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일격
“응?”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
그는 바로 아시테르도 잘 알고 있는 자비토였다.
“자비토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뭐 따로 임무라도 왔나 보지. 그나저나 엄청 운이 좋았네.”
자비토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시테르나 칸과 함께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인물이 바로 자비토였으니까.
심지어 데미리우스의 말에 따르면 자비토는 창파 마법기사단에서 부단장의 자리까지 준다고 했건만 거절한 특이한 이력도 있었다.
어쨌든 부단장의 자리까지 내줄 정도면 그만큼 실력은 확실하다는 소리!
“무조건이다. 무조건이야!”
에스파가 단숨에 자비토의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에스파를 보며 자비토가 흠칫 놀랐다.
“뭐… 뭐야……?!”
“자비토!”
“왜? 아니 그보다 너희가 왜 여기에 있어?”
“그럴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와 함께 해 줘!”
“함께 해 달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다짜고짜.”
에스파가 좀 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잠자코 그 얘기를 모두 듣던 자비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근데 그걸 왜 도와줘야 하지?”
“그야… 우리는 동료잖아!”
“동료? 우리가? 서로 다른 마법기사단에 있잖아.”
“에헤이…! 이 친구가 말이야. 멀리 내다보고 크게 생각해야지! 그 마법기사단이 결국 이스트 왕국 아래에 있잖아.”
“그건 또 맞는 말이긴 해.”
자비토가 살짝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역시 안 돼겠어.”
“아니 이유가 뭐야?! 왜?”
“그냥 싫어. 내가 얻는 것도 없는데.”
아시테르를 의식한 말이었다.
그의 반응에 오히려 아시테르가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자비토가 아시테르를 질투하고 있다는 얘기를 에이브릴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본래 자비토는 라빈의 정혼자.
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겨 그 정략 결혼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지만, 어쨌든 자비토는 어렸을 때부터 라빈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빈이 아시테르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자비토도 그 모습을 지켜보다보니 자연스레 질투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아주 달콤한 유혹이 있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아시테르가 자비토에게 다가갔다.
그가 손짓으로 잠깐 귀를 빌려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뭐… 뭔데?”
“네게 얘기할게 있어서.”
“뭐? 네가 나한테 뭘…….”
그러면서도 자비토는 순순히 자신의 귀를 내어 주었다.
아시테르가 그의 귓가에 은밀한 말들을 속삭였다.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자비토가 놀라서 눈이 크게 떴다.
“저… 정말이냐?”
“정말이지.”
“진짜 네가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넌…….”
“괜찮아. 이해해 줄 거야.”
“후우… 네가 그렇게까지 해 주겠다니… 사실 알고보면 너도 썩 괜찮은 놈인지도 모르겠네…….”
어쩐지 자비토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아시테르가 무슨 말로 그를 유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비토는 이내 순순히 선수로 참가할 것을 승낙해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나가서 상대를 박살 내고 오기만하면 된다는 거지?”
“그렇지!!”
“오케이. 그럼 거래 성립이야.”
* * *
“승부는 다전제 방식이다. 5명의 선수가 참가할 수 있고 먼저 3승을 거두는 쪽이 이기는 거다. 뭐… 승리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승부에 나설 수 있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그러면 손쉽게 상대한테 승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 둬라.”
란니발이 다전제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못 보던 사내에게로 닿아 있었다.
‘급하니까 아무나 막 구한건가?’
시간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으니 따로 어딘가에 가서 선수를 구할 수도 없었을 터다.
그렇다고 연락을 취하기에도 가까이에 있는 도시가 없다.
결국 이곳 벨제부트에서 선수를 구했다는 얘기인데…….
‘내가 모르는 얼굴이면 뭐… 별로 신경쓸 필요도 없겠군. 하긴, 벨제부트에 있는 어느 미친놈이 우리와 상대하려 하겠어.’
카이드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은 없기 때문에 굳이 나서려 하는 녀석도 없을 것이다.
돈으로 구한다고 해도 과연 몇이나 나설까.
아무튼 못 보던 얼굴임을 확인한 란니발이 피식 웃었다.
누가 오든 상관없긴 했는데 더더욱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녀석이라 긴장이 풀리기까지 했다.
“그 사이 구경꾼들도 많이 몰려온 것 같은데?”
카이드와 그의 직속 지파장들이 싸운다는 얘기를 듣고 벨제부트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제일 처음 나서는 건 누구?”
신난 카이드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때 아시테르 쪽에서 나서기도 전에 카이드의 수하 중 한 명인 테이르한더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먼저 나서겠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어.”
“테이르한더 네가 먼저 나선다고?”
“내가 한번에 다 쓸어버렸다고 원망들 하지 말아라.”
테이르한더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한 덩치하는 그를 보며 에스파가 고개를 돌렸다.
덩치는 역시 덩치끼리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아시테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연스레 가이우스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주군께서는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그럼… 이기고 오세요.”
아시테르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가이우스의 강함은 아시테르도 잘 알고 있다.
그가 저 앞에 있는 테이르한더에게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테이르한더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가이우스의 앞에 섰다.
마침 그가 상대하고 싶은 상대도 가이우스였다.
가까이 마주서니 가이우스도 탄탄한 몸을 가진 거한격에 속하는데, 테이르한더가 가이우스보다 머리 하나 더 우뚝 솟아 있었다.
“가이우스 형님보다 더 키가 크다니…….”
“그래도 속 알맹이는 이쪽이 훨씬 더 단단하지 않을까요?”
“그럴 것 같기는 한데…….”
에스파와 세아츠리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자비토가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겠냐? 저 사람 딱 봐도 투사 같은데.”
“응. 괜찮아.”
“뭐야?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얘기하니까 내가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지네… 근데 저 사람은 마도사아냐? 뭣하면 내가 나서도 되는데.”
“괜찮아. 가이우스 씨는 강해. 그러니까 너도 한 번 지켜 봐.”
“저 아저씨가 강하다고……?”
자비토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가이우스를 바라보았다.
테이르한더가 가이우스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마도사냐?”
“그렇다.”
“크흐흐 나약한 마도사가 내 상대가 되겠냐?”
“물론. 그리고 마도사는 나약하지 않다만.”
“그러고 보니 너희 모두 마도사 같은데. 재미없는 조합이네.”
“생긴 것과 다르게 말이 많은 친구로군.”
가이우스의 말에 테이르한더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보통 자신 앞에 서면 으레 기가 죽게 마련.
하지만 눈앞에 있는 가이우스는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데?”
“나도 네놈이 날 내려다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군. 날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이다.”
“근데 이게……!”
콰아아!!
테이르한더의 주먹이 가이우스를 강타했다.
두 팔을 교차해서 테이르한더의 공격을 막은 가이우스가 몸을 움직였다.
마도사이긴 하지만 그는 무투 타입의 전투를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가이우스의 주먹이 테이르한더의 가슴팍에 꽂혔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이우스의 주먹이 멈췄다.
“흥. 마도사 따위가 내미는 주먹이 과연 이 몸에게 먹힐 것 같으냐?”
투사는 무릇 신체를 극한으로 단련하는 존재들.
어지간한 철검으로는 상처조차 못내는 게 투사의 신체건만.
하물며 마도사가 내지르는 주먹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가이우스의 주먹은 테이르한더에게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공격은 조금 달랐다.
가이우스의 팔을 타고 한꺼번에 흘러나간 마력이 테이르한더의 몸을 2차로 가격했다.
쿠웅―!
조금 더 커다란 소리와 함께 테이르한더의 몸이 밀려났다.
“호오…….”
묵직하기로는 이들 중 제일인 테이르한더가 밀려나다니.
지켜보던 란니발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카이드도 두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밀려났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테이르한더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 건방진 새끼가!!!”
분노한 그가 주먹을 내질렀다.
투기가 가득실린 주먹.
보통 마도사라면 그것을 피했을 것이다.
심지어 지켜보던 자비토도 가이우스를 향해 피하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가이우스의 선택은 달랐다.
그는 우직하게 서서 테이르한더의 주먹을 받아내었다.
“어리석은 놈!”
테이르한더가 연타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공격적인 투기가 빗발치며 가이우스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가이우스는 묵묵히 테이르한더의 공격을 받아 낼 뿐이었다.
그것을 본 란니발이 피식 웃었다.
“끝났군. 이 대결은.”
마도사와 투사의 싸움.
이것은 거리 조절이 관건인 싸움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괜한 객기 때문에 감히 테이르한더와 거리를 좁혔다.
그것이 커다란 실수였다.
테이르한더는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사정없이 공격을 쏟아 부었다.
“이제는 불쌍해 보일 지경이로군.”
“테이르한더에게 저렇게나 당하면 그냥 너덜너덜해지겠는데?”
“크흐흐흐, 나머지 놈들의 표정도 볼만하ㄱ…….”
다른 이들의 표정을 살피던 란니발이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저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평온했다.
딱 한 명.
오늘 처음 본 사내 혼자만 온갖 표정 변화들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다지 걱정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시테르는 두 사람의 싸움을 보며 웃고 있었다.
“동료가 저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데 웃어?”
“당하긴 뭘 당해?”
“뭐…? 카이드. 너도 지금 보고 있잖아. 테이르한더에게 저놈이…….”
“란니발. 상대를 낮잡아 보지 말고 똑똑히 봐. 지금 저게 어딜 봐서 당하는 거야?”
그때서야 란니발이 집중해서 가이우스와 테이르한더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아…….”
놀랍게도 빗발치듯 쏟아지는 테이르한더의 공격은 단 한 번도 가이우스에게 이렇다 할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다.
거기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치고 있는 것은 무차별로 공격을 쏟아내는 테이르한더였다.
“말도 안 돼! 테이르한더의 공격은 한 방 한 방이 무겁고 묵직해! 근데 그걸 몸으로 받아 내면서 버틴다고?”
“저 사람. 몸에 마력을 둘렀어. 근데 그게 좀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러자 잠자코 전투를 지켜보던 렐린이 입을 열었다.
“점점 마력의 양이 더 많아지고 있어.”
“뭐?”
“말 그대로야. 시간이 흐를수록 저 사내의 마력 량이 더 커지고 있다고.”
“그게 무슨…….”
“움직인다.”
카이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이우스가 쏟아지는 공격들 틈으로 발을 내밀었다.
테이르한더의 공격은 분명 묵직하고 무거웠다.
하지만 가이우스가 버텨 내지 못할 공격들은 아니었다.
고통을 마력으로 축적시키는 특이한 체질.
가이우스는 현재 몸에 엄청난 마력을 끌어 모은 상태였다.
후우우웅―!!
엄청난 마력을 담은 가이우스의 주먹이 움직였다.
그것을 본 테이르한더가 눈을 빛냈다.
“멍청한 놈! 감히 투사와 정면으로 맞붙을 생각을 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상대가 방어만 하는 탓에 대결이 지루해지던 차였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테이르한더가 가이우스에게 공격을 쏟아 내었다.
“안 돼 테이르한더! 피해라!!!”
그때 카이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버린 뒤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가이우스의 주먹이 마력을 폭발시켰다.
테이르한더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 그의 눈앞에 보였던 것은 커다란 바위였다.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것 같은 바위!
자신은 절대 저것을 깨부술 수 없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테이르한더의 투기가 와장창 깨져 버리고 말았다.
투기를 부수고 나아간 가이우스의 주먹이 그대로 테이르한더까지 날려 버렸다.
파콰아아앙―!!
거센 풍압과 함께 테이르한더가 핏물을 흩날리며 날아가 버렸다.
“끝났군.”
단 일 격.
가이우스는 단 일격으로 테이르한더를 쓰러트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