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전승
사내는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전까지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아시테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상대를 가볍게 제압한 아시테르가 상대를 일으켜 주었다.
“허어…”
특별한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상대를 손쉽게 제압하는 아시테르를 보며 피체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반면 해리크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피체에게 잘 보여야 하는 순간, 너무나 허무하게 2연속 패배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뒤편의 수하들에게 따로 수신호를 내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으니 좀 더 실력 있는 자를 내보내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사내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아시테르는 우두커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실력이 뛰어난 분이셨군요.”
“별말씀을요.”
아시테르가 웃으며 답했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가 사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내, 클레이맨타인이 검을 들어올렸다.
그의 전신에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호오…….”
지켜보던 이들이 감탄을 흘렸다.
클레이맨타인이 흘려 내는 마력의 깊이가 상당했던 것이다.
확실히 이전에 상대했던 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부동의 움직임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귀하께서 실력에 자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멍하니 있다간 순식간에 당해 버리고 말 겁니다.”
“저는 괜찮으니 편하게 공격하세요.”
아시테르의 시선이 클레이맨타인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양은 확실히 이전의 사람들과 달랐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마력의 질이 너무나 떨어졌다.
저것은 순도 높게 제련하고 단련한 마력이 아니었다.
마력의 양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의 마력.
저 정도 밀도의 마력이라면 마법을 사용해도 금방 깨져 버리고 만다.
마력뿐만 아니라 마소 단위까지 짙게 느끼는 아시테르기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마력을 저렇게까지 늘릴 수 있었던 걸까……?’
질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마력의 양이 많았다.
그 사실이 조금 신경 쓰이기도 했다.
클레이맨타인이 본격적으로 마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그가 들고 있는 마도 공학 무기가 더욱 강한 빛을 띠었다.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를 겁니다.”
클레이맨타인이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고 아시테르가 반보 앞으로 내딛었다.
파앙!!
아시테르의 공격을 막아 낸 사람은 클레이맨타인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기양양해진 것은 클레이맨타인 쪽이었다.
“그런 공격은 통하지 않습니다.”
클레이맨타인이 다시금 공격을 이어갔다.
그의 검이 빠르게 움직일수록 아시테르의 몸도 빠르게 움직였다.
점점 속도를 올리는 클레이맨타인의 실력도 대단했지만, 그에 맞춰 움직이는 아시테르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한낱 마도사가… 저게 가능한 일인가?”
“마도사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피체 왕자님. 마법기사단과 다르게 왕실기사단은 검사들도 함께 존재합니다.”
“흐음… 검사인데 지금까지 검도 뽑지 않았다고…? 그럼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피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상대가 검사라면 진즉에 검을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테르는 검을 들고 있지 않았다.
허리춤에 검집도 없다.
“그것도… 그렇군요…….”
해리크스가 인상을 굳히며 아시테르를 쳐다보았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도사가 저런 움직임을 보인다니…….
‘아니면 근래 보기 힘들어진 전투 마도사인가……?!’
근접전을 선호하는 특이한 케이스의 전투 마도사들.
상대가 전투 마도사라면 충분히 저런 스타일의 전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심지어 이쪽의 방심을 유도할 수도 있었다.
“클레이맨타인! 상대는 전투 마도사일 수도 있다!”
생각을 마친 해리크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말을 들은 클레이맨타인이 검을 고쳐잡았다.
“역시 그랬군요!!”
자신의 공격을 속속들이 피해내는 아시테르를 보며 클레이맨타인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품긴 했었다.
전투 마도사들은 노스 왕국의 투사들을 닮아 있다.
하지만 투사들에 비해 무게감은 없다.
클레이맨타인이 자신 있게 아시테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아시테르의 주먹이 빠르게 움직였다.
파앙─!!
방심 따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를 몰아세우기 위해 공격에 박차를 가하려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아시테르는 상대의 움직임이 커진 시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주먹이 클레이맨타인의 어깨를 강타했다.
순간 몸이 비틀어진 그가 균형을 잃었다.
파바방!!
아시테르의 연속된 공격이 사정없이 클레이맨타인의 몸에 꽂혔다.
“아…….”
강렬한 충격에 온 몸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클레이맨타인이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풀썩 주저앉은 그를 보며 아시테르가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
좌중이 조용해졌다.
“아시테르가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였어……?”
“진짜 소름이 쫘악 끼칠 정도네…….”
“근데 쟤 저렇게 해도 되나……?”
“역시 우리 부단장님!”
“명예 부단장이라고 하시더니… 저 정도 였습니까?”
“베드롱 선임 기사님께서 부단장에 오르지 못하시는 것도… 알 것 같습니다.”
기존에 있던 기사들과 새로 합류한 기사들이 서로 다른 의미로 감탄을 연발했다.
아시테르는 다시 경기장 가운데에 서서 해리크스쪽을 바라보았다.
“크윽……!”
“대장. 상대가 전투 마도사라면 이쪽은 정통 마도사가 나서면 될 일입니다.”
“로다이어. 자네가 나설 생각인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곱슬거리는 금발을 길게 늘어트린 로다이어가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섰다.
화려한 로브를 걸치고 있어 그가 마도사란 것쯤은 쉽게 짐작이 가능했다.
로다이어가 눈을 빛내며 아시테르를 바라보았다.
“전투 마도사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군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상대가 나빴습니다. 전투 마도사는 사실 이도저도 아닌 존재. 지금까지는 제 동료들이 방심해서 졌을 테지만… 저는 다릅니다.”
“…? 동료들이 방심해서 졌다고요……?”
“후후 그럼 아닙니까? 치사하게 자신의 전투 스타일을 숨기고 상대의 방심을 유도해서 기습을 가하지 않았습니까.”
“아아…….”
아시테르는 별다른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
로다이어가 마나홀을 자극하자 거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었다.
그나마 조금 전 싸웠던 클레이맨타인보다는 조금 더 나은 수준.
그것을 본 아시테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실력을 보고 저렇듯 자신 있게 앞으로 나온 거라면 분명 어느 정도 실력에 자신 있다는 소리인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아시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다이어를 바라보았다.
그의 반응에 로다이어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로다이어의 주변에 마력 탄환들이 생겨났다.
성인의 주먹 보다도 더 큰 마력 탄환들이 일시에 아시테르에게로 쏟아져나갔다.
아시테르는 다가오는 마력 탄환들을 보고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신 겁니까!?”
아시테르를 향해 마력 탄환을 쏟아부은 로다이어가 미소를 보였다.
상대는 근접전을 좋아하는 전투 마도사이니, 자신은 이렇게 거리를 벌리며 공격을 가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마력 탄환의 중심에 있던 아시테르는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뭣……?”
“흐음… 이게 다인가요?”
아시테르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로다이어가 발끈했다.
“여유 있는 척 하시기는!”
그가 다시 공격 마법을 펼쳤다.
파앙!
아시테르가 대지를 박차자 순식간에 로다이어와의 거리를 좁혔다.
“아…….”
눈으로 쫓아가기도 힘든 속도로 파고든 아시테르가 로다이어에게 주먹을 날렸다.
따로 방어 마법을 펼칠 시간도 없었다.
주먹에 당한 로다이어가 핏물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크윽……!”
로다이어의 주변으로 떠오른 마력의 탄환들이 다시금 아시테르에게로 쏟아졌다.
뒤이어 로다이어의 주특기 마법이 캐스팅 되었다.
“한번에 끝내 주겠습니다!”
사방에 생겨난 진흙 주먹들이 아시테르를 향해 날아갔다.
그 광경을 본 해리크스와 다른 이들도 로다이어의 승리를 예상했다.
마력 탄환으로 상대의 정신을 빼놓고 진흙 주먹으로 상대를 끝장내는 것은 로다이어의 주특기였다.
거기다 상대는 근접전에 특화된 전투 마도사.
운 좋게 로다이어와 거리를 좁히긴 했으나 다시 벌어진 이상, 로다이어는 결코 두 번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상대가 안 좋았다.”
로다이어는 마법으로 지면을 진흙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되면 상대의 움직임에도 제약이 생길 터.
“자아,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진흙으로 상대를 가두어 놓고 공격을 계속 퍼붓고 있는 로다이어를 보며 해리크스가 승리의 미소를 보였다.
잔뜩 흥분한 로다이어는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러다 상대가 죽을 지도 모릅니다.”
“아아,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요.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로다이어를…….”
해리크스가 나서려는 순간 불길이 치솟았다.
그것을 본 해리크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
화염은 진흙 주먹과 마력 탄환들을 가볍게 부숴 버렸다.
이어 지면을 타고 흘러가 로다이어까지 공격했다.
“뭐… 뭐야 이건……?!”
놀란 로다이어가 뒤늦게 베리어를 펼쳤으나 이미 화염이 번질대로 번진 상태였다.
화염 속에서 걸어 나온 아시테르가 로다이어를 보며 말했다.
“재밌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로다이어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마력을 전력으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마법을 사용해도 화염은 꺼지지 않았다.
진흙으로 뒤덮어 봐도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마치 그것을 양분으로 삼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길에 갇힌 로다이어는 결국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로다이어가 패배하자마자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화염 마도사였나. 그렇다면 내가 상대해 주지.”
이번 상대는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얼음을 다루는 빙결 마도사였다.
그러나 그녀 역시도 아시테르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금방 패배해 버리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어째서 내가 지는 거지……?”
얼음 마법과 화염 마법이 대결한다면 상성상 화염 마도사가 불리하다.
그러나 대결의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여인의 압도적 패배였다.
그녀의 얼음은 아시테르의 불길을 꺼트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시테르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방대하거나 많은 것도 아니었다.
아시테르는 꼭 필요한 마법만 사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작은 불길만으로 여인을 제압해낸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시테르는 간단한 화염 마법으로 뒤이어 나오는 이들을 모두 이겨 버렸다.
충격적인 10연패에 피체의 얼굴도 눈에 띄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일개 호위가… 저 정도 실력을 갖고 있다고……?!”
그가 이를 악물었다.
이스트 왕국에 패배감을 선사하려 했는데 오히려 이쪽이 그런 패배감을 선물받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마르체니에게로 향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마르체니는 놀란 표정조차도 짓질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게벨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니었다.
그가 직접 나서질 않으니 대장인 해리크스도 나서진 않았다.
일종의 자존심 문제였다.
헌데 해리크스를 제외한 모든 실력자들이 저기 있는 단 한 명의 사내에게 패배해 버리고 말았다.
해리크스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왕자님…….”
“…됐다.”
기분이 퍽 상한 피체는 이대로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