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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63화 (263/424)

263화 휴전

전쟁의 양상은 놀랍게도 이스트 왕국의 승리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카브리누스도 어떻게 해서든 전세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분명 군세는 아직까지도 사우스 왕국군이 유리했다.

하지만 사우스 왕국군의 사기는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어선을 뚫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허나 악착같이 버티는 이스트 왕국군 탓에 결국 방어선은 뚫지 못했다.

“전략에 있어서도… 실력에 있어서도… 모든 것에 패배하고 말았다…….”

카브리누스가 절망에 빠진 얼굴로 말했다.

더 이상 이 상황을 타개할만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숫자가 많으니 적들이 지치기만을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승기를 타기 시작한 적들은 절대 지치지 않는다.

더군다나 적진에는 영웅이라 불릴 법한 실력자들이 즐비했다.

“고작 하나의 기사단에게 이렇게까지 밀려날 수가 있는 것인가…….”

전쟁의 패인을 꼽자면 단연 저들이다.

아시테르의 불길은 멈출 줄 모르고 타올랐다.

다른 마도사들이 나서봤지만 저 불은 도무지 꺼트릴 수가 없었다.

카이드의 존재도 문제였다.

시체로 이룬 산 위에 걸터앉은 그는 이미 사우스 군에겐 전장의 악귀나 다름없었다.

그의 창이 번뜩일 때마다 여지없이 아군의 목이 달아나니 누구 하나 저 사내를 죽이기 위해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호기롭게 나섰던 일곱 기사들조차 이미 목과 몸이 분리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이들은 아시테르에게 붙었으나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어찌어찌 거리를 좁혀 봐도 소용없었다.

아시테르가 불길을 일으키며 저만치 멀어져 있거나 아니면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과 가시덤불이 그를 보호했다.

가이우스와 맞섰던 일곱 기사 중 한 명도 고깃덩어리로 다져져 있었다.

결국 사우스 왕국군은 어느 누구 하나 죽일 수 없었다.

아직도 만 오천 명이나 되는 병력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뒷걸음질 치고 있는 중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뒤로 물러나지 말란 말이야!!”

“어차피 나아가는 길밖엔 없다!”

“앞으로 가라!!! 전진해!!!”

살아남은 지휘관들이 악을 쓰고 소리쳐 봐도 소용없었다.

그들의 말은 병사들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무기를 버리고 뒤로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뒤라고 다를까.

그곳은 이미 독무로 가득한 지형이었다.

뒤에서부터 물밑 작업을 시작해온 데미리우스가 녹빛 독무로 뒤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따로 지시를 받아 절벽을 올랐던 이들도 소식이 없었다.

“아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좁은 협곡에 둘러싸여 완전히 갇혀 버린 것은 사우스 왕국군이었다.

이제와 저 돌무더기를 치울 수도 없다.

이미 아수라장이 된 전장은 아군끼리도 부딪히며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방향을 잃은 마법이 아군을 향해 떨어지기도 했다.

완전한 패배.

패배를 기록한 군대에 남겨진 길은 단 두 개뿐이었다.

“백기를 들어라.”

카브리누스의 말에 부관이 고개를 떨구었다.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카브리누스뿐만 아니라 부관도 잘 알고 있었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가졌지만 결국 적들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아브렐 협곡은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가혹한 곳이었구나…….”

카브리누스가 참담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우스 왕국군의 항복은 빠르게 드라칸의 귀로 전달되었다.

여기저기 백기를 올린 사우스 왕국군이 하나둘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동을 살핀 가이우스가 우뚝 멈춰 섰다.

“후우우우우…….”

크게 호흡을 내쉰 가이우스가 아시테르부터 찾았다.

“주군께서는 무사하신가?!”

아시테르가 있는 쪽은 온통 불길로 휩싸여 있어 알아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저 불길이 너무도 강해, 천하의 가이우스조차 함부로 진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잘 싸워 줬어요.”

그때 아시테르의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아시테르도 종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우리들의 승리에요. 가이우스.”

“후후후 그렇다면 좀 더 기쁜 표정을 지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가이우스의 말에 아시테르가 웃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카이드가 느릿하게 걸어왔다.

“와아… 이렇게 열심히 싸워본 건 처음이네.”

카이드의 뒤편으로 쌓인 수많은 시체들.

모두가 카이드의 창에 당한 이들이었다.

엔류아가 나서서 치료를 해주었음에도 카이드와 가이우스의 몸에는 여러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그에 반해 아시테르는 비교적 멀쩡한 상태를 하고 있었다.

“하여간 인간미가 없어 인간미가.”

아시테르의 모습을 살핀 카이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시테르보다 많은 수의 적들을 죽인 것 같아 기뻐지려는 찰나에 그의 모습을 보니 그냥 어처구니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시테르와 카이드가 있는 쪽으로 카브리누스가 걸어왔다.

잔뜩 굳은 얼굴의 카브리누스가 아시테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 군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겠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싸우고자 하지 않는다면 이스트 왕국군도 더는 사우스 왕국군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아시테르의 말에 카브리누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힘껏 말아 쥔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이를 본 카이드가 창날을 가까이 가져갔다.

“카이드?”

“혹시 모르잖아. 이러고 기습을 감행할지.”

카이드의 날카로운 시선이 카브리누스와 주변 지휘관들을 주시했다.

가이우스 또한 방심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사이 언노운 마법기사단이 한 자리로 모였다.

아시테르를 제외하고는 한 명도 성한 이가 없었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브리누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우리 측에 당신들에 대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이렇게 강한 마법기사단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 했습니다.”

“저희는 언노운 마법기사단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마법기사단…? 후후, 웃기는 일이로군요. 알려지지 않은 마법기사단이라니… 당장 이번 전쟁만으로도 당신들은 엄청난 유명 인사가 될 것입니다.”

카브리누스의 시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드라칸에게 머물렀다.

그 또한 드라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카브리누스…….”

“드라칸…….”

“여기서 이렇게 다시 재회할 줄은 몰랐군.”

“후후 우리들이야 나라가 정한 일에 따르기만 하는 이들이 아닌가.”

“이번 전쟁은 우리들의 승리로 끝났다.”

“인정하지. 완벽한 패배였다.”

카브리누스가 언노운 마법기사단을 살폈다.

겨우 열한 명.

저 열한 명을 2만이 넘는 군세가 넘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 한 명 더 추가되긴 한다.

“알렌시아……!”

전격 마법을 확인한 순간부터 아시테르는 그녀가 이곳에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시테르가 알렌시아의 전격 마법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아시테르가 알렌시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도와주러 온 거야?”

“응. 보고 싶어서 왔지.”

“내가?”

알렌시아가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또 낯선 모습이라 아시테르가 조금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솔직하고 직설적인 면은 있어도 이렇게 과감하게 표현을 하는 타입은 또 아니었다.

“당연히 너지.”

“반가워요 언니.”

세아츠리스가 슬쩍 끼어들어 인사를 건넸다.

알렌시아도 그런 세아츠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시덤불 마법.

그것은 알렌시아에게 있어서도 꽤 충격적인 마법이었다.

전장 전체를 아우르는 마법이라니…….

솔직한 생각으로 세아츠리스가 마녀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마법이라 생각했다.

알렌시아가 언노운 마법기사단원들을 살폈다.

익숙한 얼굴들 사이로 새로운 얼굴들도 보였다.

‘나는 오랜 기간이 걸렸는데…….’

아시테르가 이끄는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벌써부터 굵직굵직한 성과들을 남기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 공훈은 이스트 왕국 역사에 남을 만한 종류의 것이었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끝내 전쟁에서 승리해 1만 5천명의 항복을 받아 내다니…….

애인인 아시테르의 업적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알렌시아가 느끼는 감정이 묘해지는 와중 드라칸이 그녀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알렌시아 단장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뻔했소.”

“별말씀을요. 제가 아니었더라도 적들은 방어선을 뚫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 그렇지 않소. 그보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일섬 마법기사단 단장의 실력을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군.”

드라칸은 알렌시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렇게 아브렐 협곡의 전투는 끝이 나고 말았다.

드라칸은 투항한 사우스 왕국군을 모두 포로로 붙잡았다.

전쟁의 승리를 눈앞에서 지켜본 아일리시가 입술을 들썩 거렸다.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저자는 정말로 위험한 존재야…….”

그녀의 시선이 먼발치에 있는 아시테르에게 꽂혀 있었다.

분명 누가 봐도 이스트 왕국이 열세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빛이 나는 전략과 뛰어난 전투 실력으로 결국 판세를 뒤집어 놓고 말았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져 더욱 위험했다.

마치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을 해낸 느낌.

자신을 제외한 다른 트럼프들은 모두 엄청난 실력을 가진 실력자들이었다.

그중 다이아 군대를 이끄는 제이스쿠스나 클로버 군대의 대장 네이트워는 테르세우스와 비견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아시테르도 그들과 함께 했을 때 전혀 뒤쳐질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아시테르는 아직 젊었다.

‘저 녀석이 여기서 더 성장한다면… 10년 후에는 과연…….’

* * *

아브렐 성의 전투가 끝나고 일주일.

아브렐 협곡의 전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왕성에 전해진 것도 순식간이었다.

수적 열세를 뒤집고 시원하게 전쟁에서 승리해 낸 언노운 마법기사단과 아브렐 성의 영웅담은 다른 이들에게 힘을 심어 주었다.

덕분에 곳곳에서 연이어 승전보가 들려왔다.

반면 생각보다 이스트 왕국을 쉽게 함락하지 못하자, 사우스 왕국 측에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상외로 거센 저항을 보여 주는 이스트 왕국.

그들에게는 확실히 저력이 있었다.

결국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먼저 대화를 신청한 것은 놀랍게도 사우스 왕국이었다.

힘겹게 버티고 있는 이스트 왕국 입장에서도 대화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순순히 회담을 승낙했다.

그렇게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에서 빠르게 만남을 가졌다.

사우스 왕국 측에서는 국왕과 트럼프들이 자리에 참석했고, 이스트 왕국 또한 국왕과 군단장인 히스링, 그리고 몇몇 마법기사단장들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들이 그곳에서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보단 대화를 갖는 동안 모든 전쟁이 멈추었기에, 지금까지 잦은 전투로 몸살을 앓고 있던 이스트 왕국은 그제야 숨통이 트이고 있었다.

그렇게 4차까지 진행된 회담은 모두의 우려와 다르게 별다른 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회담이 끝남과 동시에 언노운 마법기사단과 함께 있던 아일리시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허무하게 붙잡히긴 했어도 그녀 또한 사우스 왕국의 주측이라 불리는 트럼프의 일원.

사우스 왕국은 가장 먼저 그녀의 무사 생환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스트 왕국도 그녀의 존재를 협상 테이블 위로 올릴 생각이었기 때문에 순순히 응해 주었다.

덕분에 사우스 왕국에 붙잡혔던 이스트 왕국군 수천 명도 무사 생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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