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새로운 군단장
테르세우스의 장례가 끝나고 미처 이스트 왕국의 혼란을 수습하기도 전에 사우스 왕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사우스 왕국이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싶을 리 없었다.
이스트 왕국은 이번에 뼈아픈 손실을 겪었다.
많은 기사들이 목숨을 잃은 것도 문제였지만, 마법기사단장인 아칼과 엔달라프까지 잃은 것도 컸다.
그나마 엔달라프가 있던 조율 마법기사단은 새로운 단장을 뽑으면 됐지만, 백상 마법기사단은 아니었다.
백상 마법기사단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단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왕국 외곽 지역에 나타난 위험한 마수 군단을 백상 마법기사단 홀로 상대해 냈다는 것은 또다른 귀감이 되었다.
“마수들 때문에 테르세우스님에 이어 백상 마법기사단까지 잃었단 말인가… 대체 우리 왕국에 왜 이런 일이…….”
많은 기사들을 잃은 탓인지 도시의 분위기도 상당히 어두워졌다.
당장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킬 방법도 없었다.
보통 이런 때 축제를 열거나 기사들 간에 실력을 겨루는 무투대회를 여는데, 지금은 그럴만한 사정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곳이 하필 수도였기에 당장 수도부터 원상 복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스트 왕국의 이런 상황을 놓치지 않고 사우스 왕국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단장님들은 회의실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테르세우스의 곁에서 그를 오랫동안 보좌했던 헤르다임이 모든 마법기사단 단장들에게 말을 전했다.
그녀 또한 테르세우스가 죽은 이후 웃음을 잃어버렸다.
히스링 단장을 비롯해 남은 단장들이 회의실에 모두 모였다.
고된 전투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가 지쳐 있는 기색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것은 군단장의 부재였다.
마법기사단의 단장들을 한곳으로 이끄는 존재가 바로 군단장.
헌데 지금은 그 군단장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헤르다임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
“이렇게 모든 단장님들을 모시게 된 것은 급한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급한 소식이라니?”
가까이에 앉아 있던 히스링이 물었다.
헤르다임이 생각하기에 현재 차기 군단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인물이 바로 히스링이었다.
아그리나 단장과 함께 히스링 단장은 오랫동안 마법기사단의 단장으로 활동해 온 인물이었다.
다른 단장들은 이 두 사람보다 뒷 세대의 인물들.
아그리나 단장이 군단장이라는 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아마도 히스링이 다음 군단장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높았다.
“사우스 왕국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벌레 같은 새끼들이 또…….”
아그리나 단장이 인상을 굳혔다.
가뜩이나 많은 동료들을 잃어 예민해져 있던 아그리나였기에 언어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상당히 과격해져 있었다.
“놈들도 우리 왕국의 사정을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그래… 왕국 내에 사우스 왕국의 첩자들도 꽤 있었을 테니까.”
“거기다 발할라가 사우스 왕국과도 손을 잡았던 것 같아요.”
“발할라가……?”
콰앙—!
창파울로 단장이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내리쳤다.
그가 이끄는 순록의 마법기사단은 발할라뿐만 아니라 사우스 왕국군과의 싸움에서도 많은 병력들을 잃었다.
당연히 사우스 왕국군에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 설마 국경을 넘으려는 건가?”
“네. 이미 몇몇 군대가 출발한 것 같습니다.”
“그 빌어먹을 새끼들이…….”
“제가 가겠습니다.”
무그레날로 단장이 손을 들어 말했다.
창파 마법기사단이 그나마 많은 병력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청해서 사우스 왕국군을 막으러 가길 희망했다.
“이것을 고민하기 위해 단장님들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현재 우리 왕국은 인력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러 마법기사단이 사우스 왕국군을 막으러 가기엔… 아직 발할라의 수장이 붙잡히질 않아 불안한 상태입니다.”
“거기다 놈들은 마수들을 소환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만일을 대비해야 해.”
히스링 단장의 말에 다른 단장들이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생각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많은 것들이 안정된 상황이 아니었다.
함부로 자리를 비우기가 껄끄러운 상황.
그러나 누군가는 가야 했기에 무그레날로가 먼저 나섰던 것이다.
“왕국기사단은…….”
“왕국기사단은 이미 준비중입니다. 다만 그들만으로 사우스 왕국군을 막을 수 있을지…….”
헤르다임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거기에 더해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새로운 군단장을 선출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중심이 되어 줄 인물이 필요합니다. 전하께서는 본인이 나서서 군단장을 임명해도 되지만, 마법기사단의 사정은 단장님들께서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서로 대화를 통해 선출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군단장으로 히스링 단장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가장 먼저 시리아스 단장이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러자 아그리나 단장도 동의한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마찬가지의 의견이다. 지금 상황에서 히스링 말고 적합한 내정자는 없어.”
그나마 다른 후보로 거론될 수 있는 인물이 아그리나였다.
그러나 그녀 또한 군단장의 자리에는 히스링이 어울린다고 말하고 있으니, 더 이상 얘기를 나눠 봤자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히스링 단장의 의사였다.
다른 단장들도 만장일치로 히스링 단장을 꼽았다.
“후우… 내가 없을 때 다들 입을 맞추기라도 한 건가?”
히스링 단장의 말에 다른 단장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사태에서 히스링 단장의 역할도 컸습니다. 솔직히 말해 테르세우스님이 애써 만들어 주신 그 황금 같은 기회를… 저만 있었다면 결코 성공시켜 내지 못했을 겁니다.”
시리아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그때 자신만 있었더라면 초대형 마수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먹이지 못했을 것이다.
히스링이 있었기에 초대형 마수를 죽일 수 있었다.
거기다 여명 마법기사단의 활약은 대단했다.
별일 없었던 것처럼 달려왔지만, 히스링 단장은 귀족들이 모여든 곳에 나타난 수백 명의 발할라군을 단숨에 처리한 뒤였다.
그 과정에서 히스링뿐만 아니라 칸의 명성도 드높아졌다.
덕분에 어느새 사람들은 칸을 돌풍의 마도사라 부르고 있었다.
어쨌든 히스링은 이 자리에서 다른 단장들의 의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올라서야 할 자리다.
그렇다면 테르세우스를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자신이 올라서는 것이 나을거란 판단이었다.
자신이 군단장이라는 무거운 자리를 이어받아 그 뜻을 온전히 잇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테르세우스가 자신에게 잘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이유가 어쩌면 이것을 염두해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었다.
‘그 사이 더 훌륭한 녀석들이 나타나 내 앞에선다면… 얼마든지 군단장의 자리를 맡기고 물러나겠다.’
히스링은 가장 먼저 칸을 떠올렸다.
그 녀석이라면 분명 미래의 군단장 재목이었다.
이번 사태만 해도 그랬다.
칸은 히스링 못지 않은 빠른 판단력과 과감한 행동으로 다른 마법기사단원들의 마음을 훔쳤다.
거기다 칸은 전투 내내 수많은 적들을 앞에 두고서도 용감히 맞서 싸웠다.
그 카리스마가 사람들을 이끌었다.
물러섬 없이 항상 앞장서 싸우다보니 다른 이들도 어느새 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웨스트 왕국과의 전쟁 때부터 봐 왔지만… 물건인 녀석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히스링을 살피던 헤르다임이 빠르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럼 히스링 단장님이 차기 군단장에 오르는 것으로 전하께도 말씀 전하겠습니다.”
다른 단장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견은 없다.
이어 헤르다임이 다른 안건을 꺼냈다.
“이번에 백상 마법기사단이 사실상 회복 불가능 수준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장님인 아칼님을 비롯해 부단장 제인스님 그리고 다른 선임 마법기사들까지 모두 마수와의 싸움에서 전사했습니다.”
“제기랄… 대체 얼마나 강한 마수가 나타났었으면… 아칼이랑 백상 마법기사단이 그런 피해를 입었느냐는 말이야…….”
“그나마 아레나님과 그 수행인분이 아니었다면 전멸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아… 그 소식은 들었다. 전 홍련의 단장인 아레나님이 생환하셨다고…….”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지?”
“프로메테 가문에 있습니다. 그곳 또한 이번에 피해를 크게 입었거든요.”
“알지… 5대 가문답게 프로메테 가문은 선두에 나서서 싸웠다고 들었다.”
프로메테 가문의 가주 크리울로스는 발할라가 나타나자마자 가문의 사병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그 덕분에 프로메테 가문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은 더욱 달라져 있었다.
프로메테 가문뿐만이 아니었다.
약자들을 지켜 주고 강자들과 맞서 싸운 모든 귀족들에 시민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귀족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이스트 왕국에서 흔히 5대 가문이라 일컫는 프로메테 가문, 오르페 가문, 레프레시아 가문, 오스카 가문, 크실리아 가문은 모두 전장의 선두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야말로 귀족중의 귀족이라 입을 모으고 있었다.
다섯 가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프로메테 가문이었다.
하이드라가 날뛴 곳 가까이에 프로메테 가문이 있었던 것도 문제였다.
거기다 그들은 발할라를 제압하는 데도 앞장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제 5대 가문에 변동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누군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헤르다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프로메테 가문이 다시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거기다 아레나님 한 명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프로메테 가문은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흥. 그 여자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긴 하지.”
아그리나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가 인정하는 유일한 라이벌이 바로 아레나였었다.
프로메테 가문에 아레나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그녀가 살아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벌써부터 많은 가문들이 프로메테와 줄을 잇기 위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을 정도니까.
“어쨌든 백상 마법기사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섬광 마법기사단도 재기능이 어려우니… 그 자리를 대신할 인재들이 필요하겠군.”
“예?”
“그게 무슨…….”
“새로운 단장이라도 임명하겠다는 말입니까?”
아직 정식으로 임명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곧 군단장으로 올라설 히스링이었으니 아그리나는 자연스레 말을 높여 주었다.
그녀가 솔선수범해서 태도를 바꾸니 다른 단장들도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 새로운 단장들을 임명할 생각이다.”
“일부 부단장들을 단장으로 올리실 생각입니까?”
“아니.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어야겠지.”
히스링은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단장선발전을 열었다.
랑프레 같은 경우는 히스링이 군단장으로 올라서면서 자연스레 여명 마법기사단의 단장을 맡게 되었다.
이는 칸이 과감하게 단장선발전에 나가게 되면서 더욱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새로운 마법기사 단장을 선출하는 단장선발전.
그곳에 수많은 인파들이 모였다.
단장은 늘 부단장의 자리에 있던 이들이 승격함으로써 얻게되는 지위였다.
그런데 이렇게 대회방식으로 선출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당연히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파격적인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국왕에게 정식으로 군단장으로 임명받아 집무실에 앉아있는 히스링에게 헤르다임이 찾아왔다.
“예상하신 대로 칸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마법기사들이 지원했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군단장님의 아드님이신 자비토님은 지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비토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