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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08화 (208/424)

208화 뜻밖의 사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단장!!!”

백상 마법기사단이 아칼의 말에 반발했다.

그러자 아칼이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최선을 다했다. 여기서 모두 개죽음을 당하게 만들 순 없어. 그러니 왕국으로 후퇴해라. 너희들에게 내리는 내 마지막 명령이다.”

기다리는 지원군은 올 기미가 안 보였다.

아무래도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모양.

기약 없는 그들을 이곳에서 마냥 기다릴 순 없었다.

어차피 하이브에서 튀어나오는 마수들은 이제 백상 마법기사단의 손을 벗어났다.

이곳에 더 머물고 있다간 그저 개죽음만 될 뿐이었다.

‘도망치는 게 비겁해 보이냐? 멍청하기는! 작전상 후퇴라는 말이 있는데 왜? 때로는 우직한 나무보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되어보기도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뒷일이 있지! 그러니까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지금보다 더 성장해서 후일을 도모해도 되고 그게 안 되면 강한 동료들을 더 데려오면 되잖아. 안 그러냐?’

갑자기 전 단장이었던 유미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왜 이런 상황일 때마다 그런 얘기들을 했는지, 마법기사단장이 되고나서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죽어도 단원들은 살길 바랐던 것이다.

그들의 미래를 지켜 주는 것.

그것이 아칼이 깨달은 단장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유미르가 떠오르다니, 아칼이 피식 웃음을 보이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단장. 저는 이렇게 단장이 되어서도 당신의 단원인 모양입니다. 결국 단장과 똑같은 결말을 맞을까 하거든요.”

이미 백상 마법기사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아시테르를 비롯한 신입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다.

상대가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칼이 마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골렘들을 모두 해치운 케클립스가 제인스부터 노렸다.

움직이는 케클립스를 향해 수십 개의 칼날이 덮쳤다.

슈콰라라랑!!!

케클립스의 시선이 아칼을 쫓았다.

“그러고 보니 네가 있었군. 지쳐 있는 것 같아 휴식 시간을 좀 주려고 했는데.”

“쓸데없는 배려다. 멍청아.”

아칼의 위로 커다란 야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거칠게 포효한 야수가 손톱을 휘둘렀다.

콰과가강!!!

파콰아앙!!!

야수의 손톱이 일시에 수십 마리의 마수들을 쓸어버렸다.

덕분에 백상 마법기사단도 한 차례 숨통을 틀 수 있었다.

그 틈에 아칼이 그들을 등지고 섰다.

케클립스를 비롯한 수많은 마수들이 그와 마주섰다.

쩌저저정―!!

일자로 뻗어 나간 마력의 칼날이 대지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여기 이상은 못 지나갈 거다.”

아칼의 뒤로 선임기사들이 섰다.

그들을 본 아칼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들은 안가고 뭐하고 있는 거냐?”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멍청한 소리를…―.”

그러나 선임 마법기사들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들은 굳게 마음을 먹고 아칼의 옆에 섰다.

“단장. 우리들도 똑같이 그때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도망치지 말고 유미르 단장님과 함께 싸웠어야 했는데… 그 생각을 하고 또 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함께 하게 해주십시오.”

“맞습니다. 살아 나가는 것은 새로운 미래들이면 충분하질 않습니까.”

“우리들에게 두 번씩이나 도망자라는 멍에를 씌우지 말아 주십시오.”

“유미르 단장님이 우릴 위해 희생하셨듯… 우리들도 단장께 배운 그대로 하는 겁니다. 단장은 단장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리들은 선임기사들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테니까.”

백상 마법기사단에는 아칼을 따라 함께 온 심연 마법기사단의 인원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이 어느덧 선임 마법기사가 되어 후배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왔던 것이다.

그때 뒤에서 아시테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버지가 왜요?”

그의 말에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칼뿐만 아니라 다른 선임기사들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시테르를 보고 있었다.

“뭐? 지… 지금 뭐라고 했냐?”

“네 아버지라고?”

“유미르요. 저희 아버지 이름인데요?”

“동명이인이겠지. 우리들이 말하는 유미르 단장님은…….”

“제 아버지도 마법기사단의 단장님이셨습니다.”

“어……?”

“심연 마법기사단의 단장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럼 네 어머니의 성함은…….”

“아레나. 홍련 마법기사단의 단장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미친……!”

“……!”

의심은 들었었다.

유미르를 연상케 하는 웃음.

아레나와 똑닮은 눈동자.

거기다 프로메테 가문의 불꽃까지.

하지만 아칼은 아시테르에게 이런 것들을 묻지 않았다.

유미르와 아레나는 분명 그곳에서 죽었다.

운좋게 살아남았더라면 분명 다시 이스트 왕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20년이 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이스트 왕국은 두 사람이 죽었음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그들의 시체가 있는지 확인하러 갔으나, 영악한 사우스 왕국놈들은 그곳을 불태우고 떠났다.

그래서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는데…….

“네가 정말 유미르 단장의 아들이라는 말이냐?”

“네. 아칼 단장님은 어떻게 우리 아버지를 알고 계시는 겁니까?”

“나도 심연 마법기사단의 단원이었으니까.”

“그랬군요……!”

“아버지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 거냐?”

“아버지는 지금 던전에 계실 겁니다.”

“유미르 단장이? 던전에는 왜?”

“그곳에서 세상을 지키고 계시거든요. 위험한 마수들이 이쪽 세계를 노리고 끊임없이 쳐들어오고 있어요.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함께 놈들을 막고 계십니다.”

“아아… 그랬구나……!”

순간적으로 유미르는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배신감도 밀려들고 있었다.

아니 배신감이라기보다 원망스러운 마음에 좀 더 가까웠다.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었으면서 어째서 이스트 왕국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이다.

설마하니 우리들 모두를 두고 세상을 등지려 했던 것인가.

그동안 우리는 그 사람에게 굴레였는가!

아니면 부담스러운 자리였던가.

아주 잠깐, 그 찰나에 온갖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아시테르의 말을 들으니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아니, 오히려 그 사람답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유미르는 마법기사단과 이스트 왕국에 이어 이제는 이 세계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던전에서 쏟아지는 마수들을 20년째 막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레나와 함께!!

“제기랄… 너무 유미르 단장다워서 뭐라고 할 수도 없군. 모두 들었나?!”

아칼의 마법이 다가오는 마수들을 한꺼번에 찢어발겼다.

좀전과는 확연히 다른 마법이었다.

아칼은 오랜만에 흥분하고 있었다.

단장이 살아있다는 소식만큼이나 기쁜 것은 없다.

이는 다른 선임 마법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연 마법기사단 출신인 선임마법기사들도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크하하하!!! 우리 단장! 결국 아레나 단장과 그렇게 되었구만!!”

“내가 말했잖아! 유미르 단장과 아레나 단장은 잘 어울린다고.”

“뭐라냐?! 너는 우리 단장이 천민 출신이라 절대 이어질 수 없을 거라고 했잖냐.”

“오호―! 이제보니 유미르 단장. 아레나 단장이랑 결혼하려고 우리 왕국으로 안 온 것 아냐?”

“그래도 난 인정한다! 우리 왕국에 있었으면 결혼은 꿈도 못 꿨을 거다. 나는 단장이 그곳에서라도 행복하다면 됐다.”

“크아―! 갑자기 취한다! 술도 안 마셨는데 취해!!!”

그들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집중되었다.

유미르와 아레나의 아들.

갑자기 아시테르의 존재가 이들에게 선물로 다가온 것이다.

“조카를 여기 두고 못 알아보고 있었구만.”

“내가 저번에 말했지?! 아시테르가 유미르 단장을 닮은 구석이 있다고.”

“으헣!! 으헣허허헣헣!!! 아레나 단장 얘기 꺼낸 사람 누구야?!”

“나다!”

“잘했다!!!”

그들은 마수들과 전투를 이어가는 한편, 계속해서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이제는 싸움의 목적이 달라졌다.

마수들과 혈전을 벌이면서도 잔뜩 신나있는 아칼과 선임 마법기사들을 보며 다른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것을 설명해 주듯 워셀이 나섰다.

“유미르님은 백상 마법기사단의 전신인 심연 마법기사단의 단장이셨다.”

“예?! 그럼 아시테르의 아버지가 마법기사단의 단장님이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거기다 아시테르의 어머니 또한 그 유명한 프로메테 가문의 신성이었던 아레나님이시다. 전대 홍련의 마법기사단 단장이시기도 했고.”

워셀의 설명에 모두가 놀랐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아시테르는 자신의 얘기를 꺼내적이 없었다.

덕분에 그들 모두 이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와 오랫동안 연애를 해왔던 알렌시아조차 몰랐던 사실이었다.

“단장님들의 아들…….”

“어라? 워셀 선배는 왜 또 눈물을 흘려요?”

“유미르 단장님이 살아계시니까… 그분은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셨던 분이다…! 우리 모두는 그때를 후회하고 있어. 끝까지 함께 싸웠어야 했다면서…….”

“아아… 들어봤어요. 심연 마법기사단의 얘기는…….”

“그러면 그 과오를 똑같이 되풀이 할 순 없잖아요! 우리들도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에스파가 앞으로 나서며 활을 잡았다.

잠시 휴식을 취했으니 되었다.

아직도 마수들은 눈앞에 드글드글 했고.

여력이 있으니 저들과 싸울 수 있었다.

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의 생각이었나보다.

모두가 아칼과 선임기사들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아시테르가 양팔에 불꽃을 일으켰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마수들이 눈앞에 있는데 등을 보이면… 부모님께 혼나거든요.”

미소와 함께 아시테르가 시원하게 화염 마법을 사용했다.

거센 폭발이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백상 마법기사단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

유미르 단장이 아레나 단장과 함께 살아 있다.

그 사실만으로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갑자기 기세가 달라진 백상 마법기사단을 보며 케클립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드디어 싸워 볼만해졌군.”

케클립스가 아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칼도 케클립스를 마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아니었단 말이냐?”

“죽으려고 싸우려는 놈과, 살기 위해 싸우려는 놈은 다른 법이지.”

“지금까지 나는 죽기 위해 싸웠다는 말이냐?”

“아닌가?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만.”

케클립스의 말에 아칼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희생해 단원들을 지키고 살려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두가 살아서 나가는 길을 택하려 했다.

살아남으면 어떻게 해서든 유미르를 다시 볼 수 있다.

“재밌군… 네 말이 맞다. 어쩌면 나는 내 스스로의 생각에 사로잡혀 죽기 위해 싸웠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남는다. 살아남아 나의 단장님을 뵈러 갈 거다.”

“너의 단장? 네가 단장이 아니었나? 다른 인간들이 널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만.”

“내 마음속의 단장 말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마수 따위가 이해할 필요 없다.”

후우웅―!!

아칼의 위로 야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야수의 매서운 눈빛이 마수들을 향했다.

크허어어엉―!!!

거센 포효와 함께 커다란 발톱이 대기를 찢었다.

그것을 피한 케클립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 한 번의 일격에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죽었다.

기세가 변한 아칼을 보며 케클립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여왕님께 위험이 될 존재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죽여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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