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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66화 (266/424)

266화 이국땅

마르체니의 얼굴을 확인한 제이스쿠스가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이제 되었나요?”

“예. 확인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럼 제 기사단은…….”

“왕성까지 함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이스쿠스의 시선이 게벨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게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오. 우리는 마르체니 공주님께서 무사히 사우스 왕국 왕성에 입성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갈 것이오.”

“그럼 그렇게 하시오.”

제이스쿠스가 순순히 수락했다.

그는 다이아 군대를 뒤로 물렸다.

마르체니가 다시 마차에 오르고, 제 9기사단이 마차를 위시한 채 섰다.

삼엄한 기세의 그들이 무거운 분위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바라보며 제이스쿠스와 다이아 군대도 움직였다.

제이스쿠스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나드가 가까이로 다가왔다.

“제 9왕실기사단입니다. 예전부터 마르체니 공주를 모시던 기사단이기도 합니다.”

“알고 있다.”

“본래 이스트 왕국에서 뒤처지는 기사단으로 취급받았으나 최근 급부상한 실력 있는 기사단이기도 합니다.”

“그게 다 저 남자 때문이겠지.”

제이스쿠스가 앞서 가고 있는 게벨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에게서 풍겨 오는 기세가 남달랐다.

한눈에 봐도 그가 저 기사단의 단장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눈앞에서 마주했을 때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내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 실력자다. 이스트 왕국이 쉽게 함락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왕국의 인구수는 사우스 왕국에 비해 많지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스트 왕국에는 인재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우스 왕국과 이스트 왕국이 전쟁을 치르면 꼭 양과 질의 대결이 되는 것만 같았다.

“테르세우스라는 거성이 졌는데도… 이스트 왕국이 이만한 저력을 보여 줄 줄이야…….”

솔직히 말해 이것은 생각 외였다.

테르세우스뿐만 아니라 이스트 왕국은 내란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사우스 왕국의 침략에 침착한 대응을 보였다.

그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히스링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는 테르세우스의 곁에서 오래 머물러 온 만큼 마법기사단과 왕실기사단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국정 부분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며 귀족들의 불만까지도 잠재웠다.

제이스쿠스는 이스트 왕국이 빠르게 안정세를 찾아갈 수 있던 것을 순전히 히스링의 존재 덕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다 몇몇 잔뼈 굵은 인물들도 복귀했다고 들었고…….”

제일 의외였던 것은 바로 아레나의 존재였다.

그녀가 프로메테 가문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은 제이스쿠스에게 조차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당장 무언가를 할 줄 알았던 그녀는 이스트 왕국에서도 곤혹을 치러야 했다.

이는 바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낸 소문 때문이었다.

아레나가 이스트 왕국을 등지고 세상에서 숨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이때다 싶어 아레나가 전면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이 소문으로 그녀를 붙잡고 늘어지는 중이었다.

강경한 귀족들은 그녀를 처벌해야 한다며 입을 모으고 있었다.

한때 홍련의 마법기사단 단장이었으니 국가를 위해 힘쓴 만큼 그녀를 용서해 줘야 한다는 의견도 분분했지만, 프로메테 가문을 견제하기 위함인지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녀에게 권력을 실어 주는 것을 꺼려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제이스쿠스는 실소를 금치 못했었다.

“아레나 같은 귀한 인재를 두고 그런 얘기들을 나눌 줄이야… 이렇게 보면 이스트 왕국 왕족들이나 귀족들은 한참 멀었는데… 한심하기 짝이 없질 않는가.”

만약 사우스 왕국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아레나를 기용하려 했을 것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레나와 프로메테 가문이 내쳐진다면 그것으로도 좋다.

어떻게 해서든 사우스 왕국에서 접근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 테니까.

하지만 프로메테 가문은 뼛속 깊이 이스트 왕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집안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건국 때부터 이어져 온 명맥이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몰라도 프로메테 가문을 사우스 왕국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군. 저들이 멍청한 짓을 하면 할수록 우리들에게는 이득일 뿐이니.”

자신들의 권력에 해가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 배척해내려 하는 족속들이 바로 이스트 왕국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이 있는 한 이스트 왕국의 신분제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득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니까.

여러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미리 잡아두었던 숙박 거점에 도달했다.

제이스쿠스는 앞서 가는 이들을 멈춰 세우며 숙소로 안내했다.

마르체니 공주와 제 9 왕실기사단은 제이스쿠스의 안내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그들은 2층 테라스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도 밤하늘은 이스트 왕국 못지않게 아름답네요.”

마르체니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게벨도 그곳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에 있던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테니… 결국 함께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잖아요.”

“공주님…….”

마르체니의 말이 마치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들려왔다.

때문에 좌중이 숙연해졌다.

그들도 마르체니 공주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그럴 수 없다.

양국이 서로 개인 호위를 두지 않기로 약조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 같자 마르체니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는 마르체니를 보며 게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마르체니를 가장 오랫동안 모셔왔던 게벨은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마르체니가 저렇듯 밝은 모습을 보이니 게벨도 함부로 티를 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아시테르는 앞에 놓인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천하 태평이로구만 우리 부단장은.”

“이럴 때일수록 맛있게 먹어주고 기운 내야 합니다. 아직 갈 길도 먼데 매일 이렇게 처져있을 순 없잖아요? 공주님께도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될 것 같은데.”

“웬일로 네가 이렇게 나랑 마음이 잘 맞아?”

마르체니 공주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다 그녀가 슬쩍 알렌시아의 표정을 살폈다.

“당신도 힘들겠어요. 저런 애인을 곁에 두어서.”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공주님.”

마르체니 공주가 눈을 흘기며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너. 알렌시아 단장님한테 잘해.”

“저는 잘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너 같은 걸 거둬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돼 넌.”

“알고 있습니다 저도.”

아시테르가 웃으며 말했다.

알렌시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도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르체니 공주는 괜히 짜증이 일었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의 사이를 질투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 또한 저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면서 알콩달콩 지내다 결혼하는 것을 꿈꾸었는데, 그것을 못하게 되었으니 아쉬움과 씁쓸함이 맴돌았던 것이다.

“자자 이러지 말고 우리 술이나 거하게 한잔 하시죠!!”

베드롱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온 베드롱 덕분에 다시금 분위기가 살아났다.

몇몇 기사들이 흥을 띄우기 위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르체니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과 한데 어우러졌다.

술과 춤이 함께 하니 밤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흥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마르체니 공주의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제이스쿠스는 여전히 거리를 두며 마르체니 공주를 호위해 주었다.

“어디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게벨이 수시로 마르체니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럴 때마다 마르체니 공주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게벨은 다시금 시선을 피한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도 가는 동안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다.

주로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에 대한 얘기들이었다.

그러다 대화가 끊길 때면 저마다의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각자가 말하지 못하는 생각들을 갖고 길을 걸었다.

며칠이 훌쩍 지나가고 마침내 그들은 사우스 왕국의 중심에 자리 잡은 수도 ‘파르한’에 도착했다.

파르한에 도착하기 앞서 마르체니가 게벨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주님.”

“저는 왕성에 들어가기 전까지 누구와도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제가 가장 처음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바로 사우스 왕국의 국왕이에요. 국왕께서 직접 저를 마중나온 것이 아니라면…….”

“문을 열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르체니의 시선이 아시테르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아시테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내 마지막 자존심이자 고집이라고 생각해 줘.”

“지켜드리겠습니다.”

이스트 왕국에서 온 마르체니 공주를 보기 위해 사우스 왕국민들이 길거리로 나왔다.

“오오…! 저들이 바로 이스트 왕국의 기사들인가……!”

“갑옷들이 제법 멋지구만 그래.”

“기세들이 살벌한데… 우리 군은 지금까지 저런 사람들이랑 싸웠던 것인가?”

“야만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사우스 왕국의 왕이 직접 마르체니 공주를 맞이하러 나오진 않았다.

대신 그녀와 혼인을 할 왕자 피체가 왕성을 나와 있었다.

피체를 본 제이스쿠스가 고개를 숙였다.

“트럼프 제이스쿠스가 왕자님을 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제이스쿠스 공.”

“왕자님께서 이렇게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 아내를 맞이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제가 나오지 않으면 누가 나오겠습니까.”

훤칠한 키에 곱슬거리는 갈색머리.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는 피체가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게벨이 그런 피체의 앞에 섰다.

“뭔가?”

“더 이상의 접근은 불가 하십니다.”

“내가 누군진 알고 그런 말을 하느냐?”

“사우스 왕국의 왕자님 아니십니까.”

“그래. 내가 바로 사우스 왕국의 3왕자 피체다. 지금 그대는 그런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상관이 없다……?”

피체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척 봐도 기분이 퍽 상한 얼굴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말해보게. 여기가 어딘가?”

“사우스 왕국의 수도 파르한이 아닙니까.”

“잘 알고 있군. 헌데…. 다른 곳도 아닌 사우스 왕국의 심장에서…! 왕자인 내 앞을 가로막겠다!? 그 이유가 뭐지?”

“공주님께서 제 발로 마차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보지 않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고작 그 이유로 날 막겠다는 것이냐?”

게벨의 시선이 피체를 내려다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을 다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누구든,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든. 저는 오직 마르체니님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게벨을 보며 피체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마음에 든다! 아주 마음에 드는 구나!!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이런 이를 곁에 두고 있는 마르체니 공주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피체의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이전처럼 더 이상 마차에 다가가려 하진 않았다.

멈춰선 그가 게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대의 기백과 충심을 보아 내 이번에는 가볍게 물러나 주겠다. 하지만 다음번에도 이렇게 나를 겁도 없이 막아선다면 그때는 나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야.”

그리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피체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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