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무법지대 벨제부트 (1)
새로운 단장이 선출되고 마법기사단도 변화를 맞이했다.
그동안 아시테르는 이스트 왕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런 아시테르의 곁에는 에스파와 세아츠리스, 그리고 가이우스가 있었다.
가이우스에게는 딸이 있으니 딸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아시테르의 말에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아시테르의 곁을 지켰다.
아시테르는 2년 동안이나 이곳저곳을 다니며 마법을 수련했다.
마소가 낮은 지대로 가보기도 하고, 비바람과 강풍이 몰아치는 지역에 가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위기에 처한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도와주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아시테르에 대한 소문이 왕국에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아시테르의 소식이 들려오니 애써 행방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진짜… 살판 났구나 살판 났어 아주.”
임무를 수행하던 라빈이 공허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도 따라나설 걸 그랬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라빈!! 빨리 치워라!!”
“네네에.”
그녀의 몸에서 튀어나온 뼈들이 물건을 나르는데 열심히였다.
아그리나 단장은 바쁘다고 자리에 없으니, 수련을 하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아그리나 단장한테 처맞으면서 배우는 게… 그게 또 재미가 나름 있는데.”
누군가는 과거의 영광이라 아그리나를 부르고 있지만, 그건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헛소리였다.
라빈이 생각하기에 아그리나는 결코 히스링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는 마도사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진짜 충격이었단 말이지… 내가 그렇게 쉽게 져 버리다니…….”
어쨌든 아그리나가 돌아올 때까지는 지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단장선발전이나 나가볼 걸 그랬나. 아으…! 그나저나 벌써 2년이나 지났는데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아시테르가 자리를 비운 2년 동안 다른 마도사들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부신 성장을 보인 것은 칸이었다.
칸은 2년 동안 완전히 자신만의 마법기사단을 꾸리는데 성공했다.
그가 창단한 돌풍의 마법기사단은 이곳저곳 활발히 활동하며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근래 생긴 마법기사단 순위에서도 눈에 띠게 올라서고 있었다.
알렌시아의 마법기사단도 착실히 단계를 밟아가는 중이었다.
일섬 마법기사단 또한 실력 있는 마도사들로 편성되어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신흥 마법기사단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히스링의 뒤를 이어 여명 마법기사단을 이끌게 된 랑프레도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히스링.”
“무슨 일인가 랑프레.”
“따로 작전을 수행할 인원들이 필요해.”
“알겠다.”
피곤함에 눈사이를 손가락으로 짚은 히스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장에 올라선 이후 단 한 번도 쉬는 날이 없었다.
휴식을 취하기엔 너무나도 할 일이 많았다.
“당신… 너무 무리하는 것 아냐?”
랑프레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히스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괜찮다는 듯 히스링이 손을 저어보였다.
“그나저나… 이제그만 불러들일 때가 되었군.”
히스링이 책상 위에 놓아진 서류를 바라보았다.
차기 마법기사단장으로 꼽아 놓았던 아시테르의 신상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한편, 아시테르는 마녀숲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흐음… 오랜만이네 이곳도.”
주변을 둘러보던 아시테르가 환하게 웃었다.
제법 익숙한 장소들이었다.
“주군과 마주쳤던 장소로군요.”
일전에 가이우스와 함께 마녀들을 도와주었던 장소였다.
가이우스도 감회가 새로운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시선에 들어오는 곳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벨제부트에도 상당히 성가신 인물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이우스의 말에 아시테르도 기억을 떠올렸다.
“근데 여기는 왜 온 거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시테르의 시선이 먼발치 보이는 벨제부트에 머물렀다.
무법지대라 불리는 벨제부트.
죄를 지은 자들의 도피처로 불리는 곳이기도 했다.
근래 더 많은 사람들이 벨제부트로 유입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아시테르가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구슬을 본 가이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구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본 것이다.
“주군… 그것은…….”
“오랜만이죠?”
아시테르가 망설임없이 구슬을 깨 버렸다.
한두번이 아닌 듯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구슬이 깨지고 환한 빛무리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뭐야? 뭔데 이게?”
구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에스파와 세아츠리스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이제 곧 손님이 올 거야.”
그가 말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아시테르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나요 아시테르님.”
“어서와요 프레이아.”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가이우스의 옛 수하 프레이아였다.
거기다 지금은 가이우스의 딸인 릴리아를 보살펴 주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아시테르는 릴리아를 르네마리아에 부탁할 때 프레이아도 미리 그곳으로 보내 놓았었다.
그녀를 르네마리아로 데려오기 위해 사르바타와 루기아 가문이 나서 주었다.
아시테르의 부탁이라면 거리낌없이 나서 주는 루기아 가문과 르네마리아 사람들 덕분에 프레이아를 발할라에서 빼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거기다 프레이아가 데려 온 몇몇 사람들은 과거 아시테르에게 도움을 받았던 빈민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주어 손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디서 어떻게 들은 것인지 빈민가나 하층민들에게는 이미 성녀처럼 여겨지고 있던 마르체니 공주마저 나서준 덕분에 일은 더욱 손쉽게 흘러갈 수 있었다.
어쨌든 아이를 데리고 르네마리아에 도착했던 가이우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알고 프레이아가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그녀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은 후에야 가이우스는 모든 것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프레이아 네가 어째서 이곳에…….”
“실은 전부터 아시테르님께서 부탁하셔서 이곳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거든요.”
“벨제부트에 대해?”
“네.”
“자아, 그럼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곳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말이에요.”
아시테르의 부탁에 프레이아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벨제부트는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받아들여 주는 곳이었다.
무슨 죄를 지었건, 과거 무슨 신분이었건 상관없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일뿐.
하지만 한 가지.
“벨제부트를 지배하는 가장 큰 규칙이 있어요.”
“그게 뭔데요?”
“강한 힘을 지닌 사람이 권력을 얻는다는 것.”
“우와… 그것 참… 날것 그대로의 사고방식이네…….”
에스파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래도 다른 이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규칙일 터다.
다른 왕국은 태어날 때부터 귀족인 자들이 권력을 갖는다.
하지만 벨제부트는 달랐다.
그들은 힘이 있어야 남들의 위로 올라서는 것이 가능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이라 말할지 몰랐다.
“단순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로군요.”
“에…? 그럼 벨제부트의 지배자란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강자라고 해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라……?”
“네. 벨제부트 지배자의 이름은 카이드. 그 출신이 어디인지, 무엇을 하다 온 사람인지 모든 것이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악명 높은 벨제부트를 오랫동안 발밑에 둘만큼 강자라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카이드의 밑에는 세 명의 직속 부하가 있습니다.”
“강한가요?”
“네. 그들도 강합니다.”
“하긴…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도 쉽게 여길 못 건드리는 거겠지… 좋아! 그럼 그냥 우리도 돌아갈까? 아시테르…….”
에스파가 입술을 씰룩이며 시선을 돌렸다.
불안하다.
아시테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불안한 기운이 온몸에 감돌았다.
그리고 이런 불안한 감정은 늘 들어맞았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그때 세아츠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설마 겁이라도 집어먹은 건가요?”
“나? 내가? 에, 에헤이. 그럴 리가 있나……!”
말과 다르게 에스파의 동공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곳저곳 움직이고 있었다.
어색해진 그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이우스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아시테르는 이미 벨제부트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2년 동안 가까이서 지켜봐온 덕분인지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벨제부트로 향하시겠다면 따르겠습니다.”
“아니 근데 아시테르! 네가 벨제부트로 꼭 가야할 이유는 없잖아…? 대체 할 일이라는 게 뭔데?”
“있어. 가야 할 이유.”
“그게 뭔데?”
“요즘들어 벨제부트의 행동이 더욱 심해지고 있어. 그러니까 이들을 잠재울 필요가 있어.”
“아니 그니까 그걸 왜 우리가 하냐고오오…….”
“응? 그야 우리밖에 할 사람이 없잖아?”
새삼 뭘 묻냐는 표정에 에스파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시테르는 아마 일전의 일을 염두해 두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벨제부트의 사람들이 이스트 왕국의 고아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기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갈 곳 잃은 사람들을 데려와 강제로 일을 시키거나 이스트 왕국에서 금지하는 약물들을 팔아넘기기도 했다.
무법지대답게 그들은 돈이 되는 일과 자신들의 쾌락을 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서슴없이 나섰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아시테르 일행이 몇 번 목격한 것이다.
벨제부트 때문에 이스트 왕국이 입는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마법기사들은 여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들의 우선순위에 이곳의 일들은 밀려나 있었다.
그보다는 더욱 심각한 문제인 사우스 왕국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2년 동안 사우스 왕국은 간을 보듯 이스트 왕국의 국경을 슬쩍 건드리고 있었는데, 언제 본격적으로 움직일지 몰랐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스트 왕국은 그야말로 험난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쨌든 왕성과 기사단의 사정이 이런지라 아시테르는 자신이 직접 돌아다니며 도울 수 있는 부분들은 돕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련을 게을리 하지도 않았다.
곁에 세아츠리스와 에스파, 가이우스는 아시테르의 훌륭한 연습 상대가 되어 주었다.
거기다 극악한 지역들을 찾아다니다보니 절로 깨닫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지났으니 아시테르뿐 아니라 그 일행들도 덩달아 강해져 있었다.
“요즘 들어 발할라가 가고 벨제부트가 왔다는 말까지 돌아다니고 있어요.”
거기서 프레이아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쿠웅―!
“꺄아아악―!!”
그때 먼발치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몸을 움직였다.
가장 빠르게 반응하고 움직인 것은 놀랍게도 에스파였다.
그는 손에 마력으로 만든 활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여간…….”
겁먹은 척 할 때는 언제고 에스파는 벌써 눈빛부터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잔뜩 헤진 옷을 입은 여인이 남자들에 둘러 쌓여 있었다.
그녀를 본 세아츠리스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세아츠리스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타샬리아…….”
바닷물을 닮은 푸른 머릿결을 늘 찰랑거리며 걸어 다니던 타샬리아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운 머릿칼은 어디 갔는지 싹뚝 잘려 있었다.
거기다 그동안 굶고 지낸 것처럼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아름답고 고고해 보였던 그녀는 어딜 가고 이제는 힘없고 가녀린 한 명이 자리해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주위 사내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