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아브렐 협곡의 전투 (1)
지난번 전투에서 크게 부상을 입은 아브렐 성의 성주 드라칸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언노운 마법기사단 덕분에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거기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적장 파르무스의 목을 베어 오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당히 좋은 상황이었다.
허나 문제는 사우스 왕국군에 병력이 증원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숫자도 무려 2만.
이곳에 있는 병력은 다 합쳐도 1만여 명.
그마저도 부상병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사우스 왕국군은 기존의 병력들과 합친다면 3만 5천여 명이나 되는 숫자였다.
두 배를 뛰어넘는 병력들에 기껏 끌어올려졌던 아군의 사기도 다시 저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방법이 없나…….”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들인지는 지난번 전투를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곤 하나 저 많은 병력 차이를 극복해 낼 순 없을 터였다.
게다가 지원 병력인 언노운 마법기사단에게 의지하며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그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언노운 마법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단장, 아시테르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자네들이 와 줘서 많은 도움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네…….”
“적들의 병력이 추가되어서 그렇습니까?”
“파르무스가 쓰러졌어도 사우스 왕국의 군세는 여전하네. 오히려 파르무스의 복수를 위해 더욱더 기세가 높아진 상황이지.”
드라칸이 지도를 살폈다.
그러는 동안 아시테르도 함께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드라칸 성주님.”
“말하게.”
“어차피 우리는 저들을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네만…….”
“그렇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있게 말하는 아시테르의 표정을 보며 드라칸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시테르가 지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외성과 내성 사이에 있는 좁은 협곡이었다.
“이곳에서 적들을 막으면 됩니다.”
“외성을 버리고 이 협곡에서 적들을 상대하자는 말인가?”
“맞습니다. 좁은 길목은 적은 수로 다수의 적들을 막기에 적합합니다.”
“그건 그렇네만…….”
하지만 마도사들과의 싸움에서는 얘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었다.
자유롭게 공간을 활용하는 마도사들에게 좁은 길목은 그다지 방해될 것 같진 않았다.
“마도사들과의 싸움인데… 지형지물이 크게 작용할까?”
“물론입니다. 어느 누구와 싸우던 지형지물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흐음…….”
“한번만 믿어 주십시오.”
아시테르의 눈빛.
드라칸은 아시테르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신생 마법기사단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창단한지는 얼마 안됐습니다.”
“하지만 오늘 보니 전투 경험들은 상당한 것 같더군요.”
“어렸을 때부터 숱한 전투를 치르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제 단원들도 마찬가지고요.”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겠나?”
“알겠습니다.”
아시테르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홀로 남은 드라칸은 깊은 고민을 이어 갔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믿어 볼 수밖에 없나…….”
전면전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미 많은 손상을 입은 외성을 이용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어차피 외성이 함락당하는 것은 시간문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은 말 그대로 각오의 문제이지 방법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것들을 이용할 방법도 떠오르질 않는다.
“그나마 군량이나 다른 것들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다행인 일인가…….”
결국 드라칸은 아시테르의 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시테르가 언노운 마법기사단과 함께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
마법기사단의 단장이라면 이스트 왕국에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에 속한다.
아무리 전 마법기사단장을 지냈다곤 해도 드라칸은 성주일 뿐 아시테르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시테르는 항상 드라칸 성주에게 깍듯한 예를 갖추었다.
요즘 젊은 세대답지 않은 모습에 드라칸 성주도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혹시 어디 가문 출신인지 물어봐도 괜찮겠나?”
“저는 어비스 가문 출신입니다.”
“어비스 가문……?”
처음 들어 보는 가문에 드라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지간한 이름의 가문은 다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변방의 귀족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군… 미안하네 내 견문이 짧아 어디에 위치해 있는 가문인지는 알지 못하네…….”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름이 알려진 가문은 아니거든요.”
“귀족가의 자체치고 상당히…….”
“저는 귀족이 아닙니다.”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하자 드라칸이 조금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실례했군.”
“아닙니다.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는 동료들과 함께 전투를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게. 전투에 관해서는 자네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할 테니.”
“감사합니다.”
아시테르는 곧바로 언노운 마법기사단과 함께 회의에 들어갔다.
그들은 중앙에 펼쳐진 지도를 살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협곡에서 전투를 시작한다는 거지?”
“좁긴 한데 적들이 과연 여기까지 들어올까?”
“함정인 것을 알아도 들어올 수밖에 없어.”
“그 이유는?”
“놈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려면 이 협곡을 꼭 지나야만 하거든. 다른 곳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그런 위치였어 여기가?”
카이드가 협곡 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곳에서 적들을 맞이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지만… 괜찮을까요?”
“적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
“거기다 잘못하면 우리들이 뒤통수 맞는 것 아냐?”
“틀린 말은 아니네. 선두는 우리들이 맡을 것 아냐.”
아시테르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었다.
“적들이 이쪽으로 다가올 때쯤 데리미우스 형이 가장 먼저 나설 거야.”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법으로 적들에게 한 방 날려주면 됩니다.”
“후후 알겠습니다 대장. 제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을 보여드리도록 하죠.”
“아주 좋아요. 이번에는 사정 가릴 것 없습니다. 우리 모두 전력으로 가야 해요.”
“공포감을 줘서 적들을 물러나게 할 생각인 건가?”
“그렇게 되면 가장 좋긴 하지만… 아마 물러나진 않을 것 같아요.”
아시테르가 적들의 말을 옮겼다.
붉은 돌들이 계곡 안쪽으로 들어왔다.
“여기서부터는 나와 카이드가 맡을 거야.”
“이 공간을 전부?”
“우리 둘이면 충분해.”
“흐음…….”
“크하하하!! 아주 마음에 드는데!!”
“저도 참전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있다면 적들의 마법을 상당수 막아 낼 수 있을 겁니다.”
가이우스가 손을 들어 말했다.
잠시 고민해보던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우리들은 뭐해?”
라빈이 다른 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에스파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우리들이 마음껏 싸울 수 있게 도와줘.”
“뭐야… 그럼 평소 포지션이랑 다를 게 없잖아?”
“거기에 하나 더.”
“......?”
“적들이 이 협곡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해.”
“이를테면 방어전이라 이거지?”
“그렇지.”
“옛날 생각나네.”
“후후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힘들지 몰라.”
“괜찮아. 그때보다 맴버들도 훨씬 좋고.”
라빈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팔을 걷어붙여 보이며 말했다.
아시테르의 시선이 세아츠리스에게로 향했다.
“세아츠리스.”
“네.”
“이번에는 네가 중앙을 맡아 줘.”
“어렵지 않죠.”
“자신 있지?”
“제일 자신 있는 포지션인걸요.”
세아츠리스가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말했다.
아시테르가 모두를 둘러보았다.
“아마 지금까지 중에 가장 힘든 싸움이 될 거야.”
아시테르를 바라보는 언노운 마법기사단원들이 각오를 다졌다.
그렇지만 그들의 표정에 두려움이나 불안감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더욱 전의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을 지켜보던 아일리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들 정신이 나갔구나…? 이 인원으로 그 많은 적들을 상대한다고?”
“못할 게 뭐있어.”
“제정신들이 아니야… 제정신들이…….”
그녀는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하기사 아일리시뿐만 아니라 다른 누가 오더라도 아마 같은 반응이었을 터다.
그만큼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전략은 무모해 보였다.
허나 누가 알았을까.
이렇게 시작된 아브렐 협곡의 전투가 전설적인 이야기로 남을 줄은.
드라칸은 곧바로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외성 쪽을 비우게 만들었다.
이어 외성과 내성 사이에 사는 주민들도 신속하게 대피시켰다.
그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사우스 왕국군도 손쉽게 외성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사우스 왕국군의 대장 카브리누스가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부관인 르베노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도 없습니다.”
“외성을 버리고 뒤로 물러난 것인가?”
“압도적인 전력차를 보고 도망간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드라칸은 전장에서 죽을지언정 등을 돌리고 도망가는 사내는 아니다.”
“그럼 내성에서 우리 군을 맞이할 생각일까요?”
“흐음… 아마도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급하게 뒤로 물러난 듯 여기저기 집기들이 보였고 미처 데리고 가지 못한 가축들이 남아 있었다.
“놈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기 전에 서둘러 움직인다.”
상황 판단을 마친 카브리누스가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사우스 왕국군이 빠르게 외성을 지나쳐 내성으로 향했다.
좁은 협곡의 입구에서 르베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돌아가는 길을 찾아볼까요?”
“돌아가면 늦는다.”
“하지만 이곳에서 적과 조우한다면…….”
“그래 봤자야. 오히려 이쪽이 더 유리할 테지.”
“알겠습니다.”
카브리누스가 선두에 서서 군을 이끌었다.
협곡 위에서 적들의 이동을 지켜보던 데미리우스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어서오세요, 여러분.”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 데미리우스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옅은 녹색 연기가 협곡 안으로 스멀스멀 흘러 들어갔다.
데미리우스가 마법을 펼치기 시작하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크로마제도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럼 화끈하게 시작해 보겠습니다.”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모래의 파도가 협곡 안으로 쏟아져 내려갔다.
갑자기 흘러들어오는 모래 파도를 가리키며 누군가가 소리쳤다.
“적의 급습입니다!!”
“적들이 나타났다!”
사우스 왕국군이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췄다.
마력을 실은 무거운 모래가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지며 적들을 덮쳤다.
“마법으로 막아라!!”
“방어해!”
여기저기 쉴드가 생겨나며 모래를 막았다.
그러나 크로마제의 진짜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더욱더 많은 모래를 내보낸 그가 자비토를 돌아보았다.
“이제 자비토 형 차례에요.”
“오케이.”
자비토의 주변으로 커다란 마력의 송곳들이 생겨났다.
그의 손끝을 따라 송곳들이 절벽 여기저기를 때렸다.
콰아아앙!!!
콰광!! 쿠구구궁!!!!
자비토의 마법이 절벽 여기저기를 때리자 커다란 바위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을 확인한 사우스 왕국군 마도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들이 잔재주를!!”
“우리가 만만하게 보이나…….”
그들이 마법으로 바위를 막아 내려는 찰나, 데미리우스의 독 마법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크헉……!”
“헙……!”
“갑자기 이게 무슨…….”
몇몇 기사들이 손아귀로 목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했다.
숨을 꺽꺽 대던 그들이 하나둘 바닥에 쓰러지고, 마법을 캐스팅하던 마도사들도 경련을 일으키며 털썩 주저앉았다.
녹색 독무(毒霧)가 사우스 왕국군을 덮쳤다.
“아아… 이게 무슨…….”
녹아내리는 손을 보며 누군가 절망에 젖은 얼굴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