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두 번째 대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테이르한더가 누구인가?
투사들의 대장으로 있는 이가 바로 테이르한더였다.
그렇다고 이곳 벨제부트에 온 투사들이 약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험난한 벨제부트에서 어깨에 꽤나 힘을 주고 다닐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투사였다.
그들은 단련된 신체로 막아서는 상대를 부숴 버릴 뿐이었다.
그리고 늘 그들의 선두에 있는 자가 바로 테이르한더였다.
헌데 그런 테이르한더가 겨우 일격에 당해 버리고 말았다.
“믿을 수 없군…….”
“대체 뭐에요? 저 근육덩어리…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리제라가 카이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카이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 남자가 강한 거야.”
“에? 럭키 펀치 같은 것 아니에요?”
“아니. 그런 게 통할 정도로 테이르한더는 약하지 않아. 거기다 테이르한더는 방심하지도 않았어. 매번 최선의 공격을 했다고.”
“흐음… 이거 상대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되겠군…….”
“그럼 이번에는 제가 나서도록 하죠.”
마도사 렐린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딱붙는 옷차림을 한 그녀가 마법지팡이를 들었다.
“저건…….”
“에? 어쩐 일로 렐린님이 지팡이를 들고…….”
“그만큼 상대가 강할 거라 생각한 건가?”
“아니면 초반부터 끝낼 생각일 수도 있지.”
그들이 뒤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렐린의 시선은 세아츠리스에게로 가 있었다.
“내 상대는 당신 아닌가요?”
“원한다면.”
렐린과 시선을 마주한 세아츠리스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가까이서보니 180은 족히 넘을 법한 키였다.
장신의 세아츠리스를 보며 렐린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봐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하는 게 좋아요.”
“봐주는 건 당신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세아츠리스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렐린이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마도사의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마석이 박힌 지팡이였다.
더군다나 마력뿐만 아니라 마법의 위력 또한 증가한다.
쿵!
지팡이가 대지를 때렸다.
렐린을 중심으로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평범한 마도사들이 봤다면 놀라 입을 떡하니 벌렸을 법한 장면.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평범한 마도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렐린의 마력은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 수준.
모두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렐린의 마법을 지켜보았다.
그때 세아츠리스도 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시작된 마력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순식간에 거센 파도를 만들어 내었다.
쿠르르르르릉―!!!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몰아친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마력을 상쇄해 버렸다.
세아츠리스는 단순히 마력의 양으로만 렐린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역시나 세아츠리스의 마력량이 범상치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렐린이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그녀의 마력이 환한 빛을 띠며 세아츠리스쪽으로 향했다.
쩌저정―!
환한 빛을 내뿜던 마력이 곧 얼어붙기 시작했다.
완성된 얼음덩이들이 일시에 세아츠리스를 공격했다.
파쾅! 파바바방―!!
대지를 뚫고 올라온 가시덤불들이 세아츠리스를 보호했다.
그녀의 마법을 확인한 렐린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특이한 마법을 사용하네.”
여기저기 올라온 식물 줄기들을 보며 렐린이 눈을 빛냈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란니발도 미소를 보였다.
“벌써 상대를 파악했나 보군.”
“후후 아쉽지만 일반적인 마도사들은 절대 렐린을 이길 수 없어요.”
리제라도 렐린에게 강한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렐린은 마도사들 중에서도 사기적인 힘을 지녔다.
바로 네 가지의 원소를 다룰 수 있다는 것.
그녀의 마력은 특이하게도 네 가지 원소로 속성 변환이 가능했다.
이것은 곧 렐린에게 커다란 이점을 안겨 주었다.
세아츠리스의 마법을 확인한 렐린이 곧바로 마법을 바꾸었다.
화르륵―!
렐린의 주변으로 불덩이들이 만들어졌다.
“식물을 다루는 마법이라… 그럼 당연히 화염과는 상극이겠군요.”
“…….”
얼음에 이어 불을 다루는 렐린을 보며 세아츠리스도 조금은 놀란 듯 보였다.
상대가 당황했다고 생각한 렐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불꽃 세례가 세아츠리스를 향해 퍼부어졌다.
자욱한 연기와 함께 세아츠리스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지만 렐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크하하하!! 잘한다 렐린!! 끝내 버려!!”
“좋아요!!”
뒤편에 있던 란니발과 리제라가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카이드의 얼굴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에도 공격이 안 통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만큼 공격을 퍼부어댔으면 불길이 치솟아 올라야 하는데 먼지만 피어나고 있었다.
렐린이 지팡이를 흔들었다.
그러자 대지가 몸을 일으켜 세아츠리스를 공격했다.
콰아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세아츠리스가 있던 곳이 돌무더기로 뒤덮였다.
“뭐야 별 것 아니었군요.”
렐린이 잠잠해진 상대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돌무더기가 경련을 일으키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파콰아아앙!!
커다란 가시덤불이 하늘로 승천하듯 솟구쳐 올랐다.
이어 모습을 드러낸 세아츠리스가 멀쩡한 얼굴로 렐린을 쳐다보았다.
가볍게 먼지를 털어낸 그녀가 렐린을 향해 물었다.
“끝났나요?”
“…….?”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에 렐린도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는 렐린뿐만이 아니었다.
란니발과 리제라의 표정도 자연스레 굳어 버리고 말았다.
“허… 허세 부리지마!!”
렐린이 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환한 빛무리가 바람의 칼날을 이루며 세아츠리스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세아츠리스의 가시덤불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여러 가지 속성을 다루는 마도사라… 확실히 매력적이긴 하네요.”
이어지는 렐린의 공격들을 모두 막아 낸 세아츠리스가 무덤덤한 시선으로 렐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공격을 막아 내는 세아츠리스를 보며 렐린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녀는 지금 세아츠리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만큼이나 공격을 쏟아부었는데 절대 멀쩡할 리 없었다.
“그 가면을 벗겨 주마……!”
렐린이 지팡이와 함께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늘 높이 커다란 불덩이가 만들어졌다.
그것을 본 세아츠리스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받아라아아!!!”
앙칼진 외침과 함께 렐린이 지팡이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지팡이와 함께 커다란 불덩이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 불길로는 어림도 없어요.”
세아츠리스의 가시덤불이 커다란 새장을 만들었다.
콰드드득―!!
이어 새롭게 솟아오른 덤불들이 단숨에 렐린을 옭아매 버렸다.
“이게 무슨…….”
잠깐 사이에 붙잡혀 버린 렐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 그녀가 만들어 낸 불길이 새장의 천장에 닿았다.
콰아앙!!!
한 차례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방대한 양의 마력이 소모된 만큼 불덩이의 위력도 거셀 것이다.
“미친… 둘 다 죽을 생각인건가?!”
렐린이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곧 새장을 부수고 불길이 떨어져 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한참이 지나도 이곳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렐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쪽으로 향했다.
하늘을 촘촘하게 매운 가시덤불들이 보였다.
“자신감이 지나치네요. 겨우 그런 불길로 내 마법을 태울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어느새 렐린의 코앞까지 다가온 세아츠리스가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렐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식물 마법은 화염 마법에 약해! 화염에 닿으면 당연히…….”
“그건 당신의 마법이 저와 동급일 때의 얘기죠. 수준이 한참이나 뒤떨어지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뭐…? 지금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낮은 수준의 마도사라 이거냐……?”
“그럼. 당신이 마녀보다 뛰어난 마도사라도 되는 줄 알았어?”
세아츠리스의 눈동자를 마주 본 렐린이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히끅!
렐린이 너무 놀라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세아츠리스가 자신을 마녀라고 했다.
“마녀. 마녀였어 당신……?”
세아츠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세아츠리스가 만들어낸 새장 안.
바깥에 있는 이들은 여기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 테였다.
렐린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세아츠리스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어째서 마녀가 인간들과 함께 있는 거야……?”
“그게 왜 말이 안 돼죠? 마녀들은 인간과 함께 있으면 안 되나요?”
“하지만 너희 마녀들은 인간을 혐오하잖아?”
“글쎄. 그것도 마녀 나름이겠죠.”
세아츠리스가 몸을 돌렸다.
가시덤불에 속박당한 렐린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 두 번째 대결마저 패배해 버리고 말았다.
가이우스에 이어 세아츠리스까지.
둘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자비토가 자연스레 아시테르쪽을 쳐다보았다.
대체 뭐하는 놈이 길래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있단 말인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가이우스도 세아츠리스도 마법기사단의 단장급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아시테르의 단짝으로 소문난 에스파도 결코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니… 나참 어이가 없네.’
이미 여기 있는 네 사람만으로 어지간한 기사단쯤은 가볍게 격파해 낼 것 같았다.
“크아아아―!! 바보같은 것들! 결국 내가 나서야겠구나!”
결국 지켜보다 못한 란니발이 직접 나섰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기다란 낫을 든 그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란니발의 등장에 에스파가 움직이려 했다.
자연스레 그의 상대가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모양.
하지만 자비토가 에스파의 앞을 막아섰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나한테 양보해 줄 수 있겠어?”
“엥? 그치만…….”
“나도 내 밥값은 해야지. 그리고 여기서 이겨둬야 저 녀석도 나중에 피해 나갈 구석이 없지.”
자비토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아시테르가 방긋 웃었다.
“에이, 내가 그럴 리가 있나!”
“혹시 모르잖아.”
“아니야. 약속은 지킬게!”
“그래도 내가 나선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두 차례나 대단한 수준의 싸움을 봐서 그런지 자비토도 저도 모르게 몸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테이르한더와 렐린 모두 수준 높은 강자들이었다.
다만 그들을 이긴 가이우스와 세아츠리스가 터무니없이 강했을 뿐이다.
“나도 내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데.”
자비토가 가볍게 몸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란니발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왜 네가 나와?”
“내가 나올만 하니까 나왔겠지.”
“하?”
자비토의 말에 란니발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당연히 뒤에 있는 에스파나 아시테르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이건 완전히 예상외였다.
심지어 란니발은 지금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네깟놈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건가.. 하… 어이가 없구만.”
란니발이 기다란 팔로 낫을 들어올렸다.
고오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마력에 자비토도 대놓고 마력을 폭발시켰다.
마주한 두 사람이 시선을 교차했다.
팡!
파방―!!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란니발이 기다란 낫을 휘두르자 자비토의 마법이 낫을 때렸다.
튕겨나간 낫이 크게 회전했다.
휘우웅―!!
파쾅―!!
회전이 반바퀴에서 멈춰 버리고 말았다.
자비토의 마력에 튕겨져 나간 낫을 보며 란니발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