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왔습니다만-217화 (217/424)

217화 국왕 헨카일로

“테르세우스 경.”

“예. 전하.”

“내가 지나치게 늦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

“…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국왕 헨카일로가 씁쓸한 미소를 만면에 띠었다.

“어리석은 일이지. 어렸을 때부터 배운 글인데. 이제야 그것을 깨달아.”

“본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어렸을 때는 당연하다 생각하며 쉽게 간과했던 것들이, 시간이 흘러 나도 모르는 새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새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자네도 그런 것들이 있었나?”

“물론입니다. 저 또한 부족함이 많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후후후 그것도 웃기는 일이로군. 자네만큼이나 우리 왕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어딨다고.”

“저 또한 수많은 실수를 딛고 이 자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고맙게도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필시 많은 것입니다.”

“그래… 그것이 어쩌면 선택권을 가진 자들이 평생을 가져가야 할 외로움일지도 모르지.”

헨카일로가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곳 수도에는 아직 큰일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아마 지금도 다른 영지들은 폭도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만 생각하면 헨카일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번에 크실리아 그 아이가 전쟁터에서 전사했다고 들었다.”

“글로리아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와 비슷하지만 또 달랐던 아이. 결국 그 아이도 우리 왕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어…….”

“…….”

“백상 마법기사단도 우리 왕국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마수들과 싸우다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더군. 그중엔 단장인 아칼도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고.”

“마법기사들에게 그것은 숙명적인 일입니다. 오히려 왕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었으니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자네들을 이해할 수 없네. 어떻게 그것이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는가. 죽음 뒤에 남는 것은 없네.”

헨카일로의 말에 테르세우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그들의 죽음 뒤에 수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보전하였고, 왕국의 미래를 이어 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백상 마법기사단을 기억해 줄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늘 기사들에게 그런 말을 하네. 살 수 있으면 살라고. 살아 있는 것보다 더 희망적인 것은 없다고.”

“후후 맞습니다. 전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저 혼자만으로 충분하니까요.”

선택의 중압감.

이것은 어느 누구도 대신 짊어져 줄 수 없는 무게였다.

함께 나눌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헨카일로와 테르세우스는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의 성향은 달랐고, 그것이 오히려 둘을 더 친밀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

헨카일로가 고개를 돌려 테르세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부끄럽지만 이런 말을 하고 싶네.”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만큼은 꼭 살아 줬으면 하네. 살아서 내 곁을 지켜 주었으면 해.”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지금 나누는 이 말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의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속은 후련해진다.

헨카일로는 정말로 테르세우스가 죽지 않고 자신의 곁에 오랫동안 남았으면 했다.

테르세우스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주변국은 감히 이스트 왕국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한다.

거기다 테르세우스를 존경하는 수많은 마법기사들이 그의 명령 한 번이면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해도 갈 것이다.

한때는 그런 테르세우스의 막강한 권력이 두렵고 질투가 나기도 했으나 그것은 예전 일.

결국 테르세우스는 자신의 사람이었다.

테르세우스가 수백, 수천의 사람들을 감화시키려 노력할 때 헨카일로는 오직 한 사람.

테르세우스만을 얻으면 되었다.

그리하면 테르세우스를 따르는 수많은 마법기사들의 마음까지도 덩달아 얻을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헨카일로는 강력한 왕권을 만들었고 귀족들의 힘을 어느 정도 억누를 수 있었다.

귀족들의 힘을 억누르자마자 헨카일로가 시작했던 것은 신분제를 건드리는 일.

오랫동안 지켜져 왔던 신분제를 건드려 균열을 낸 이가 바로 헨카일로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반대와 부딪혀 왔고 그때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 무시했던 것들이 작금에 이르러 뜨거운 겁화로 화해 왕국을 덮쳐 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것들도 어느 정도 이루었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도저도 아니게 흘러가고 말았다.

모든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정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만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아 헨카일로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글쎄…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네.”

“그것은 우리들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질 않습니까. 우리 왕국의 후인들이 판단해 줄 몫입니다.”

“후후후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을 아예 신경쓰지 않을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겠습니까. 보다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가끔 자네가 부러울 때가 있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지켜보기에 자네는 늘 명쾌해. 그래서 곁에 두기에 좋아. 내가 복잡해져 갈 때 자네와 함께 있으면 그 복잡하던 것들이 우스워질만큼 명쾌해질 때가 있거든.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자네와 대화를 나누는 이 시간이 너무나 좋네.”

헨카일로의 말에 테르세우스가 미소를 보였다.

현왕이라 불릴 순 없지만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왕.

테르세우스는 헨카일로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뛰어난 왕은 주변인들로부터 오히려 경계를 당한다.

반대로 우매한 왕은 주변인들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다.

어쩌면 헨카일로는 그 모호한 경계 안에서 자신의 살길을 모색한 것이 아닐까 싶다.

모나지 않고 둥그스름한 돌.

헨카일로는 그런 삶을 선호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는 묵직한 돌이었다는 점.

그 덕분에 테르세우스도 헨카일로를 믿고 여러 가지 일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쿠우웅!!!

콰르르릉―!!

마침내 폭거를 일으킨 발할라의 군대가 수도까지 영향력을 미치려 하고 있었다.

테르세우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는 건가?”

“예. 전하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여야지요.”

“후후후 자네가 지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왕국이잖나.”

“…….”

“알고 있네. 자네 같은 사람을 내 사사로이 쓸 수는 없는 법이지. 나 또한 이 왕국의 일부일 뿐이네. 그러니 왕국을 지키는 것은 결국 나를 지켜 주기도 하는 것. 그러니 다녀오게.”

“감사합니다.”

테르세우스가 헨카일로에게 예를 갖췄다.

발길을 돌린 그가 곧바로 향한 곳은 전투가 벌어진 수도의 초입부였다.

“테르세우스님!!”

“오오 헤르다임! 무슨 일인가?”

단발머리의 여인이 테르세우스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사실 먼발치서 테르세우스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말해 보게.”

“섬광의 기사단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갔던 제 5왕국기사단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흐음…….”

“그곳으로 추가 지원 병력을 보내려 했는데 왕성의 귀족분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왕성을 지킬 병력도 부족하다면서…….”

“보내게.”

“예……?”

“마침 여명의 마법기사단이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야. 그들을 곧바로 그쪽으로 보내게. 섬광 마법기사단이 큰 피해를 입을 정도면 적도 만만치 않다는 소리.”

“하지만… 여명 마법기사단은 크로센느 가문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크로센느 가문?”

국왕 헨카일로의 가문이 바로 크로센느 가문이었다.

일반 귀족이 아닌 왕족이 얽혀 있는 거라면 테르세우스로서도 조금 껄끄러워진다.

아마도 폭도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줄 가장 안전한 인물들을 불러들인 것이겠지.

더군다나 크로센느 가문이 여명 마법기사단을 부른다는 얘기는 그곳에 오르페 가문도 있을 거란 얘기였다.

“이거이거… 히스링을 위해 한 번 더 나서줘야 하나.”

그가 고민하던 때 옆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는 우리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그리나……?”

“여명 마법기사단은 유사시 수도를 지키는 마법기사단 아닙니까. 그러니 그들은 이곳에 남겨두십시오. 저희가 대신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그리나의 얼굴이 조금은 수척해보였다.

테르세우스가 그녀의 얼굴을 살피자 아그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으니 보내 주십시오.”

“정말 괜찮겠나?”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것은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슬픔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윈 없습니다. 글로리아 언니도 그걸 바랄 겁니다.”

“알겠네… 그럼 그쪽은 들장미 마법기사단에 부탁하도록 하지.”

척!

아그리나가 주먹을 가슴팍에 가져갔다.

그녀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괜찮을까요…? 지금 제 정신이 아니실 텐데, 분노에 이성을 잃기라도 하신다면…….”

“아그리나는 경험 많은 단장이다. 괜찮을 게다.”

테르세우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콰앙!!

그 순간 건물에 폭발이 일었다.

재빨리 헤르다임을 보호한 테르세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벌써 시작되었는가.”

왕성 내부에도 발할라와 관계된 자들이 있을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침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상 다른 곳들의 소란은 교란 작전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왕성에서는 마법기사들과 왕실기사들을 파견해야 한다.

국민이 없는 왕국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왕성은 그들을 지켜 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곳도 지켜 내야만 하지.”

테르세우스가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후웅!!

날아오던 파편들이 아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헤르다임.”

“예!”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있게.”

“예!? 저도 싸우겠습니다!”

“그 마음은 잘 알겠네만 지켜야 할 사람들도 있질 않은가? 싸우는 것은 우리 기사들에게 맡겨주게.”

“…알겠습니다.”

헤르다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테르세우스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저기 있다!”

“발할라를 위하여!!!”

“모두 죽여어어!!!”

발할라의 옷을 꺼내 입은 사람들이 테르세우스를 향해 돌진했다.

개중에는 익숙한 면면들도 있다.

“그런가… 자네들도 결국 발할라와 뜻을 함께 하였는가.”

“이 왕국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귀족들과 왕이 존재하는 한! 변화는 없을 겁니다.”

“지금으로선 그들이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한곳에 응집할 수 있는 걸세.”

“그것은 테르세우스님께서 권력에 길들여져 있기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이들에게 귀족들과 왕은 그저 악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을 처단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겁니다.”

사내가 곧바로 마법을 펼쳤다.

바위 조형 마법.

근처 바위들을 이용해 원하는 형태로 만들 수 있는 마법이었다.

테르세우스가 아공간을 펼쳐 그것들을 흡수했다.

이어 허공에서 튀어나온 건물 파편들이 적들의 몸을 강타했다.

“끄어어!”

“크학!!”

여기저기 비명이 들려온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테르세우스는 쓰러진 이들을 지나치려 했다.

“어… 어째서… 우리들을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 사람아. 뜻이 다르다고 해서 모두 죽이면 종국에는 누가 남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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