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다전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세아츠리스가 차분한 어투로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후드 안에 감춰져 있던 얼굴이 언뜻 비춰졌다.
세아츠리스의 얼굴을 확인한 카이드가 순간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와아… 태어나서 당신처럼 예쁜 사람은 처음 봐…….”
딱 봐도 첫눈에 반한 표정.
카이드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대뜸 세아츠리스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첫눈에 반했다! 나의 여자가 되어라!”
“거절합니다.”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에 카이드도 적잖은 충격을 먹은 표정이었다.
자신이 누군가?!
악명 높은 벨제부트의 지배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이곳에 사는 이들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눈에 들으려 노력했다.
그게 아니면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다.
심지어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헌데 눈앞의 여인은 너무나도 매몰차게 자신의 말에 거절의 뜻을 밝혔다.
마치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뭐…?! 진심이야……?”
믿을 수 없다는 듯, 카이드가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흔들리는 그의 동공이 대지를 훑고 지나갔다.
“이… 이유가 뭐지?”
“…이유가 필요한가요?”
“나를 거절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냐?!”
“그냥 싫어요. 거기다 그쪽은 제 스타일도 아니고요.”
쿠웅!
묵직한 무언가가 카이드의 마음을 내리찍었다.
준비할 새도 없이 마음에 연타가 들어왔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보다 그냥 싫다는 이유가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럴 수가… 그게 거절하는 이유라니…….”
잠깐, 그래 이곳은 벨제부트.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갖는 자신의 세상이었다.
“너희들은 지금 벨제부트 안에 있잖아. 그럼 이곳의 룰을 따라야지. 내가 너를 이겨서 갖겠다!”
카이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여자를 얻겠다고 저렇게까지 하는 카이드를 보며 란니발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아츠리스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는데?”
그녀의 시선을 읽은 카이드가 단번에 이들의 관계를 파악해 냈다.
“네가 이 여자를 지키는 호위쯤 되나보지?”
“엥? 저요?”
에스파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세아츠리스의 시선은 아시테르에게 닿아 있었지만, 카이드는 엉뚱하게도 그 사이에 있던 에스파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 너! 그럼 승부다! 내가 너를 이긴다면 저 여자를 갖겠다.”
“아무래도 잘못 짚으신 것 같은데…….”
“뭐?! 그럼 이쪽인가보군!”
카이드의 시선이 이번엔 가이우스를 향했다.
처음 보자마자 그의 다부진 체격이 눈에 들어오긴 했었다.
마력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포스가 있는 인물이었다.
카이드의 시선을 받은 가이우스가 조용히 아시테르쪽을 쳐다보았다.
“카이드… 그쪽이 아니잖아 그쪽이…….”
란니발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모두가 아시테르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카이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아시테르는 이들 중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세아츠리스에게서는 감출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마력이 느껴졌다.
가이우스에겐 척 봐도 강해보일만큼 강렬한 포스가 있었다.
옆에 있던 에스파는 딱 봐도 실력을 감추고 있는 고수 느낌.
잘 갈무리 되어 있는 마력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아시테르는 정말 별게 없었다.
그냥 마력 조금 있는 평범한 인간.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카이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네가 대장이었냐?”
“그렇습니다만.”
“그랬구만… 이것 참 특이하네. 그럼 하나만 묻자. 네가 이 사람들의 대장인 이유가 뭐냐? 신분이 높은 건가?”
“글쎄요.”
“뭐 대답하기 싫으면 됐다. 어차피 네가 벨제부트에 있는 이상. 이곳의 룰을 따라야 하니까. 승부하자! 대장끼리 곧바로 승부를 결판지어 볼까?”
다짜고짜 승부를 외치는 카이드를 보며 란니발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림자처럼 곁에 붙어 있던 리제라가 입을 열었다.
“카이드님.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저들이 카이드님과 곧바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 내가 하려던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네 마음은 알겠는데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라고!”
“그랬어……?”
“카이드님과 저희 말고도 아래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이기고 와야 카이드님께 도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근데 굳이 그럴 필요 있어? 내가 바로 대장인 이 녀석을 잡으면 되잖아?”
카이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냥 시간 낭비일 뿐.
차라리 그렇게 하는게 편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우리는 싸운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막 정해 버리네…….”
가만히 듣고 있던 에스파가 슬쩍 말을 꺼냈다.
그때서야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카이드가 손바닥을 쳤다.
“맞네. 그렇네……?”
카이드가 몸을 돌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이는 아시테르였다.
“혹시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냐?”
카이드의 물음에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카이드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원하는게 뭔데?! 우리 그걸 걸고 싸워 보자! 네가 이기면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 줄게. 대신에 내가 이기면 저 여자를 갖겠어. 우리 저 여자를 걸고 싸워보는 거지!”
“세아츠리스는 물건이 아니에요.”
“아, 그건 그렇지. 그러면 음…….”
“하지만 당신과는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었습니다.”
“오? 뭐야. 갑자기 화끈하게 나오네?”
“제가 당신을 이기면. 이곳 벨제부트를 갖겠습니다.”
아시테르의 말에 란니발과 리제라가 동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조금 전 아시테르의 말이 어지간히도 거슬렸던 모양이다.
“지금 저 건방진 새끼가 뭐라고 한 거냐?”
“저도 잘못들은게 아닌가 싶네요. 감히 지금…….”
뒤돌아선 카이드가 그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잠깐만 진정해 봐 둘 다. 딱히 저 친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 내가 지면 벨제부트는 당연히 저 친구의 것이 된다고.”
벨제부트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카이드가 아시테르에게 패배한다면 자연스레 아시테르가 벨제부트의 다음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딱히 손해볼 것도 없는 조건이었다.
“근데 괜찮겠어? 나뿐만 아니라 내 수하들도 나름 강한데. 나랑 싸우려면 내 수하들부터 쓰러트려야 한 대. 이건 내가 아니라 쟤네들이 주장하는 말이야.”
카이드가 아시테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아시테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료들도 강합니다.”
“크흠… 그래……?”
카이드가 면면들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란니발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카이드. 네가 나설 일은 없을 거다. 우리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맞습니다. 카이드님께서 나서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들에게 자신들의 주제를 알려주도록 하죠. 아니면 다른 녀석들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다전제로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리제라가 작은 단검을 꺼내들며 말했다.
마침 다른 지파장 중 한 명인 렐린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머머… 재밌는 일이 벌어지려 하나보네요.”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웃었다.
그녀의 시선은 세아츠리스를 향해 있었다.
렐린도 느낀 것이다.
세아츠리스가 갖고 있는 방대한 양의 마력을.
“흐음… 어떻게 생각해? 네 동료들과 나의 수하들이 싸워서 승부를 내는 것은. 만약 내 수하들이 진다면 깔끔하게 여자는 포기할게. 그것도 내 운명이다 생각하지 뭐.”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희가 카이드님께 승리를 안겨드릴 테니까요.”
“저기 얼빵해 보이는 녀석도 참가하라 해. 내가 아주 반 죽여 놓을 테니까.”
“너무 겁주지 말아요 란니발. 그러다 도망치면 어떻게 해요?”
“크흐흐, 그건 그것대로 재밌겠네.”
그들이 일부러 도발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도발은 아주 잘 먹혀들었다.
아시테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에스파가 아시테르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응? 왜 그래 에스파?”
“하자.”
“뭐?”
“하자. 그 다전제. 까짓꺼. 네가 나설 필요도 없게 만들어 줄게.”
에스파가 두 눈을 번뜩였다.
갑자기 그가 의욕적으로 나서자 세아츠리스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가이우스도 한발 앞으로 나섰다.
“저도 참전하겠습니다. 주군.”
관자놀이에 힘줄이 선 가이우스가 란니발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는 에스파도 마찬가지.
“감히 주군께 무례를 보이다니.”
“같은 마음입니다 가이우스 씨. 내 친구를 욕해……?”
두 사람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본 세아츠리스가 미소를 보였다.
그녀 또한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좋아요. 저도 참전할래요.”
“에?! 당신도 참전한다고요?”
놀란 것은 카이드였다.
“아시테르 오빠를 무시하는 것은 곧 저를 무시하는 것과도 같아요.”
“당연!”
“그렇지.”
에스파와 가이우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에 있던 렐린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럼 나도 참전하겠어.”
“레린 네가? 무슨 바람이 분 거냐?”
“그냥. 호기심이 들어서.”
레린이 세아츠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카이드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럼 이렇게 하자. 다섯 번의 승부를 겨루는 거야. 거기서 먼저 세 번의 승리를 거둔 쪽이 이기는 걸로! 그러려면 너네도 인원이 더 필요해 보이는데?”
마침 프레이아가 아시테르 일행이 머물 곳을 찾기 위해 따로 길을 나서는 바람에 이곳에 있는 인원은 정확히 네 명이 되었다.
그때 란니발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우리 선에서 끝날 텐데. 쟤네는 단 한 번도 못 이길거거든.”
“맞아요. 그냥 해도 돼요.”
란니발과 리제라의 기세가 바뀌었다.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들에게지지 않으려는 듯 에스파와 가이우스도 기세를 내뿜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참가 선수를 더 데려와라. 그래야 정당하게 싸우지.”
“흠…….”
“아무튼 일주일 뒤에 싸울 수 있는 선수를 더 찾아서 이곳으로 와라. 누가 와도 상관없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그럼 일주일 뒤에 보는 걸로 하자! 그때 아주 성대하게 싸워 주도록 할 테니까.”
카이드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시테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좋아. 기대할게. 참고로 내 수하들 꽤 강하거든? 알고 있어라.”
“제 동료들도 마찬가지라고 아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래, 그래. 아무튼 즐거움은 일주일 뒤로 미뤄두자고.”
카이드가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았건만 의외로 별탈 없이 끝나자 모여들었던 인원들이 아쉬움을 드러내었다.
“그나저나 제정신이 아닌 녀석들이네. 카이드한테 도전장을 내밀다니.”
“이번에도 카이드가 나설 일은 없겠지 뭐.”
“카이드님 밑에 있는 지파장들도 다들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니까.”
“란니발 한 명한테 다 정리될지도.”
그들의 수군거림이 아시테르 일행에게 대놓고 들려왔다.
에스파가 혀를 찼다.
“쯧…….”
“신경 쓰지 말아요. 에스파 오빠.”
“후후 이곳에 오니 우리들이 악인이 된 것 같군요.”
“저들에게는 우리가 불청객이니까요.”
“그나저나 우리가 누군지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이런 일부터 벌이다니… 정말로 벨제부트는 누구라도 상관없이 받아주는 곳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합니다.”
“뭐… 우리들에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에스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근데 나머지 한 명은 프레이아 씨로 하면 되나?”
“불가능해. 프레이아 씨는 숙소만 구해 주고 돌아갔을 거야.”
“왜? 어째서?”
“다른 해야할 일이 있다고 했거든. 그래서 내가 그러라고 했어.”
“아니 그럼 우리는 대체 누구를 데려와야…….”
주변을 둘러보던 에스파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있네 저기에? 마침 적당한 사람이.”
에스파가 누군가를 가리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