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아일리시의 일상
한숨을 내쉬는 알렌시아의 곁으로 부단장인 소르제가 다가왔다.
“무슨 고민이라도 생겼나 봅니다? 아니면 애인이 보고 싶으신 걸까요?”
“오늘따라 보고 싶긴 하네.”
“그러고보니 못 본 지 오래되지 않았나요?”
“그렇긴 하지? 나도 그 친구도 힘든 시기였으니까…….”
알렌시아는 일섬 마법기사단이 자리 잡기까지 최선의 노력을 가했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마법기사단에 열심히 였는지는 일섬 마법기사단원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많은 성과들을 이루어내며 인정을 받고 있지만, 그 이전에 일섬 마법기사단이 자리 잡는 과정은 그야말로 험난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아시테르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힘들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얼굴이 아시테르였으니까.
하지만 아시테르 또한 알렌시아만큼이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그에게 기댈 수 없었다.
거기엔 아시테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본인의 자존심도 한몫했다.
그렇게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는 각자의 시간을 가져왔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함께 멀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이 아시테르와 알렌시아 사이에는 크게 작용하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함부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멀리 있는 아시테르와 다르게 늘 가까이서 그녀를 챙겨주는 칸의 존재 때문에 알렌시아의 마음도 싱숭생숭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칸도 알렌시아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마법기사단을 창단해 꾸려갔기 때문에 그녀와 대화 주제마저도 비슷했다.
서로 같은 공감대가 있다 보니 은근하게 의지가 되는 면도 있었다.
심지어 칸은 이전부터 알렌시아에게 한결같이 마음을 표현해 왔던 사내였다.
다만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와 연인 관계임을 알고 나서부터는 직접적인 표현이나 대담한 행동들은 피해 왔었다.
허나 그녀를 향한 마음은 아직 남아 있었기에 남모르게 그녀를 챙겨 주었을 뿐이다.
알렌시아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문제는 그런 칸의 마음이 알렌시아의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더욱더 아시테르가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러지말고 잠깐이라도 보고 오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럴 시간이 어딨어.”
“이곳에 저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칸 단장님과 돌풍 마법기사단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그래도 괜찮을까?”
“예. 문제 없습니다.”
소르제가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알겠어. 그럼 다음 전투까지만 끝내고.”
“그렇게 하십시오.”
소르제가 웃으며 답했다.
* * *
하트 군대의 대장이자 트럼프 중 한 명인 아일리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작금의 상황이 쉽사리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당장 그녀가 적들의 손에 붙잡힌 것부터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주변에 몇 만의 군세가 함께 있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자신이 지금은 적진 한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거기다 현재 몸은 마법으로 깔끔하게 결박당한 상태였다.
그녀를 이곳까지 잡아온 범인(?)이 앞으로 다가왔다.
“깨어나셨나요?”
“여기는 어디지?”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일리시가 물었다.
잔뜩 경계하고 있는 만큼 그녀의 입에서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리 없었다.
“여기는 이스트 왕국 중심에 위치한 프레이라는 곳입니다.”
“프레이……?”
프레이라면 아일리시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이스트 왕국 수도에서도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곳.
“날…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고문이라도 가할 건가? 하지만 그래 봤자 소용없어.”
“고문이요?”
아시테르가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의 반응을 살핀 아일리시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그 반응은? 놀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적들의 손에 붙잡힌 대장이라서?”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고문을 가할 일은 없을 겁니다.”
“어째서? 내가 누군지 알고 붙잡아 온 거잖아?”
“예. 물론이에요.”
“근데 왜……?”
“우리는 당신에게서 뭘 알아내려고 붙잡아 온 게 아니니까요.”
아시테르의 말에 그제야 아일리시도 자신을 왜 붙잡아 왔는지 이해했다.
“정보를 알아내기 위함이 아니라면 나를 통해 거래를 하는 게 목적이었구나…….”
“바로 그렇습니다.”
“근데 그렇게 나한테 곧이곧대로 얘기해도 되는 거야?”
“문제 없을 거에요.”
“어째서? 내가 우리 왕국에 정보를 흘릴 수도 있잖아?”
“후후, 글쎄요.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자신 있어 하는 아시테르의 태도에 오히려 아일리시가 언짢은 듯한 얼굴을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아시테르는 아일리시를 감옥에서 꺼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맛있는 음식들까지 대접하기 시작했다.
“뭐야? 나한테 뭐 하려는 수작이야?”
“뭐가요?”
아시테르의 반문에 아일리시가 눈앞의 음식들을 가리켰다.
누가봐도 붙잡힌 포로한테 주기에는 값비싸 보이는 음식들이었다.
“맛있게 드시면 돼요.”
“설마… 나한테 잘 해 줘서 환심을 사보려는 뭐 그런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아, 그 여자 말 쫑알쫑알 많네 진짜. 우리 대장이 주면 그냥 먹으면 돼. 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카이드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카이드의 실력이라면 아일리시도 전장에서 지켜봐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아시테르보다 더 싸우기 싫은 인물이 바로 카이드였다.
“저 사람도… 당신 수하야?”
“네. 카이드도 제 동료에요.”
“저런 사람을 어떻게 곁에 두지…….”
“말은 저렇게 해도 심성은 착해요.”
“어디가?”
아일리시뿐만 아니라 이번엔 다른 동료들의 시선도 아시테르에게 집중됐다.
그러자 오히려 발끈한 것은 카이드였다.
“내가 뭐?! 왜?!”
“아니 그냥… 아시테르는 널 굉장히 좋게 보고 있었구나, 싶네…….”
에스파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반면 카이드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나 정도면 아아주 괜찮지!”
“후우… 쉽지 않네 정말…….”
“밥이나 먹자고.”
“그거 좋은 생각.”
“맛있겠군요.”
그들은 아일리시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시작했다.
심지어 아일리시는 지금 속박 마법도 풀려 있는 상태였다.
“대체 어쩌려고 그래? 내 손을 이렇게 자유롭게 놔둔다고?”
“문제 될게 있나요?”
“내가 도망치거나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해보시게요?”
아시테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지금 아일리시의 앞에는 언노운 마법기사단 전원이 자리해 있었다.
수만 명의 군세를 뚫고 끝내는 아일리시를 붙잡아 온 언노운 마법기사단이었다.
그런 실력자들 집단속에서 아일리시 혼자의 힘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언노운 마법기사단도 대놓고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깔끔하게 마음을 접은 아일리시가 식기를 집었다.
“맛있게 먹을게.”
“근데 너 아까부터 왜 우리 대장한테 말을 낮추냐? 죽을래?”
“아니 나는…….”
“말 높여. 좋은 말로 할 때.”
카이드가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러자 아일리시가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태어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결국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좀 마음에 드네.”
라빈이 그런 아일리시를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쳐다봤다.
“사우스 왕국의 트럼프면 굉장히 높은 자리 아니야? 근데 왜 이렇게 사람이 무게감이 없지?”
“그러니까 우리들한테 잡혔겠지…….”
“에잉? 그런 거였나?”
“그… 너희들 사람 앞에 두고 너무 대놓고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
“뭐 어때? 들으라고 하는 건데.”
아일리시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 이런 식으로 창피를 주는 거구나! 속셈이 이거였어……!’
그런데도 눈치 없이 음식은 맛있어서 잘만 들어가고 있었다.
아시테르가 그런 아일리시에게 음식을 더 건네주었다.
“다들 좀 짓궂죠? 미안해요. 맛있게 많이 드세요.”
“아니 당신…….”
당신이 제일 나쁘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대놓고 놀리는 사람보다 아시테르는 은근하게 사람을 약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
본래 포로로 잡히면 이런 분위기일까
그런 생각들이 문득 스쳐 지나가는 중이었다.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당신들 대체 뭣들하는 인간들이야?! 이스트 왕국 사람들은 맞아?”
“얘가 뭘 잘못 먹었나 맞으니까 이러고 있지.”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은데…….”
“긴장해서 그런 걸 거야. 이해해.”
여전히 이들은 아일리시에 대해 별다른 생각들이 없어 보였다.
더욱 웃긴 것은 아일리시는 이날 이후로도 이들과 함께 종종 밥을 먹었다.
움직이는데 크게 제약도 없었고, 따로 감시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나를 그냥 심심해서 납치해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네…….”
이스트 왕국에서의 하루는 평화로웠다.
얼마 전까지 전쟁을 치렀던 기억들이 무색할 정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의 끈을 놓칠 수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곳은 적국이니까…….”
“넌 맨날 뭘 그렇게 중얼거리냐?”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란 아일리시가 위를 올려다 보았다
나무 위에 대놓고 드러누워있던 카이드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마주치기 싫은 인물.
아일리시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카이드도 딱히 더 말을 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조용히 여유를 즐기는 카이드를 보며 아일리시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카이드는 늘 저렇듯 놀고 있었다.
아시테르는 이들의 대장답게 늘 바빴다.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지 이곳에 붙잡혀 온 뒤로는 식사 시간 때 빼고는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니지…. 오히려 용케도 매 식사시간 때마다 찾아오는 건가……?’
아일리시가 주로 시선을 빼앗기는 이는 세아츠리스였다.
단언컨대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 세아츠리스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더 의아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세아츠리스를 대하는 태도였다.
솔직히 세아츠리스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앞에 있다면 긴장하거나 뭐 다른 시그널들을 보내게 마련인데 이들의 태도는 너무나 평범(?)했다.
마치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언노운 마법기사단 사람들을 관찰하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이제는 혼잣말마저 익숙해지고 말았다.
사우스 왕국 귀족가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가던 아일리시가 현재는 포로 신세라니…….
갑자기 기분이 저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때요 이제 지내기에 괜찮으신가요?”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이는 엔류아였다.
그나마 이곳에서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아이였다.
동시에 이곳에서 아일리시를 가장 잘 챙겨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늘 똑같지…….”
“다들 개성이 강해서 그렇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에요.”
“대체 어딜 봐ㅅ… 아니… 그래. 내가 안 죽고 살아 있는 것만 봐도 그렇겠네..”
낮게 한숨을 내쉰 아일리시가 해맑게 웃고 있는 엔류아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니…
‘분명 약점을 잡혔거나… 아니면 노예 신분이거나… 혹시 협박을 당하고 있나……?’
온갖 생각들이 다 들지만 그러기엔 엔류아의 표정이 너무나 밝았다.
거기다 척 봐도 여기 있는 이들 중 엔류아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 마디로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얘기였다.
“혹시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아시테르 단장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역시 당신은…….”
갑자기 눈물이 울컥한 아일리시는 꼭 다짐했다.
사우스 왕국이 이스트 왕국을 점령하는 날, 무슨 일이 있어도 엔류아만은 자신이 거두어 들이겠다고.
‘은혜는 꼭 갚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