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전투 그 후…….
사라번이 죽고 하이브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하이브에서는 마수들이 소환되지 않았다.
그것을 본 마법기사들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엔류아에게 치료 받자마자 모두가 다시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과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기 때문이었다.
처절한 울부짖음에 가까운 그들의 마법에 트라이포스의 마음도 무거워지고 있었다.
백상 마법기사단은 사실상 회생 불가능이었다.
그래도 이들이 한 일은 이스트 왕국 역사에 오랫동안 기억될 터였다.
“위험 등급 SS급의 마수였습니다. 그런 마수를 백상 마법기사단이 단신으로 막아 낸 것입니다. 이 정도 위업은 그 어떤 마법기사단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 역사에 새겨질 만큼 대단한 업적이다…….”
주변 일대를 가득 메운 마수들의 시체.
수백 아니, 수천의 시체들이 대지에 널려 있었다.
생김새도 각양각색.
이 많은 마수들을 고작 단 하나의 마법기사단이 막아 낸 것이다.
그 선두에는 단장인 아칼이 있었을 터다.
그리고 그의 뒤를 든든히 받쳐 주는 선임 마법기사들.
모두가 이곳에서 작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트라이포스가 남은 마법기사들과 함께 시체를 수습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여기저기 몸이 뜯겨져 나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것도 많았다.
“모두들…….”
샤를은 워셀과 켈링턴의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다른 살아남은 이들도 죽은 마법기사들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치열했던 전투가 남기고 간 것은 무겁고 침울한 것들이었다.
“단장님… 결국 우리가 해냈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라프와이트가 아칼의 앞에서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아칼은 기뻐할지 모른다.
하이브가 무너지고 벌레 여왕이 죽었다.
이스트 왕국을 위험으로부터 구해 냈으니 마땅히 기뻐해야 하지만, 기쁨은 슬픔으로 점철되어 무뎌진 감각으로만 살아 있을 뿐이었다.
“아칼…….”
하이브에서 내려온 유미르도 죽은 아칼의 앞에 섰다.
아레나가 유미르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아버지… 어머니…….”
뒤편에서 아시테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확인한 아레나가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유미르도 말없이 아시테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우리 아들…….”
“죄송해요. 제가 부족해서…….”
“아니. 이것은 네 탓이 아니야.”
아레나와 유미르는 아시테르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테오도라가 다가왔다.
“고모. 고모부.”
“오오 우리 조카님!!”
유미르가 테오도라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레나도 오랜만에 보는 테오도라의 모습에 반가움을 드러내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보다시피. 너도 잘 지낸 것 같구나. 그 어렵다는 트라이포스에 들어가고. 아버지가 용케도 허락하셨네.”
“후후… 어찌어찌해서 할아버지의 허락을 구했습니다.”
“이야아―! 우리 아들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조카님도 한 인물 하는구만!!”
유미르가 애써 밝게 소리쳤다.
슬픔은 결국 애써 밀어내야 한다.
그것에 갇혀 있다간 더 깊은 심연의 슬픔에 빠지고 만다.
거기다 가는 이들도 이런 우중충한 마지막을 바라진 않을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감사해요…!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아시테르의 부모님이시라고요……?”
그제서야 백상 마법기사단원들이 뒤늦게 유미르와 아레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은 그들도 넋이 나갈 만큼 정신이 없었다.
알렌시아도 두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알렌시아라고 합니다.”
“호오! 말로만 듣던 그 알렌시아분!”
알렌시아를 처음 보는 유미르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미르의 인상은 선했다.
부드러움 속에 감춰져 있던 그 카리스마는 알렌시아에게도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어 옆에 있는 아레나를 바라보았다.
저 여인이 바로 프로메테 가문의 자랑이었던 아레나.
홍련의 마법기사단을 부흥기로 이끌었던 인물.
“이런. 내 소개가 늦었군요. 이름은 유미르. 아시테르의 아버지되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레나에요.”
두 사람이 알렌시아에게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러자 알렌시아도 황급히 자신부터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체르도네 가문의 알렌시아라고 합니다.”
“후후후후 그동안 한번쯤 만나 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유미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아시테르가 알렌시아를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소개했다.
“여기 있는 알렌시아는 제 여자친구에요.”
“뭣?!”
“아……?”
유미르뿐만 아니라 아레나도 놀란 것 같다.
두 사람의 반응에 알렌시아는 물론 아시테르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뭘 그렇게 놀라세요……?”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우리 아들한테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친구가 있다는데!!”
“엄마도 놀랐다… 우리 아들 다컸네… 벌써 이렇게 우리들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소개까지 해주고…….”
아레나가 슬쩍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동안 유미르와 오랫동안 살아 왔기 때문인지 아레나도 어느새 능청스러운 장난이 늘었다.
유미르가 크게 웃으며 아시테르의 어깨를 팍팍 쳤다.
“잘했다 잘했어!!! 장하다 내 아들!! 이제 그럼 결혼하자! 결혼해서 너 만한 아들 나아서 고생… 아니 행복해지거라!!”
“예……?”
“응? 뭐 무슨 문제라도 있었니?”
“아… 아뇨.. 제가 잘못들은 건가 싶어서요…….”
아시테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유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미르가 시선을 돌리며 세아츠리스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마녀신가?”
“네 맞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유미르가 놀라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때 아레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시테르의 소꿉친구잖아요. 세아츠리스. 맞죠?”
“맞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아들이 처음 사귀었다던 친구가 이렇게 아름다운 마녀인줄은 몰랐네…….”
알렌시아와는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세아츠리스는 그보다 훨씬 고혹적이고 어른스러운 아름다움이었다.
“별말씀을요. 어머님께서도 곱고 아름다우세요.”
“어머머…….”
세아츠리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레나가 미소를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시테르의 절친!! 에. 스. 파.라고 합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을 바라본 유미르가 반갑게 악수를 건넸다.
“반가워요. 멋진 활솜씨는 잘 봤어요.”
“예…!? 제 마법을 봐주셨다니 영광입니다!!”
에스파가 유독 유미르의 앞에서 긴장을 많이 하는 이유.
이는 에스파가 어렸을 때부터 존경해 왔던 이가 바로 유미르였기 때문이다.
천민들의 우상이라 불린 유미르를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친한 친구인 아시테르의 아버지라는 것도 한몫했다.
“우리 아들과 친구해 줘서 고마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제가 아시테르에게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 녀석한테 배울게 뭐가 있나… 그저 사고만 안치게 잘 말려 줘요.”
유미르가 찡긋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시테르와는 사뭇 다른 성격이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테오도라도 가슴이 조금씩 격앙되고 있었다.
자신의 고모와 고모부가 저렇듯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것에 왠지 모를 자부심마저 생겼다.
그런 테오도라의 옆으로 비트홀라가 다가왔다.
“너는 몰랐던 거냐?”
“네.. 전혀 몰랐습니다. 설마 제 고모부가 전 심연 마법기사단의 단장이셨을 줄은. 처음에 고모께선 고모부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거든요. 그런데 이제 보니 신분을 감추기 위해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그랬군. 그나저나 어떻게 된 일인지… 유미르님은 마법이 아닌 검술을 사용했다. 거기다 마력은 한 줌도 느껴지질 않아.”
“무슨 힘을 사용하던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과거에도 지금도, 두 분께서 우리 기사들과 왕국을 지켜주셨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게 뭐 중요하겠나. 그나저나 저들의 귀추를 주목해야겠구나.”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는 잘 알겠지만…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대장.”
“뭐? 이봐 테오도라. 너는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전 단장인 아레나와 유미르가 생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면…….”
“왕국은 발칵 뒤집어지겠죠.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어째서?”
“저 두 분은 돌아오시려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말씀하셨거든요.”
“흐음… 더 중요한 일이라…….”
“어쨌든 트라이포스 모두 유미르님과 아레나님의 일은 비밀로 지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비밀로 해도 어차피 모두가 알게 될 일이다.”
“네. 하지만 그것을 최대한 늦춰주고 싶어서요.”
“흐음… 알겠다. 뭔가 사정이 있는 거겠지. 그렇게 해주마.”
“고맙습니다 비트홀라 대장.”
테오도라가 비트홀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번 일도 비트홀라가 테오도라를 많이 봐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됐다. 그동안 네가 해낸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도 들어주지 못할까. 이곳에서의 일은 끝났으니, 우리는 이만 복귀한다.”
트라이포스가 소리 소문 없이 몸을 움직였다.
떠나기 전 테오도라가 아시테르쪽을 바라보았다.
“고마웠어 형.”
테오도라가 떠날 것을 알았는지 아시테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테오도라가 피식 웃었다.
“네 뒤에는 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아시테르. 또 보자.”
테오도라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트라이포스 또한 그 이름값을 제대로 드러내었다.
번개처럼 나타나 폭풍처럼 전장을 휩쓸었다.
어느 누구도 부상당한이 없이 그들은 온전한 전력을 유지한 채 떠났다.
디안드레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대단한 집구석이었잖아… 이제 보니까 저 녀석…….”
어머니인 아레나는 전 홍련의 마법기사단 단장이었고, 아버지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심연 마법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더군다나 아레나는 프로메테 가문 사람.
프로메테 가문이 어디인가!
이스트 왕국의 5대 가문에 꼽힐 정도로 세가 강력한 가문이었다.
그 말은 결국 아시테르 또한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거기다 아시테르의 형은 집행부 특수임무단인 트라이포스의 일원이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집안이었다.
“하… 하하… 이제야 많은 것들이 설명이 되네.”
“그나저나…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아시테르는 결국 귀족과 천민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거잖아?”
“그러게… 이런 경우는 또 난생 처음이네.”
유미르는 천민들의 우상이자 영웅이었으니, 그의 신분이 천민이었던 것은 이스트 왕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헌데 또 어머니쪽은 그냥 귀족도 아닌 5대 가문의 일원이었다.
이런 경우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그때 에스파가 입을 열었다.
“그깟 게 뭐가 중요해? 아시테르는 그냥 아시테르인데.”
“하긴… 그게 또 맞는 말이네.”
“그래. 그게 뭐가 중요하냐. 아시테르는 우릴 살리겠다고 죽어라 노력해 줬는데. 굳이 신분을 나누자면 생명의 은인이다 생명의 은인.”
“솔직히 아시테르랑 세아츠리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몇 번을 더 죽었을 거다.”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니 다들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켜보던 유미르와 아레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트라이포스가 도와준 덕분에 상황은 어느 정도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분명 사라번이 죽기 전에 그렇게 말했지. 늪지대의 마신을 소환하려는 이가 있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신 마수가 어쩌면…….”
“그래. 늪지대의 마신일지도 몰라.”
“일단은 이스트 왕국으로 가 봐야 할까? 그렇지 않아도 왕국에도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인데…….”
“반란이 일어난 모양이야. 조금 전 트라이포스 대장이 그러더라고. 반란군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지원군이 늦어졌다고…….”
“제발 우리가 가기 전까지 별 0일 없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