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사우스 왕국
마르체니 공주가 사우스 왕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왕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덕분에 이스트 왕국도 마르체니 공주가 무사히 사우스 왕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9기사단은 마르체니 공주와 함께 사우스 왕국 왕성에 약 2주간 머물렀다.
금방 돌아가려 했으나 사우스 왕국에서 이들 또한 왕국의 손님이니 극진한 대접을 해주고자 했다.
덕분에 제 9기사단은 사우스 왕국 왕성에 머물며 맛있는 음식과 호화로운 숙소를 제공 받았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대외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제 9기사단을 마음에 들어 한 피체의 배려도 있었다.
“머무는 동안 불편한 점은 없나?”
피체가 제 9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 물었다.
얼마 전까지 서로 전쟁을 치르던 사이였다.
아무리 편하게 대해준다 한들 그것이 곧이곧대로 편하게 느껴질리 만무했다.
하지만 제 9기사단도 피체가 여러 방면으로 신경 써주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게벨이 피체에게 말했다.
피체는 게벨의 풍채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대는 단련이 잘 된 몸을 갖고 있군.”
“그저 매일 같이 수련을 반복했을 뿐입니다.”
“어떤가. 그러지말고 사우스 왕국으로 오지 않겠나? 이곳에 자네의 주인인 마르체니 공주도 있질 않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후후후후… 안될 걸 알고 한 말이다. 실 없는 말을 던져 본 거야.”
피체가 웃으며 제 9기사단을 살폈다.
그들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제는 수련이 일상이 된 터라 어디에서든 수련을 하지 않으면 뭔가 불편하고 허전한 마음들이었다.
그래서 마르체니 공주는 피체에게 부탁해 이들이 수련할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나참… 오자마자 한다는 부탁이 다른 것도 아니고 자기 기사단 수련할 공간을 내어 달라는 것일 줄이야…….”
그렇다고 시선이 가득한 곳에서 제 9기사단이 수련을 할 수도 없는 노릇.
때문에 피체는 따로 수련할 공간을 마련해 주긴 했다.
거기다 그들이 수련하는 장소는 마르체니 공주도 지켜보기 편한 장소였다.
잠자코 제 9기사단이 수련하는 것을 지켜보던 피체가 검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가? 제안 하나 하고 싶은데.”
“그 제안이 무엇입니까?”
“그대들이 이스트 왕국에서 어떠한 위치인지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래서 궁금하기도 해. 그대들이 과연 얼마나 좋은 실력들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또한 알려 주고 싶기도 하다. 앞으로 마르체니 공주를 지킬 호위들이 어떤 실력을 갖고 있는지!”
“흐음… 실력을 겨루어 보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피체가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게벨이 다시 물었다.
“대결 방식은 어떻게 진행하시겠습니까.”
“호오…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기사단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후후, 나의 수하들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거다.”
피체가 환하게 웃었다.
사실 그는 제 9기사단을 그리 높게 평가하고 있진 않았다.
이스트 왕국에서 제법 명성을 쌓았다곤 하지만 그 장소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변두리에 있는 곳이었다.
거기다 그들이 싸운 마수들은 손쉽게 사냥 가능한 마수들로 가득했다.
‘심지어 소문은 본래 부풀려지게 마련인 법이지.’
같은 사건도 호사가들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부풀려진다.
피체가 판단하건데 이스트 왕국 사람들은 은근히 소문이라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세간의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하는지가 이들에겐 중요한 것이다.
아마도 마법기사단이라는 특별한 제도 때문에 서서히 그렇게 바뀐 것이 아닐까 싶다.
마법기사단의 자율적 운영은 서로를 비교케 하면서 은근한 경쟁 구도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이스트 왕국의 강점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약점을 만들어 내고도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피체는 이러한 점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이곳에서 제 9기사단이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이 사우스 왕국뿐만 아니라 이스트 왕국에까지 퍼진다면……!
피체가 피식 웃었다.
그는 미리부터 대기 시켜놓은 부대를 불러들였다.
모두 피체의 개인호위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수많은 실전으로 경험치를 쌓아 온 정예 병사들이었다.
날카로운 기도를 풍기는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수련장의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제 9기사단도 들어서는 피체의 개인 호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 엄청나게 살벌한 분위기구만…….”
“딱 봐도 재미없을 것 같은 놈들이네…….”
“호위니까 말수도 적겠지?”
“그나저나 저 갑옷 멋있다. 엄청 튼튼할 것 같기도 하고.”
제 9기사단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피체가 내심 실소를 터트렸다.
대화를 나누는 수준만 봐도 이미 답은 나온다.
피체의 시선이 마르체니 공주에게로 향했다.
이것은 제 9기사단을 가볍게 눌러줌으로써 양국 간의 자존심 싸움에 승리를 취하려는 목적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마르체니 공주에게 알려 주기 위함도 있었다.
앞으로 그녀를 지켜 줄 호위들이 제 9기사단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훨씬 더 뛰어난 이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해리크스.”
“예. 말씀하십시오 왕자님.”
“열 명만 추리게.”
“열 명이나 뽑습니까.”
해리크스라 불린 사내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갖고 있었다.
한쪽 눈에 난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해리크스의 번뜩이는 두 눈이 제 9기사단을 살폈다.
제법 실력 있어 보이는 이들이 몇몇 보였으나 모두 이쪽과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승자전으로 진행하는 겁니까.”
“그래야겠지? 그래야 저들이 한 번이라도 더 이길 수 있을 테니까.”
“후후후후, 저들을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 군요. 아니면… 저희들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겁니까?”
해리크스가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뒤편에 시립해 있는 수하들도 해리크스와 같은 마음이었다.
“사람은 만에 하나라는 게 있긴 하니까. 그리고 한번에 다 이겨 버리면 마르체니 공주의 체면이 뭐가 되나? 그래도 나름 실력이 있으니 이곳까지 함께 왔을 텐데.”
“손속에 사정을 두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마르체니 공주는 앞으로 나와 함께 할 사람이다. 최소한의 체면 정도는 지켜 줘야지.”
“알겠습니다.”
피체와 해리크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제 9기사단도 인원을 추리고 있었다.
주로 선임 기사들 위주였다.
그러다 문득 아시테르가 앞으로 나섰다.
“응? 뭐야? 너도 참가하려고?”
“부단장이니까 아시테르도 얼마든지 참가할 수 있지.”
“하지만 아시테르가 나서면…….”
“이번에는 제가 먼저 나서겠습니다.”
아시테르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가 이런 일에 이토록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적이 따로 없었기에 게벨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함께 의아함을 드러내었다.
“네가 먼저 나서겠다고? 승자전이라… 그러면 괜히 네 힘만 더 빠지는 것 아니냐? 그러지 말고 가장 마지막으로 나서지?”
“아니요. 이번에는 제가 처음으로 나서겠습니다.”
아시테르의 시선이 해리크스와 피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실 아시테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마르체니의 체면을 살리는 것.
그것은 저들이 걱정해 줄 문제가 아니었다.
체면을 확실하게 세우는 것은 이쪽이 할 일이었다.
거기다 이번에 제 9기사단이 확실하게 무언가를 보여 준다면 저들도 결코 마르체니 공주를 만만하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별 선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이것으로 적당할 터다.
마르체니 공주가 아시테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너답지 않게 왜 이런 일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
“마르체니님과 관련된 일인데 제가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 봐. 무슨 꿍꿍이야? 애인 앞이라고 멋있는 척 좀 해보려는 거야? 그게 아니면 또 저쪽 기사들의 실력이 어떤지 궁금해서 나서는 거야?”
“둘 다 아닙니다.”
아시테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가 웃으니 마르체니는 괜히 더 불안해졌다.
“아무튼 살살해. 이런 일에 네가 나서는 것 자체가 반칙인 일이잖아.”
“반칙이 어딨습니까. 저들이 저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일인걸요.”
“퍽이나 그러겠다…….”
마르체니는 앞서 나가는 아시테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저 등에 기대어 살아간 적도 있었다.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등.
과거에는 자신만 저 등에 올라타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아시테르의 어깨와 등을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늘 언제나 그랬듯,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것들을 내색하지 않았다.
마르체니는 말없이 아시테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뒷모습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시테르는 늘 자신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올 것이다.
아시테르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마르체니를 보며 피체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췄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수하들이 놈들을 완전히 박살낼 겁니다.”
“그래. 기대하지.”
해리크스가 뒤편의 수하들 중 한 명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사내 한 명이 앞으로 나아갔다.
아시테르와 그가 마주섰다.
“흐음…….”
해리크스의 수하가 눈매를 좁혔다.
아무리 봐도 평범해 보이는 수준이었다.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빠르게 끝내 주도록 하지.”
“…….”
아시테르는 그저 우두커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내심 긴장하고 있는 것이라 여긴 해리크스의 수하가 무기를 빼들었다.
마도 공학 무기를 보이자 아시테르의 시선이 반응했다.
“그럼……!”
따로 시작을 알리지 않아도 이미 대련은 시작되었다.
그는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아시테르와의 간격을 줄이려 했다.
마도사들은 보통 근접전을 꺼려한다.
이스트 왕국 기사단의 대부분이 마도사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그렇기 때문에 사내는 시작하자마자 근접전을 택한 것이다.
허나 운이 없게도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시테르였다.
아시테르는 살짝 몸을 비틀어 검을 피했다.
이에 놀란 사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행이다.
운이 좋아 검을 피한 것이다.
그리 생각한 사내가 곧바로 연격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검은 아시테르의 옷깃조차 스칠 수 없었다.
“뭣……?!”
놀란 것은 사내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다른 이들도 놀란 표정들을 보이고 있었다.
반면 제 9기사단과 마르체니 공주에게 이러한 장면은 너무나 당연해서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연속적으로 검격을 이어가던 사내를 보며 아시테르가 입을 열었다.
“실례할게요.”
아시테르의 손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파앙!!
그의 주먹이 사내의 가슴을 강타했다.
이어 아시테르가 부드럽게 움직이며 사내를 제압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사내조차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가 들고 있던 무기는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뭐가 어떻게 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내는 제압당했고 아시테르는 그 위에 있었다.
아시테르가 바닥에 누워 있는 사내를 일으켜 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