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포위망 (2)
롤스로체카가 이끄는 스페이드 군대의 추격은 집요하고 무서웠다.
안개속에서 시작되는 기습 공격들은 생각 이상으로 아군의 피로도를 증가하게 만들었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나선다 해도 소용없었다.
안개에 둘러 싸인 바람에 모든 방위를 다 방어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적들의 공격이 시작될 때마다 아군 병사들의 부상도 속속들이 나타났다.
“상황이 좋지 않아…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할 거다.”
거듭된 전투로 기사들도 모두 지친 상태.
거기다 부상까지 떠안고 있어 이런 험준한 산맥 안을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선임 기사들까지 부상을 입어 정말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베드롱이 아시테르를 쳐다보았다.
아시테르도 이곳 안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느라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알렌시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아시테르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그의 몫까지 해냈으니,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고 있을 터다.
“차라리 시원하게 한바탕 전투를 치르는게 더 편하겠어…….”
“이렇게 가는 것보다는…. 진짜 그렇겠네요… 피 말려 죽는 것보다 제대로 싸우고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후우… 너희들은 말할 힘이라도 있는가 보구나…….”
기사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잔뜩 피폐해진 그들의 얼굴을 보며 아시테르도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안개에서 벗어나 이스트 왕국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 생각으로 온통 머릿속이 지배되고 있었다.
그때 베드롱이 게벨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단장님.”
“무슨 일인가.”
“우리들이야 그렇다 쳐도 아시테르와 알렌시아 단장은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게벨이 고개를 돌렸다.
베드롱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묻는 것이다.
“그냥…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점점 우리들이 저 두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요. 이러다가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저 두 사람까지 사우스 왕국에 붙잡히고 말 겁니다.”
“두 사람과 우리들이 나눠서 움직이자는 얘기냐.”
“네. 그렇게하면 적어도 저 두 사람은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자네답지 않은 말을 하는군. 그동안 적들의 추격에 자네마저 지치기라도 한 건가?”
“안 지치면 그게 인간이겠습니까…….”
“돌아가면 다들 정신 강화 훈련부터 시켜야겠어.”
“하하하하하하. 다른 때에 그런 말을 들으면 우울했을 텐데, 오늘은 그 말이 그토록 듣기 좋을 수가 없군요.”
“살아 돌아가야 한다 베드롱. 그런 약한 소리는 말아라.”
“죄송합니다…….”
베드롱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게벨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어딜가나 적이 있고 어디에도 안개는 존재했다.
마치 놈들의 시선이 이쪽을 끊임없이 엿보고 있는 듯한 기분.
그 께름칙한 기분 속에서 희망마저 없는 앞길을 일단은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약한 소리 마세요 베드롱 형. 우리들은 무조건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아시테르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말했다.
그 또한 베드롱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할 생각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시테르는 이들과 함께 돌아갈 것이다.
잠깐 휴식을 취한 제 9기사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곳에 오래 머물면 다시금 적들에게 기회를 주고 만다.
결국 그들은 쫓기듯 일어나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인간이 이런 마법을 펼칠 수가 있는 겁니까……?”
“온 산맥을 안개로 뒤덮어 버리다니… 이것 때문에 아주 환장을 하겠다니깐…….”
“놀랄게 뭐가 있습니까. 당장 우리 옆에 있는 아시테르 부단장님의 마법도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수준인데…….”
“하긴 그건 또 그래…….”
그때 게벨이 팔을 들어 기사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아시테르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모두 숙여요!!”
아시테르의 외침에 기사들이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슈콰아아아아앙──!!
거대한 철검이 제 9기사단의 위로 스쳐지나갔다.
가볍게 잘리는 나무들을 보며 기사들의 얼굴이 순간 사색으로 변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렇게 잘려 나가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자신들이 될 뻔했다.
파콰아아앙!!!
어어서 커다란 격돌음이 들렸다.
거세게 몸을 일으킨 불길이 날아오는 철창을 막아낸 것이다.
“호오… 내 마법을 불길로 막아 내다니… 프로메테 가문의 불꽃인가?”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남성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깊이가 지금까지 마주쳤던 적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강철 마법을 사용하는 마도사.
그중에 이만한 수준의 마력을 내비출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이아 군대의 대장 제이스쿠스…….”
그를 알아본 게벨이 침음성을 삼켰다.
마침내 트럼프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제이스쿠스가 아시테르를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훌륭했다. 우리들을 따돌리고 설마하니 이쪽으로 다시 붙었을 줄이야.”
“제법 먹히긴 했나보군요.”
“그래. 덕분에 제대로 헛걸음하고 오는 길이다.”
“아쉽네요. 조금 더 있다 오시지.”
“그럴 수야 있나. 이렇게 좋은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제이스쿠스가 팔을 들어올리자 거대한 철검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을 본 제 9기사단의 단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에 있는 이는 아시테르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의 실력자.
그 말은 즉, 아시테르를 상대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얘기였다.
“모두 긴장해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전투가 시작될 거다.”
“이것 참. 말이 씨가 되어 버리고 말았군요…….”
“덕분에 제대로 싸워보긴 하겠어.”
“차라리 잘 됐지 뭐!”
그들이 전의를 불태우며 앞으로 나섰다.
제이스쿠스의 다이아 군대 전원이 이곳으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뒤편에 시립해 있는 부대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시테르의 시선을 의식한 제이스쿠스가 구태여 설명을 더해 주었다.
“뒤에 있는 것은 나의 정예 기사단이다. 너희들 따위를 상대하는데 쓰기엔 아까운 인재들이지.”
“아하, 그랬습니까.”
아시테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일단은 저기 있는 기사단부터 건드려 적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
생각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옮긴다.
아시테르가 발 끝에 마력을 집중시키며 대지를 박찼다.
한순간에 폭발적인 속도를 낸 아시테르가 금방 제이스쿠스의 기사단쪽으로 접근했다.
후우웅─!!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제이스쿠스가 마법으로 아시테르를 막아 내려 했다.
아시테르가 허공을 박차며 방향을 틀었다.
그 기묘한 마법에 제이스쿠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중에서 저런 식으로 방향을 틀어……?”
놀란 것도 잠시 제이스쿠스의 강철들이 아시테르를 쫓았다.
그 사이 아시테르는 이미 적진의 한 가운데에 안착해 있었다.
“어디 한번 막아 보시겠어요?”
적진의 한 가운데에서 아시테르가 화염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화염이 주변의 적들을 집어삼켰다.
이어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불기둥이 상대 기사들을 공격했다.
“저 마법은……?!”
제이스쿠스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저 화염 마법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과거 수많은 사우스 왕국군의 목숨을 앗아간 마법이었으니까.
그들중에는 제이스쿠스의 수하들도 있었다.
“아레나의 마법…! 네놈… 홍련의 단장이랑도 어떤 연관이 있는 거로구나!”
제이스쿠스가 이를 악물며 마법을 펼쳤다.
수백 개의 철침이 아시테르를 향해 날아갔다.
이어 거대한 철검이 두 개로 나뉘며 아시테르를 노렸다.
다가오는 철침들을 확인한 아시테르가 불길을 일으켜 벽을 만들어 냈다.
그가 만들어 내는 화염엔 마력의 밀도가 높건만, 제이스쿠스도 이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철침은 불길에 녹지 않고 끝까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를 확인한 아시테르가 재빨리 몸을 틀었다.
그러자 머리 위에 떠있던 철검이 수직으로 움직였다.
콰광!!!
철검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검이 닿은 곳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대지가 움푹 꺼졌다.
아시테르가 미처 대지에 발을 딛기도 전에 다른 철검이 공격을 이어 갔다.
휘리리링─!
한 바퀴 회전한 아시테르의 몸에서 불길이 흘러나왔다.
이를 본 제이스쿠스가 손바닥을 모았다.
그러자 아시테르를 중심으로 철벽들이 솟아났다.
“가둬 두면 그만이다.”
철벽은 순식간에 아시테르의 팔방을 점하며 압박했다.
그러나 가만히 당해 줄 아시테르가 아니었다.
그가 만들어 낸 불덩이들이 철벽을 연속으로 때렸다.
이어 총알처럼 튀어나간 아시테르가 발로 철벽을 찼다.
콰아앙!!!
순간적인 폭발력에 철벽이 뒤로 밀려났다.
그 틈을 이용해 아시테르가 마력을 다시 운용했다.
이번에는 반격의 시작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불길이 제이스쿠스의 발밑에서 시작됐다.
“……!”
불길을 발견한 제이스쿠스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방어 마법을 펼쳤다.
철판이 불길을 막고 철검이 다가오는 불덩이들을 베어냈다.
이어진 불꽃의 소용돌이가 제이스쿠스를 덮쳤다.
“호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제이스쿠스가 다시 두 손을 모았다.
거대한 철상(鐵像)이 몸을 일으켜 제이스쿠스를 보호했다.
이를 확인한 아시테르가 커다란 오브를 만들어 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오브가 하늘 위로 솟자 붉은 비가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불꽃으로 만들어내는 비라…….”
제이스쿠스가 이를 보며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런 식으로 화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불꽃으로 된 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며 아군을 공격했다.
“모두 공격을 멈추고 방어 마법을 펼쳐라!”
가만히 두기에는 적의 공격이 지나치게 위협적이었다.
아시테르가 만들어 내는 불꽃은 그냥 불꽃이 아니었다.
마력의 밀도가 너무나 높아 쉽게 꺼지지도 않았을뿐더러, 한번 불길이 옮겨 붙으면 지속적으로 타올랐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제이스쿠스도 아시테르의 불꽃은 함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일단은 저것부터 막아야겠군…….”
철로 된 방패가 하늘을 향해 수평으로 세워졌다.
이어 인간 형상의 철상이 검을 들어 오브를 공격했다.
그 순간 제이스쿠스를 향해 전격이 날아들었다.
“흠……?!”
쩌저저정──!!
빈틈을 노린 알렌시아의 일격은 제이스쿠스의 허를 찔렀다.
순간적으로 대응이 느렸던 제이스쿠스가 전격에 당한 것이다.
“크으으윽……!”
“제이스쿠스님!!”
“대장님─!!!”
놀란 수하들이 제이스쿠스쪽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제이스쿠스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위치를 지켜라.”
고통으로 인상을 찌푸린 제이스쿠스의 시선이 알렌시아쪽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그쪽도 있었지. 일섬 마법기사단의 단장…….”
사우스 왕국에서 이번 일에 만전을 기하는 이유.
골칫거리인 언노운 마법기사단의 단장인 아시테르와 일섬 마법기사단의 단장인 알렌시아를 꼭 이곳에서 붙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빠지는 것만으로도 이스트 왕국에선 전력의 손실이 어마어마해진다.
거기다 이스트 왕국과 대화의 문을 엶으로써 포섭이 시작되었다.
아마 지금쯤 어느 정도의 성과가 나타났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사우스 왕국이 움직이기로 마음 먹은 것일 테다.
알렌시아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보며 제이스쿠스가 혀를 찼다.
“쯧…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단장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인데 말이야. 이제 그만 도와주겠나?”
제이스쿠스가 뒤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동안 뒤에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네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뿐이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스페이드 군대의 대장 롤스로체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