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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왔습니다만-269화 (269/424)

269화 사우스 왕국의 음모

아시테르가 한번에 열 명을 이겨 버리면서 피체의 자존심에도 금이 가 버리고 말았다.

이 일이 다른 곳에도 알려지면서 사실상 공개적 망신을 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소문을 파악한 베드롱이 아시테르에게 다가와 말했다.

“너무 쎄게 한 것 아냐? 적당히 져주면서 저들의 체면도 좀 살려 줬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건 일종의 경고였어요.”

“경고?”

“네. 마르체니 공주님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나는 그 왕자 녀석이 공주님한테 보복을 가할까 두렵다…….”

“아니요. 그러진 않을 겁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제 살 깎아 먹기니까요. 그건.”

“흐음……?”

베드롱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시테르가 워낙 확신에 가득찬 표정을 하며 말하니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마음이 불편하긴 하네… 누구라도 여기에 머물 수 있다면… 하다 못해 게벨님이라도 계실 수 있었어야 했는데…….”

베드롱이 게벨과 마르체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근래 부쩍 더 대화가 잦아졌다.

아마 다가오는 이별을 직감하고 조금이라도 더 못다 한 얘기들을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동안 아시테르는 알렌시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속 깊은 얘기를 하다가도 한 번씩 가벼운 얘기들도 나눴다.

아시테르를 바라보던 알렌시아가 입을 열었다.

“아시테르.”

“왜?”

“이제 너도 마법기사단의 단장이 되었잖아.”

“그렇지?”

“우리 왕국에서 마법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위치가 갖고 있는 힘은 솔직히 커.”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그건 왜?”

“그 정도 위치에 올랐으니 이제 그만 다시 프로메테 가문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아?”

“프로메테 가문으로 ‘돌아간다’고……?”

아시테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알렌시아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너는 본래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이잖아. 어머님인 아레나님도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이고.”

“그건 그렇지.”

“거기다 형인 테오도라님도 프로메테 가문 사람이고.”

“맞아. 그러고보니 우리 형도 못 본 지 오래되었네. 잘 지내고 있으려나…….”

테오도라는 트라이포스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더욱 바빠졌다.

트라이포스가 수행하는 임무들은 워낙 극비이다 보니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트라이포스는 존재한지 오래 되었어도 암암리에 조직된 아시테르의 언노운 마법기사단보다 정보가 없는 곳이었다.

“아무튼! 내 얘기에 집중해. 이제 다시 프로메테 가문으로 돌아가자. 프로메테 가문의 일원이 되는 거야 아시테르!”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는 아니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순 없잖아? 프로메테 가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너의 뒤에 이제 ‘프로메테’라는 이름이 자리할 거야. 현재 프로메테 가문도 좋지 않은 상황이니 네가 말하면 충분히 받아 주지 않을까?”

“흐음… 내 어머니는 분명 프로메테 가문의 사람이지만… 나는 아닌 걸?”

“뭐……?”

“난 유년 시절을 던전에서 보냈어. 프로메테 가문에서 보낸 게 아니라. 거기다 할아버지께서도 나를 받아 주기에 여러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괜히 곤란한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때는 네가 아카데미 학생일 때의 얘기잖아? 지금은 어엿한 위치에 올라섰으니…….”

“지금까지 프로메테 가문이 아니어도 잘 지내 왔는 걸. 물론 할아버지와 테오도라 형이 날 도와줬던 건 꼭 은혜를 갚을 생각이야. 하지만 그건 내가 굳이 프로메테 가문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그치만…….”

“게다가 너랑 결혼하게 된다면 체르도네 가문도 나의 가문이 되는 것 아냐?”

“우리 가문이?”

“응.”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렌시아와 결혼하게 된다면 체르도네 가문도 가족이나 다름없다.

“그때는 우리가 함께니까. 아버지가 프로메테 가문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흐음… 솔직하게 말할게 아시테르…….”

“그래.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가 궁금했어. 근래에 들어 고민이 잦았던 것도 혹시 이 문제 때문이야?”

“맞아… 우리 가문에서는 여러 가지를 요구해. 그중에서도 가장 걸리는 건 아시테르 너의 신분이야.”

“아아. 그래서 내게 프로메테 가문으로 들어가라고 말 한 거구나.”

“그렇게 되면 명목상으로는 귀족이 되는 거니까…….”

“알렌시아. 너에게도 그런 점이 중요해?”

“아니. 솔직히 나한테는 그다지… 다만 나는 한 가지 욕심이 있어.”

“그게 뭔데?”

아시테르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함께 할 수 있는 거라면 함께 이루어가고 싶었다.

만약 그 일에 아시테르가 프로메테 가문으로 들어가는 게 꼭 필요한 일이라면, 그렇게 할 생각도 있었다.

알렌시아가 눈빛을 달리하며 말했다.

“나는 우리 가문을 이스트 왕국의 제일로 만들고 싶어.”

“5대 가문을 제치고?”

“응. 그렇게 하고 싶어. 그래서 나는 이대로 군단장의 자리까지 올라갈 생각이야. 그러니까 도와줘.”

아시테르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알렌시아가 이렇게 먼저 도와 달라는 말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바람을 들은 아시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정말 고마워 아시테르.”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의 품에 안겼다.

아시테르가 그녀를 껴안자 알렌시아가 더욱 깊이 고개를 파묻었다.

그녀의 머리칼에서 좋은 향기가 올라왔다.

아시테르의 손이 부드럽게 알렌시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살짝 고개를 든 알렌시아가 아시테르와 눈을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가까워진 입술이 포개어진다.

아시테르의 손이 알렌시아의 어깨선을 따라 내려가며 허리춤을 감싸 안았다.

밤의 무르익은 분위기가 두 사람의 감정선을 조금씩 두드리기 시작했다.

환한 달빛이 창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의 얼굴을 밝혔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한 침대에 누워 서로를 그윽히 바라봤다.

달빛에 비친 눈동자가 아름다워 아시테르가 입술을 맞댔다.

알렌시아가 그런 아시테르를 슬쩍 당겨 온다.

그녀의 팔목을 잡아 끈 아시테르가 꼬옥 깎지를 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진한 밤을 보내며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사우스 왕국에서 머무는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관계를 더욱더 깊게 가진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도 부쩍 함께 붙어 다녔다.

그를 본 아일리시가 인상을 굳혔다.

사실 그녀도 아시테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피체의 개인호위들이 제 9기사단에게 완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녀도 호기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안 그래도 이스트 왕국에 붙잡혀 있으면서 그들의 이것저것을 보며 관심이 늘어났던 아일리시였다.

몇몇 사람들은 트럼프라는 이름을 달고 한심하게 붙잡혔다는 비난을 가했었으나, 그녀를 붙잡아 갔던 이들이 언노운 마법기사단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원색적인 비난은 피할 수 있었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은 아브렐 협곡 전투 이후로 사우스 왕국에 완전히 그 위명을 떨쳤다.

거기다 아브렐 협곡 전투 이전에 그들이 수행한 임무들이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사우스 왕국의 강력한 견제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아시테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일리시가 알아 버린 것이다.

“흐음…….”

아시테르가 이곳에 있다는 점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그때 아일리시가 있는 곳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그냥 잠시 생각 좀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트 왕국에서 돌아온 뒤로 생각을 달고 사는군.”

“네 뭐… 그렇게 되었죠. 어지간히 욕을 먹은게 아니라서요.”

“후후후후,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지. 이제 그만 들어가지.”

거친 인상의 사내, 네이트워가 웃으며 말했다.

네이트워는 클로버 군대를 이끄는 트럼프 중 한 명이었다.

오늘 회의에는 네 명의 트럼프 모두가 모인다.

거기다 다른 주요 인사들까지 회의장에 착석해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놈들은 결코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운이 좋았어. 우리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단장까지 이곳에 있었을 줄이야.”

롤스로체카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가 움직이는 스페이드 군대는 추적에 능한 자들이 많았다.

거기다 조커로 불리는 헤리퍼가 보조 나선다.

“이번에는 확실히 끝내기 위해 내가 붙도록 하지.”

제이스쿠스가 손을 들어 말했다.

강력한 화력을 지닌 제이스쿠스의 다이아 군대까지 붙는다.

누군가는 겨우 왕실기사단 하나를 잡는데 이만한 군대를 투입하냐는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누군지 알면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과연 잘한 일일까…….’

본래 작전은 이렇게까지 치밀하고 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 사이에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작전은 더욱 세밀하게 준비되었다.

언노운 마법기사단장과 일섬 마법기사단장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기회.

사우스 왕국 수뇌부에서 이런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이번 회담으로 이룬 협상도 어디까지나 명목상일뿐, 그들은 호시탐탐 이스트 왕국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두 명의 단장이 와 있었으니…….

“상대는 제 9기사단. 여기서 주목 할 인물은 게벨 단장뿐이다. 나머지는 그저 평범한 기사들일 뿐이야. 그리고 역시나 우리가 제일 주의해야 할 인물은 여기 두 명.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단장과 일섬 마법기사단의 단장. 이 두 사람은 무조건 생포해야 한다. 생포가 어렵다면 죽여도 좋다. 두 사람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이스트 왕국은 크게 타격을 입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는군. 겨우 이만한 병력을 잡는데 이렇게까지 많은 병력들이 투입되어야 한다니…”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다. 절대로 놓쳐선 안 돼. 이곳에서의 정보가 이스트 왕국에 들어가도 곤란하다. 그러니 정보를 관리함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한다.”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야 말로 이스트 왕국을 자신들의 발밑에 둔다.

오랜 숙원을 이룰 때였다.

이스트 왕국이 위태롭고 약해진 지금이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을 보여 주며 사우스 왕국 군대를 물리게 하긴 했지만, 이것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에 불과했다.

그들의 방심을 유도하며 안에서부터 붕괴시키기 위한.

그리고 이곳에 있는 두 단장의 죽음은 이스트 왕국을 커다란 충격으로 빠트릴 것이다.

이스트 왕국 측에서 분노해 볼모로 간 사우스 왕국 왕족을 죽여도 상관없다.

이미 그녀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건너간 것이니까.

처음부터 모든 것이 사우스 왕국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정확히 3일 뒤. 작전을 시작한다.”

제이스쿠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에도 아일리시는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분명 사우스 왕국을 위해서라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아시테르를 생각하니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단원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아일리시를 대함에 있어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오히려 귀빈 대접하듯 잘 대해 주었다.

고문을 가한 것도 아니었고, 따로 무언가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아일리시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그런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이곳에 돌아와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우스 왕국에 붙잡혔던 이스트 왕국 귀족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아일리시를 보자마자 자신을 죽여 달라 부탁하는 자들도 있었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들이 스쳐지나가자 아일리시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

마음이 답답해진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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