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볼모
휴전이 시작되고 이스트 왕국도 회복기에 들어갔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비명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핏물이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해 했다.
귀족들도 영지민들과 함께 도시를 복구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동안 최전선에서 싸웠던 마법기사단에게는 일부 휴가가 주어졌다.
아브렐 성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언노운 마법기사단에게도 휴식이 주어졌지만, 아시테르를 포함한 모두가 휴가를 반납하고 임무를 떠났다.
일섬 마법기사단의 단장인 알렌시아도 휴가를 받았으나, 어째서인지 그녀는 언노운 마법기사단과 함께 하고 있었다.
파바방!!!
쿵!!
거대한 체구의 마수가 쓰러졌다.
뒤이어 멧돼지를 닮은 와일드 보어들이 우후죽순 쓰러졌다.
와일드 보어는 최근 월리스트 영지를 괴롭히는 마수들이었다.
전쟁 때문에 많은 마법기사들이 국경 지역으로 배치되다보니 반대로 안쪽 영지들은 마수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아시테르가 휴가를 반납하고 자처해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문제는 아시테르 본인만 쉬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려 했는데 언노운 마법기사단 전원이 휴가를 반납했다는 점이다.
“너희들은 다 쉬어도 되는데…….”
“네가 안 쉬는데 우리가 어떻게 쉬냐.”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몸이 굳을 겁니다.”
“그렇게 싸워 놓고 쉬려는 사람이 있어?”
카이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라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냐?”
“그럼 아니냐? 다 하나같이 쎄잖아?”
카이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자비토가 의외라는 시선으로 카이드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물론 나보다는 아니지.”
“에라이…….”
“이제 와일드 보어는 깔끔하게 정리된 것 같군요.”
“쉬웠어 쉬웠어. 오죽하면 저기 있는 말도 와일드 보어들을 정리할까.”
카이드의 말에 이카루스가 울음을 터트렸다.
어지간한 마수들은 이카루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
언노운 마법기사단과 함께 했던 알렌시아는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곳에 와서 줄곧 생각에 잠겨 있는 알렌시아를 아시테르도 계속해서 신경쓰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냥…….”
알렌시아가 언노운 마법기사단을 살펴보았다.
아브렐 협곡 전투 때도 느꼈지만 이들 한 명 한 명이 정말 놀라울만큼 강했다.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기사단을 키워온 알렌시아로선 뭔가 이들이 한번에 만들어진 집단 같아 허탈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면서도 알렌시아는 아시테르를 돌아보았다.
천민과 귀족 사이에서 태어난 아시테르.
아시테르만 온전히 본다면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말이 오가고 있었다.
유미르 단장이 비록 천민의 신분으로 마법기사단의 단장 자리까지 올라갔다곤 하나, 그는 어디까지나 천민의 핏줄이라는 게 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아시테르 또한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유미르나 아시테르가 이스트 왕국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노력했는지는 그들에겐 별개의 일이었다.
마법기사단 모두가 이스트 왕국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것 또한 사실.
심지어 왕족은 더욱 심했다.
왕국민 모두가 이스트 왕국과 왕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그들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을 체르도네 가문뿐만 아니라 라른도왈츠 가문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두 가문 모두 아시테르와의 교제를 반대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더해…….
‘기분이 오묘해…….’
아시테르를 바라보는 알렌시아의 감정도 조금은 달라져 있었다.
오랜만에 봤을 때는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딱 그 정도뿐이었다.
몸은 이곳에 있으면서도 지금은 온통 일섬 마법기사단이 잘 해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가 칸에게까지 생각이 미칠 땐 알렌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떨어져 있었던 기간이 너무나 오래되어 이러는 것이 아닐까 싶어 일부러 이렇게 붙어 있기도 했지만…….
그때 아시테르 일행이 있는 곳으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피아슨? 무슨 일입니까?”
피아슨이라 불린 사내는 이곳 영지에서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보조를 돕는 사람이었다.
그는 곧바로 아시테르부터 찾았다.
“아시테르님! 던전 브레이크입니다!”
“던전 브레이크라… 근래 들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네요.”
아시테르는 피아슨이 건네준 지도를 살펴보았다.
다행이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였다.
이대로 움직인다면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이 더 있습니다.”
“그게 뭐죠?”
“이번에 마르체니 공주님이 사우스 왕국으로 보내질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사우스 왕국의 왕자 파울로님과 혼인할 것 같습니다.”
“혼인……?”
“갑자기 혼인이라니, 볼모로 잡아가는 느낌인데 이건…….”
에스파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른 이들도 아마 비슷한 생각들이리라.
“사우스 왕국의 공주도 이쪽으로 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양국간의 볼모 교환이 맞군요…….”
아시테르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갑자기 마르체니 공주가 사우스 왕구으로 보내진다…….
“잠깐… 그럼 왕실기사단은? 제9 왕실기사단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9 왕실기사단은 사우스 왕국까지 마르체니 공주님과 함께 가지만… 마르체니 공주님이 사우스 왕국 왕성에 도착하면 다시 복귀할 것입니다.”
“그럼 그곳에 마르체니 공주님 혼자 남겨진다는 말입니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르체니 공주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하녀들 몇몇은 남겨 두지 않을까요?”
갑자기 들어온 벽력 같은 소리에 아시테르의 표정이 잔뜩 굳고 말았다.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마르체니 공주님은 일찍부터 왕권다툼에서 물러나 왕성을 벗어나서 생활했어. 그런데 갑자기 볼모로 보내지다니……?”
“그래서 그런 것 아닙니까? 왕권다툼에서 밀려났으니까, 힘이 없으니…….”
“아니, 그러기엔 사우스 왕국측에서도 좀 더 중요한 인물을 데려오려 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볼모로서의 가치가 없으니…….”
“하긴 그건 그렇네…….”
“제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가이우스가 나서서 말했다.
알렌시아가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너도 가 봐야 하는 것 아냐? 마르체니 공주님도 널 찾으실 것 같은데…….”
“…….”
아시테르와 마르체니 공주가 남매처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렌시아도 알고 언노운 마법기사단 대부분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시테르는 현재 제9 왕실기사단의 부단장이기도 했다.
그때 에스파가 두 사람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에스파가 입을 열었다.
“아시테르, 그러지 말고 너도 다녀와. 우리들의 단장이기도 하지만 그곳에서도 너는 부단장이잖아.”
“에스파…….”
“가서 마르체니 공주님 잘 배웅해 주고 와.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서슴없이 나서 줬던 고마운 분이시기도 하고…….”
에스파의 시선이 슬쩍 알렌시아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귓속말을 했다.
“알렌시아랑 따로 시간도 좀 보내고! 그렇지 않아도 알렌시아가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이던데… 가서 고민도 좀 들어 주고 둘이 알콩달콩 데이트도 좀 하다 오고 그래라.”
“야…….”
“어허!! 거기다 너 근래 들어 한 번도 쉰 적이 없잖아. 가서 좀 쉬다와! 그래야 우리도 좀 눈치 슬쩍 보면서 적당 적당히 휴식을 취하지 이 눈치 없는 단장아!”
에스파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다른 단원들도 에스파의 의견에 동의하는 표정들을 보였다.
함께 따라나서려 했던 가이우스도 이번에는 에스파의 말뜻을 이해하고 잠자코 있었다.
“그래. 뭔진 모르겠지만 잘 다녀와 대장. 어차피 여기는 우리가 알아서 해도 돼. 그리고 내가 얘네들 좀 수련시켜 줄게. 그래도 되지?”
“뭐 그거야…….”
“나약해 빠졌다니깐… 겨우 그거 싸우고 지쳐서 바닥에 널부러져? 하 못 참지 이건…….”
카이드가 다른 단원들의 면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카이드가 여기서 아시테르 다음으로 강하지만 않았다면 벌써 몇몇 단원들이 달려들었을 터다.
하지만 성격은 저래도 실력만큼은 진짜였으니 모두가 애써 웃을 수밖에 없었다.
크로마제와 반키라스는 뒤에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드의 지옥 훈련에서 가장 고생하는 것은 분명 자신들일게 뻔했다.
“아무튼 잘 다녀와.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도 잘 알아보고.”
에스파가 아시테르와 알렌시아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알렌시아가 그런 에스파를 돌아보며 웃었다.
“고마워 에스파.”
“고마우면 나중에 맛있는 음식에 술이라도 사.”
“알겠어.”
“그때는 나도 불러. 나도 같이 가게.”
뒤편에서 에이브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에스파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가 왜?”
“시끄러 나도 갈 거야.”
“아니 그니까 알렌시아가 나한테 밥을 사는데 네가 왜 오냐고.”
“그… 그건… 나도 밥과 술이 고프니까!”
“아, 그랬어? 그럼 와.”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에스파를 보며 라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이미 에이브릴의 마음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저 둔치를… 어휴…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저쪽도…….”
혀를 차고 있는 라빈의 뒤에서 자비토가 헛기침을 해댔다.
누가 누구더러 둔치라는 건지…….
아무튼 뒷일은 언노운 마법기사단에게 맡기고 아시테르는 알렌시아와 함께 곧바로 마르체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동안 가이우스가 알아본 바로, 마르체니 공주는 일찍부터 왕권다툼에서 밀려나 있던 만큼 다른 귀족들 시야에서 벗어나 있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녀의 뒤에 노스 왕국이 있다고 해도 노스 왕국의 힘이 이곳 이스트 왕국에까지 영향이 미치진 않는데다 마르체니의 핏줄 반쪽은 이스트 왕국이었다.
그러니 노스 왕국에서도 대놓고 마르체니 공주에 관해 간섭할 순 없었다.
어쨌거나 그러던 와중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 마르체니 공주의 행보였다.
아시테르의 부탁에 따라 마르체니 공주가 빈민가의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그녀는 빈민촌 사람들 사이에서 성녀라 불리기 도했다.
이것을 의식했던 왕성 사람들이 눈에 자꾸만 밟히는 마르체니를 깔끔하게 치워 버리기 위해 외곽으로 보내기로 했다.
헌데 문제는 그녀가 이스트 왕국 외곽지역인 에도피아에 가서도 그곳의 문제들을 해결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마르체니 공주와 제 9기사단의 명성이 드높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그 이후로도 마르체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다녔다.
마수들의 습격과 발할라의 내란으로 수도가 발칵 뒤집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렸을 때도 마르체니는 늘 거리에 있었다.
그녀는 제 9 왕실기사단과 함께 그들을 지켜 주거나 도왔다.
이어 사우스 왕국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마르체니는 거리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이 일들 때문에 마르체니의 명망은 더욱 드높아졌고, 사람들은 마르체니 공주야말로 진짜 이스트 왕국을 위하는 공주라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왕성 깊숙한 곳에 앉아 마법기사단과 왕실기사단의 가호만 받는 왕족들보다 이렇게 최전선에서 왕국민들의 애환을 함께 하는 마르체니가 더 마음에 다가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눈치채고 있던 왕족들이 결국 그런 마르체니 공주를 사우스 왕국으로 보내 버리기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