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에서 왔습니다만-265화 (265/424)

265화 호송길

“크윽… 어째서 공주님이 사우스 왕국으로 가야한단 말입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한층 차분해진 말투.

세월이 흘렀다보니 마르체니 공주도 제법 성숙해진 티가 났다.

거기다 직접 빈민촌을 다니며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철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아시테르 앞에서는 아니었다.

흘깃 눈을 흘긴 마르체니 공주가 아시테르를 쳐다보았다.

“바쁘신 사람이 여기는 왜 왔대?”

“죄송해요. 그동안 좀 여기저기 다니느라…….”

“아주 바쁘시더라고 여기저기 임무 수행하느라? 심지어 나한테 그 삭막한 지역을 맡.겨.놓.고?”

“아… 그건…….”

“내가 거기서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볼에 바람까지 잔뜩 집어넣으며 마르체니 공주가 토라진 티를 냈다.

그녀의 반응을 알렌시아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서야 알렌시아의 존재를 자각한 마르체니 공주가 표정을 달리 했다.

“쳇… 날 배웅하러 온 거야 아니면 네 애인이랑 데이트하러 온 거야?”

“예? 그야 당연히…….”

“됐어. 난 간다.”

“가긴 어딜 가십니까. 모두 같이 가려고 온 건데.”

아시테르가 제 9 왕실기사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 역시도 아시테르가 이곳까지 와준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명예 부단장으로 두길 잘했다니까.”

“요즘 우리 왕국에서 가장 핫한 사람을 이렇게 볼 수 있다니.”

“워낙 유명해져서 우리들은 잊었을 줄 알았는데.”

베드롱과 선임기사들이 놀리듯 대화를 나눴다.

그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 아시테르가 곧 게벨과 인사를 나눴다.

“와주었구만.”

“물론이죠. 제가 빠질 수 있나요.”

“공주님은 신경쓰지 말게. 자네도 잘 아는 것처럼…….”

“아마 마음속으로는 반가워하고 있을 걸요? 저도 알아요. 저게 마르체니님의 표현 방식이라는 것을.”

“후후후, 이해해 주니 다행이로구만.”

이어 게벨이 알렌시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알렌시아도 자주 제9 왕실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왔던 터라 면면은 익숙한 사이였다.

“일섬 마법기사단에 관한 얘기들은 잘 듣고 있습니다. 워낙 잘 하실 줄은 알았지만… 정말 대단하더군요.”

“아니에요. 저 혼자 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대장이라는 자리는 무척이나 외롭고 힘든 자리 아닙니까. 수하들을 잘 이끈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든 일인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는 게벨님도 이렇게 제9 왕실기사단을 훌륭하게 이끌어 내셨잖아요.”

“후후 내가 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저 녀석이 나타나서 길을 잡아준 거죠.”

게벨이 아시테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시테르는 어느새 마르체니 공주의 뒤를 쫄쫄 따라가고 있었다.

알렌시아도 그런 아시테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쁘네요 아시테르는…….”

“후후 워낙 가만히 있질 못하는 스타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혹시 무슨 고민이 있는 겁니까?”

“왜요? 그렇게 보이나요?”

“여기로 온 뒤로 쭈욱…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표정 같아서요.”

“…아니에요. 그냥 좀…….”

“아시테르 때문이라면 빨리 잡으십시오.”

게벨의 말에 알렌시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동그래진 눈이 놀란 표정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녀석. 저래 보여도 은근히 인기가 있는 스타일입니다. 이상하게 또 주변엔 아름다운 여인들도 많지요.”

“하아… 그것도 그래요.”

“그러니까 빨리 잡으십시오. 어디 못 가게.”

“…….”

알렌시아에게선 따로 말이 없었다.

그러자 게벨이 말을 이었다.

“다른 여인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렇게 허술해 보여도 저 녀석 머릿속엔 온통 알렌시아 당신만 있습니다.”

“그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럼 다행이군요. 나이가 드니까 괜히 오지랖만 느나 봅니다.”

“아니에요. 이런 말씀 해주셔서 감사해요.”

“후후후 아시테르를 꼭 붙잡으십시오. 두 분 결혼하시면 꼭 가겠습니다.”

“네.”

게벨이 제 9 왕실기사단과 함께 출발을 알렸다.

마르체니에게 얼굴을 비출 법도 하건만 다른 왕족들은 이곳에 자리하지 않았다.

국왕만 이곳으로 찾아와 마르체니 공주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그녀가 왕성을 나섰을 때 놀랍게도 거리엔 왕국민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마르제니의 마차가 지나가자 울음을 터트렸다.

“왜 마르체니 공주님이 먼 타국까지…….”

“마르체니 공주님!! 가지 말아 주세요!!”

“가지 말아 주십시오 마르체니 공주님!!”

왕국민들이 수도를 통과해 나가는 마르체니의 마차를 보며 소리쳤다.

그들의 울음소리로 이날 하루 동안은 수도 내에 통곡성으로 가득했다.

국왕과 다른 몇몇 사람들도 마르체니가 이렇게나 왕국민들에게 인망이 두터운 줄은 몰랐다.

“허어… 이것이 과연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군…….”

사실 국왕이라고 곧바로 마르체니 공주를 사우스 왕국으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 여겼기 때문에 국왕은 몰래 사람을 보내 마르체니 공주를 안으로 들였었다.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국왕이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마르체니 공주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국왕도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체니 공주가 이곳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국왕도 모르진 않았다.

왕권 다툼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핏물이 흐르던 때, 일찍부터 발을 빼 자신을 지켰던 마르체니 공주였다.

철이 없을 나이 때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터득한 그녀는 조용한 곳에서 홀로 살아가길 희망했다.

평범한 삶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신분은 그녀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족의 피가 흐르는 이상 그녀에게 평범한 삶은 허락될 수 없었다.

그러나 국왕은 최대한 그녀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것이 아버지로서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가 마르체니 공주를 가까이 두려 하면 할수록 그녀가 원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어졌기 때문에 먼발치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헌데 결국 이리 되는 구나…….’

운명은 어찌 이렇게 가혹하게 흘러가는지…….

이 불쌍한 아이에게 또 다른 시련을 주려 한다.

이스트 왕국에서도 반쪽짜리 피라며 은근한 홀대를 받았던 그녀가 이제는 머나먼 타국 땅으로 가 고생을 시작할 것이다.

그곳에서 과연 누가 이스트 왕국의 공주인 마르체니를 반겨 주겠는가.

거기다 그녀가 혼인할 왕자는 단 한 번도 마르체니 공주의 얼굴을 본 적도 없다.

정말로 정치적으로 이용한 결혼일 뿐이었다.

“제가 가지 않으면 전쟁은 계속될 겁니다. 이스트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침략하는 사우스 왕국군과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고… 그 피해는 왕국민들이 입게 됩니다. 귀족들은 뒤에서 전쟁이라는 명목을 앞세워 평민들과 천민들의 재산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그 끔찍한 굴레를 벗겨줄 수 있다면 기꺼이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귀족이나 왕족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왕국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일국의 공주로서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 나서는 겁니다.”

조용하게 말을 잇는 마르체니의 두 눈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눈물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국왕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다만 그녀를 안아 주었을 뿐이다.

“미안하구나… 딸아… 그동안 이렇게 자주 안아 주지 못해서…….”

무심한 아버지로 비췄을 것이다.

자신에게 크게 신경쓰지 않는 아버지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속으로 원망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쩌면 그녀는 아비를 원망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를 원망하거라…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국왕은 마음이 쓰라렸다.

마르체니의 어머니도 노스 왕국에서 정략결혼으로 이곳까지 왔건만 늘 고생의 연속이었다.

국왕인 자신이 크게 신경을 써주지도 못했다.

그래서 마르체니의 존재는 국왕 자신에게 더더욱 아픈 손가락으로 다가왔는지 모른다.

회상에 잠겼던 국왕, 헨카일로가 슬픈 얼굴로 떠나는 마르체니를 바라보았다.

“그랬던 그 작은 아이가. 이제는 정말로 훌륭하게 자라 주었었구나…….”

마르체니가 탄 마차는 일정한 속도로 달렸다.

수도를 나와 달릴 때도 왕국민들이 따라붙어 통곡했다.

마르체니는 그동안 문을 열어 그들과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런 모습을 보고 마르체니의 태도가 쌀쌀 맞다 말할 수 있겠지만, 마차 주변에서 걷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안에서 눈물짓는 마르체니의 모습을…….

제9 왕실기사단은 모른 척 하고 있었다.

다행이 거리, 그리고 마차와 말이 움직이는 소리가 시끄러워 울음소리는 왕국민들에게까지 새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마침내 마차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곁에서 이카루스를 타고 있던 아시테르가 마차 곁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왜……?!”

아직은 잠겨 있는 목소리.

얼마나 울었는지 조금은 탁해지기까지 했다.

“물이라도 드릴까 해서요.”

“…이리 줘.”

마차 문을 열고 마르체니가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까지 의연한 척 했지만 마차 안에서 결국 그녀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태어나 지금껏 자라온 이스트 왕국을 떠나, 환영 받지 못하는 낯선 땅으로 간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견디기 힘든 일일까.

그것들을 십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주변 기사들은 말을 아꼈다.

아시테르 또한 괜한 말을 덧붙이지 않고 물을 건넸다.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의 옆에 붙었다.

“마르체니 공주님도 심란하시겠어…….”

“그렇지… 아마 복잡하실 거야.”

“너도 그래?”

“막상 이렇게 떠나신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야…….”

“9기사단은? 어떻게 되는 거야?”

“본국으로 복귀하면 또 다른 임무들을 부여받겠지…….”

“그렇구나…….”

알렌시아의 얼굴도 덩달아 복잡미묘해졌다.

아시테르가 그런 알렌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고마워.”

제9 왕실기사단은 아시테르가 알렌시아와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일부러 거리를 벌려주었다.

어차피 아직까지는 이스트 왕국 영토였기 때문에 따로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보다는 가는 영지마다 왕국민들이 뛰쳐나와 눈물 짓는 것을 보는 일이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스트 왕국 국경지역에 도착할 때까지도 왕국민들은 마르체니 공주가 가는 길을 메워주었다.

이것은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왕국민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쌓았는지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잠시 멈춰 선 게벨이 마르체니 공주에게 다가갔다.

“이제 국경을 넘을 겁니다 공주님.”

“네. 준비되었어요.”

“그럼…….”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이미 사우스 왕국 국경엔 트럼프 중 한 명인 제이스쿠스가 나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친히 마르체니 공주를 마중나왔다.

“마르체니 공주님께서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미안하지만 마차에서 내려 모습을 보여 주어야겠소.”

제이스쿠스의 말에 게벨이 눈썹을 꿈틀였다.

저 말은 마차 안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확인해 보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이제보니 사우스 왕국은 유일하게 마르체니의 얼굴을 알고 있는 제이스쿠스를 보낸 것이었다.

“지금 우리를…….”

“내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발끈하려는 게벨의 말을 끊고 마르체니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 사이에 수척해진 그녀가 마차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려섰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빠르게 다가와 시중을 들었다.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마르체니 공주를 보며 몇몇 사우스 왕국 기사들이 감탄을 흘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