요.”

“그럼 이제 우리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벌써 가시려고요?”

“그럼요. 아쉽지만 이곳에 너무 오래 있을 순 없어요.”

“알겠습니다… 바쁘신 분들을 너무 오래 붙잡는 것도 실례겠죠. 곧바로 아시테르가 있는 곳으로 가시는 건가요?”

“반가운 아들 얼굴 좀 보고 싶으니까 그래야겠죠? 그리고 곧 커다란 던전 게이트가 열릴 겁니다. 그곳에서 어떤 마수가 튀어나올지 몰라요.”

“두 분께서는 그 마수를 죽이기 위해 던전에서 나오신 거로군요.”

린이 곧바로 모든 것을 꿰뚫고 말했다.

그 모습에 아레나가 미소를 보였다.

“맞아요. 세상의 뒤편으로 사라졌던 우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유에요.”

“다른 건 몰라도 마수들에게 인간이 위협받는 것만큼은 막아야 하니까요.”

아레나와 유미르가 의기를 다졌다.

두 사람을 보며 린은 진심으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시테르는 정말 좋은 부모님을 두었네요.”

“후훗 아닙니다. 우리들도 그 녀석에게는 부족한 부모였을 거예요. 무엇보다 던전에서 자라온 탓에 너무나도 많은 기회들을 잃었어요. 특히 그 녀석은…….”

“그렇지 않아요. 아시테르는 지금 본인이 원하는 삶을 잘 살아가고 있어요. 거기다 두 분과 할아버님께 배운 덕분에 너무나도 훌륭하게 잘 자라 주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린 공주님의 부모님이 부럽네요. 이렇게 아름답고 현명한 딸을 낳으셨으니.”

아레나도 진심으로 부러워하며 말했다.

그녀 또한 딸이 갖고 싶었으나, 던전이라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는 아시테르 한 명이면 충분했다.

어쨌든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유미르와 아레나는 떠나기 전 린의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혹시나 우리 아시테르가 마음에 든다면 잘해 봐요!”

“예…? 아뇨…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친구인…….”

“어머.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요? 뭐… 우리 아들이 부족한 점이 워낙 많은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 속 썩일 녀석은 아니에요. 엉뚱하긴 해도 허튼 짓을 할 아이도 아니고. 아무튼… 혹시나 마음이 생기면 꼭! 우리가 아쉬워서 그래요 호호호.”

아레나가 호쾌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어 유미르도 린에게 다가가 말했다.

“안사람이 벌써부터 손주를 보고 싶어 해서 저러는 겁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넘겨 들으셔도 돼요.”

“저어… 그런데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아시테르가 어떤 스타일의 여성을 좋아하는지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부모니까요.”

유미르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감 있는 따스한 말투와 사람 좋은 푸근한 웃음이었다.

질문이라는 말에 아레나도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두 분께서는 이곳의 마수들을 모두 처치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니셨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그런 삶을 살아가고 계시는 건가요? 마음만 먹는다면 이스트 왕국에 가서도 요직을 차지하실 수 있잖아요.”

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이스트 왕국뿐 아니라 다른 왕국으로 가셔도… 당장 우리 왕국으로 두 분을 모신다고 해도 엄청나게 좋은 대우를 받으실 거예요. 그런데 어째서 두 분께선 그런 고단하고 위험한 삶을 자처하시는 건지… 저는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아서요. 아들인 아시테르를 생각해서라도…….”

어비스 던전에 관한 얘기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커다란 문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마수들.

마수들의 종류도, 힘도, 특성도 그때마다 다르다.

언제 어느 마수가 문의 틈새를 뚫고 나올지 모르는 곳에서 유미르와 아레나 그리고 비체는 오랫동안 살아왔다.

매일매일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삶이었다.

그것이 문득 생각나 이렇게 물어본 것이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미르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보였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정확히는 우리 가족이요.”

“아아… 하지만…….”

“우리도 이곳 세상에 발을 담고 살아갈 때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요. 사람들이 인정하는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많은 것들을 인정받고 스스로가 좀 더 대단해질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니더군요.”

“아…….”

유미르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지키기 위해 키웠던 힘도 어느새 누군가를 공격하는 힘이 되어 버렸어요.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죠. 그래서 저는 지금이 더 좋습니다. 매일같이 마수를 상대하는 게 훨씬 더 마음 편하고 좋더군요. 누군가 인정해 주고 대우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 스스로가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아, 한 사람. 여기 이 사람이 절 인정해 주고 존경해 주니까 뭐 그걸로 된 거 겠군요.”

유미르가 아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의 유대감이 얼마나 끈끈한지, 서로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바보 같은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멋진 대답이네요. 아직 제가 두 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부디 몸조심하세요.”

“후후 걱정해 주어서 고마워요.”

“그러게. 처음에는 왜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느냐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우리들을 걱정해 주었던 모양이야.”

“아니요. 할 수만 있다면 제 욕심으로 두 분을 저희 왕국으로 모시고 싶었어요. 좀 더 편안한 삶을 사실 수 있도록…….”

“후후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이제 우리는 정말로 떠나보겠습니다.”

유미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레나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떠나기 전, 린을 살며시 안아 주었다.

“아…….”

“그리고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세상 어느 누구라도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런 선택을 했을 거예요. 그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함께 싸워 준 것일 테고.”

“네…….”

“그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마음 굳건히 먹고 열심히 살아가요. 알겠죠?”

아레나의 품은 따뜻했다.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는 따스한 햇살과도 같았다.

거기다 그녀의 목소리는 린의 마음까지도 위로하는 느낌이었다.

아레나는 린의 머리칼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곤 유미르와 함께 떠나갔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감히 공주님께 무례하다며 노발대발 했겠지만, 린은 아레나에게 또 다른 위로를 얻고 있었다.

린은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서 떠나가는 아레나와 유미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유미르가 준 약이 소중하게 들려 있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다시 뵐 수 있기를…….”

* * *

“준비는 다 되어 가나?”

“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흐음… 별로 보기에 좋은 광경은 아니로군.”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떤 놈을 소환하기에 이 많은 제물들이 필요하다는 건지.

여기저기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사람으로 하면 안 되는 건가?”

“죽은 인간은 제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녀석은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래도 과연 이게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이스트 왕국을 전복시키려면 이 방법밖엔 없습니다.”

“믿어도 되겠나? 정말로 그 마수를 통제할 수 있는 건 맞겠지?”

“소환진 위로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제가 제어 마법을 사용할 겁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 알겠다.”

오르카이우스는 눈앞에 있는 흑마도사 반켈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워낙 욕심이 많은 인물이다 보니, 혹시나 뒤로는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곁에 있는 최고 간부들에게 넌지시 말해 두었다.

만약 수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곧바로 반켈을 죽이라고.

붉은 옷을 입은 최고 간부들이 오르카이우스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응? 그런데 한 명이 안 보이는데… 또 가이우스냐?”

“아마 딸 곁에 있겠지.”

“쯧… 그놈의 자식 사랑은…….”

“가이우스는 딸이 아니었으면 우리들과 함께하지 않았을걸?”

“만약 딸이 다 나으면 어떻게 돼?”

“그럴 일은 없다. 반켈이 직접 만든 독을 타서 먹였으니까. 우리가 주고 있는 포션은 병의 증세가 심해지지 않도록 막기만 할 뿐이야. 그 병은 낫지 않는 불치병이나 다름없다.”

오르카이우스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쪽같은 가이우스에게도 약점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것이 바로 딸의 존재.

그는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남자였다.

그러니 가이우스의 딸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한 그는 결코 발할라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여간 사악해…….”

“그나저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마수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동안 준비해 온 우리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이스트 왕국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잖아.”

“미리 말해두겠는데. 그 팔 짤린 여자는 내꺼야. 아무도 건들 생각하지 마.”

한쪽에 서 있던 여인이 서릿발 같은 한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여인, 아첼리시아는 절친한 친구였던 아필라를 잃고 강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를 보며 펜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그래. 네꺼 해.”

“긴장해라. 절대 이스트 왕국을 만만하게 보지 마라. 특히나 테르세우스. 그 인간이 이스트 왕국을 지키고 있는 한 결코 방심할 수 없어.”

“그래서 저 마수를 소환하려는 것 아냐. 이스트 왕국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위치는 마녀들의 숲과 이스트 왕국의 중간쯤. 그곳에 마수들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병력은 분산되겠지.”

“그러면 우리들은 비어 있는 이스트 왕국을 일제히 공격하면 되는 거다.”

오르카이우스가 저 멀리 보이는 이스트 왕국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 순간 반켈과 다른 흑마도사들이 마력을 불어넣으며 소환 의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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