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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31화 (231/424)

231화 묵혀둔 대화

유미르와 아레나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테르세우스의 묘 앞에 섰다.

장례는 먼발치서 지켜보기만 했다.

혹시나 다른 이들이 그들을 알아볼까 조심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왕국에 또다른 소란을 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유미르와 아레나가 무거운 얼굴로 비석 앞에 섰다.

비석에는 ‘동쪽의 가장 위대한 영웅 이곳에 잠들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누가 적은 문구인지 유미르에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문구였다.

“테르세우스님을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나 성의 없는 문구를…….”

두 사람은 테르세우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유미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찾아와 정말 죄송합니다 테르세우스님…….”

그의 침통한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언젠가 어비스 던전에서 나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찾아가고 싶은 이가 바로 테르세우스였다.

그에게 지금까지의 얘기들을 들려 주고 싶었다.

테르세우스라면 분명 잘했다며,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며 많은 얘기들을 들어 주고 맞장구 쳐주었을 것이다.

유미르에게 테르세우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다 잘못한 것들이 있다면 따끔하게 쓴소리를 해댔겠지.

그러한 말들조차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테르세우스는 유미르에게 많은 정을 쏟아 준 인물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유미르와 아레나의 자식인 아시테르도 내심 손자처럼 대해 주었을 것이다.

“벌써 보고 싶군요 테르세우스님…….”

“쯧… 기구한 광경이로구만..”

뒤편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아레나가 절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오랜만에 찾아왔으면 이 아비한테도 인사를 했어야지. 뭐하다가 이제 나타나?”

프로메테 가문의 가주 크리울로스가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본 유미르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크리울로스는 유미르와 아레나의 관계를 누구보다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와 떡하니 마주하고 말았다.

“오랜만이로군 자네.”

크리울로스의 매서운 눈이 유미르에게로 꽂혔다.

유미르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자네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

“…네.”

“하지만 이곳은 내 오랜 친구가 잠든 곳이니… 나중에 자리를 옮겨서 하겠네.”

크리울로스가 가져온 꽃을 놓아 두었다.

테르세우스가 잠든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게 흘렀다.

그럼에도 그의 비석 앞에는 다른 사람들이 두고 간 꽃들이 가득했다.

어쩌면 테르세우스의 명성에 비해 그가 잠든 묏자리가 소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르세우스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이렇게 해주길 바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편안하게 다가가길 원했다.

누구나 접근하기 쉽고, 누구나 만나기 쉬운 장소.

국왕 헨카일로는 그런 장소에 테르세우스를 묻어 주었다.

어쨌든 크리울로스는 경건한 마음으로 친구 테르세우스를 마주했다.

무언가를 속삭였던 크리울로스가 몸을 돌렸다.

“그래. 이제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유미르였다.

뒤에서 크리울로스를 지켜보고 있던 유미르가 입을 열었다.

“저는 다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이스트 왕국에는 머무를 생각이 없다는 얘긴가?”

“네… 그렇습니다.”

크리울로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유미르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이곳 말고 다른 곳으로 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크리울로스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걱정되었던 아레나가 유미르와 함께 나서려 했다.

그러나 유미르는 손짓으로 그녀를 말렸다.

고개를 가로저은 그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레나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크리울로스는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읽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체했다.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숲길을 걸었다.

“테르세우스는 참 유별난 친구였지.”

“예?”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려 줄까? 그 녀석은 사실 어렸을 때, 자신의 마법을 저주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너무나도 독특한 마법을 사용하니까. 심지어 테르세우스는 혼자서는 그 어떤 마법도 만들어내지 못했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테르세우스는 자신의 어렸을 적에 관한 얘기는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무언가 사연이 있나 싶어 유미르도 따로 그에게 물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크리울로스는 지금 담담하게 테르세우스의 어렸을 적 얘기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마법을 자신의 아공간에 저장해 두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다른 마도사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고 있었다. 남들이 힘들게 캐스팅한 마법을 훔쳐 가는 놈이라고. 나중에는 마법뿐만 아니라 나라를 훔쳐 가는 악질이 될 것이라 놀림 받고 따돌림 당했다.”

“테르세우스님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몰랐습니다…….”

“그래. 테르세우스는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어. 심지어는 나중에 내게 그러더군. 자신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바보라고. 그런데 그 마음이 나중에는 오히려 테르세우스를 굳건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더구나.”

“테르세우스님은 늘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생각했죠. 그건 아마 자신의 마법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크리울로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르세우스는 오히려 자신의 마법 덕분에 스스로를 잃지 않고 살아왔다.

“테르세우스는 늘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대도 알겠지만 테르세우스는 마법에 대한 흥미도 식을 줄 몰랐던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의 마법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해야 본인의 아공간에서 흘러나온 마법이 올바로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거기다 녀석은 사람을 좋아했어.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는데도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누며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런 행동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테르세우스가 존재하게 된 것이고.”

우직하리만치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고수해 온 테르세우스였다.

그가 아무리 그렇게 행동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 늘 말해 왔었다.

하지만 보라.

테르세우스는 결국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그가 만들어 낸 작은 파동들이 번지고 번져 결국엔 커다란 물결을 만들어 낸 것이다.

테르세우스의 생각과 행동들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그의 뜻에 함께 동참해 주었다.

그것은 크리울로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크리울로스 또한 테르세우스의 다음 선택과 행동들을 기대했다.

그가 걸어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궁금했고, 바라보는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지 함께 기대했다.

“재밌는 일화가 있지. 테르세우스가 군단장이 되기 전까지 마법 대련 성적이 어땠는지 아나?”

“마법 대련이요……?”

글쎄, 그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 얘기였다.

마법 대련은 마도사들끼리 서로의 실력을 알기 위해 약속된 전투를 하는 것이다.

아카데미 때문에 지금은 그런 풍속이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기사들끼리 서로의 실력을 알기 위해 마법 대련을 많이 했었다.

심지어 이 마법 대련의 승패가 곧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무패였습니까?”

테르세우스라면 충분히 그럴만 했다.

그는 군단장이 되기전부터 이미 엄청난 실력을 지닌 마도사였으니까.

하지만 크리울로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유미르의 예상과는 달랐다.

“아니. 그렇지 않아. 녀석은 승과 패 둘다 많았다.”

“예에? 테르세우스님을 꺾은 마도사들이 존재했다고요……?”

“그래. 자네도 믿기지 않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그건 테르세우스가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다른 사람들을 이기려들지 않았어.”

“아…….”

“오히려 테르세우스는 마도사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자부심을 느끼길 바랐다. 그래서 만나는 상대마다 그에 걸맞는 마법들을 사용해 왔고. 덕분에 상대 마도사들은 테르세우스와 마법 대련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즐기고 나면 놀랍게도 마도사들은 늘 한층 더 성장했던 거지.”

“대련을 즐기고 성장했다라… 아, 그래서…….”

그러고 보니 과거 유미르도 그런 식으로 테르세우스에게 훈련받은 적이 있었다.

테르세우스와 대결을 하다보면 늘 자신의 마법에 대해 많은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테르세우스가 다채로운 마법으로 공격하며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면 늘 고민거리가 유미르에게는 하나의 과제로 남았다.

하나의 과제를 풀어 내면 테르세우스는 어김없이 다른 과제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하나둘씩 과제를 풀어가다 보니 어느새 유미르의 마법은 일취월장해 있었고, 수많은 약점들이 보완되어졌다.

심지어 그 과정들이 지겹거나 너무 힘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테르세우스의 수들을 깨트리는 재미도 있었다.

잠깐이나마 군단장의 마법을 파훼했다는 그 쾌감.

그건 평생 잊을 수 없는 짜릿함이었다.

그런 테르세우스의 수련 방식이 하루아침에 완성되었던게 아니란 것을 크리울로스를 통해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알겠나? 테르세우스는 그렇게 해서 수많은 마도사들을 키워 내고 자신의 재능을 아낌없이 나눠 주었던 것이지.”

“…예. 그동안 미처 몰랐던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걸 이제 자네가 이어받는 것은 어떻겠나?”

“예……?”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이 나라는 커다란 혼돈을 겪고 있네. 반란이 일어난 것도 모자라 초대형 마수까지 나타나 왕국의 커다란 기둥들을 부숴 놓고 갔어. 남은 기둥들만으로는 왕국이라는 거대한 세상을 받치는데 힘이 들겠지. 그러니 자네가 이만 돌아오는 것은 어떻겠나. 자네라면 히스링이나 다른 단장들과 함께 커다란 힘이 될걸세.”

크리울로스의 눈빛은 진중했다.

그 또한 이런 얘기가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유미르에게 이런 얘기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유미르도 생각에 잠겼다.

크리울로스의 입에서 설마 이런 종류의 얘기가 나올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였다.

유미르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스트 왕국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너무나도 옛날 사람입니다. 더욱이 저는 이제 마도사도 아닙니다. 마력을 잃은 제가 마도사들과 함께 하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설사 제가 왕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더 큰 혼란만 야기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유미르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히 거절 의사를 표했다.

그의 표정을 살핀 크리울로스가 두 눈에 이채를 띠었다.

확실히 못보던 동안 유미르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부드럽지만 연약해 보이는 면모가 있었는데, 지금은 속이 단단한 부드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후후후… 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꺼내본 얘기였다. 자네는 자네의 할 일이 있겠지.”

“예… 죄송합니다.”

“이깟 일로 죄송할 것 없다. 내게 죄송할 게 있다면 그저 소중한 나의 딸을 타지에서 실컷 고생시켰다는 정도겠지.”

“아… 그… 그건…….”

유미르가 당황한 표정으로 크리울로스를 바라보았다.

가볍게 툭 내뱉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담긴 것들은 전혀 그렇지 않게 느껴졌다.

역시나 크리울로스는 부릅 뜬 두 눈으로 유미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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