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사우스 왕국의 트럼프
롤스로체카가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전장의 분위기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두 사람의 출전이었다.
하나의 전장에 이렇듯 두 명의 트럼프가 나서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같이 싸워본 게 언제였지?”
“15년은 된 것 같은데.”
“그 정도 밖에 안됐나?”
“웨스트 왕국과 전쟁을 치를 때 그렇게 하지 않았나?”
“흐음… 그날 이후로 같이 싸우게 된 거라니…….”
롤스로체카가 아시테르쪽을 쳐다보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아시테르는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것은 알렌시아도 마찬가지.
“이런 새파란 애송이들 때문에 우리 둘이 전장에 나서게 되다니… 칭찬할만한 일이로군.”
“하트 군대의 한복판에서 아일리시를 납치해 간 녀석이다. 쉽게 보지 말아.”
“누가 쉽게 본다고 그러냐. 저기 있는 저놈. 내 마법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저 정도로 움직이고 있는 거다.”
롤스로체카가 눈빛을 달리했다.
제이스쿠스와 싸우는 모습은 롤스로체카도 지켜봤다.
마력의 운용부터 시작해 그때마다 변환하는 마법 스타일, 근접전부터 시작해 원거리 싸움까지 능통했다.
그야말로 올라운더라 불릴 수 있을 만한 마도사였다.
전투 마도사인 것 같으면서도 원거리 싸움에서도 어느 것 하나 뒤처지는 능력치가 없다.
심지어 아시테르는 나이까지 어렸다.
“저 녀석은 무조건 여기서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왕국의 후환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동감이다.”
제이스쿠스와 롤스로체카가 섰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두 사람을 마주보고 있었다.
네 사람 사이에 전운이 감돌자 다른 이들이 슬쩍 자리를 비켜 주었다.
괜히 근처에 머물다간 전투에 휘말릴 터다.
선수를 친 것은 알렌시아쪽이었다.
그녀가 만들어 낸 낙뢰가 제이스쿠스를 노렸다
쩌정─!
낙뢰가 방패에 가로막혔다.
롤스로체카의 마력이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아시테르가 불길을 일으켜 롤스로체카가 만들어 내는 안개를 다 태워 버리려 했다.
“호오.”
발빠른 대처에 롤스로체카가 아시테르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침대에 눕듯, 안개 속으로 몸을 뉘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롤스로체카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시테르는 당황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롤스로체카가 만들어 낸 안개 속이라 다른 이들의 마력을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것뿐이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정신을 집중하니 안개 속에서도 마력의 흐름이 뒤틀리는 것이 보였다.
“이쪽.”
아시테르가 만들어낸 화염이 한쪽을 휩쓸었다.
안개에 모습을 숨기며 움직이던 롤스로체카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내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것인가……?!’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롤스로체카의 마법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상대의 입장에선 안개 속을 혼자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딨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위협적인 적과 맞붙는 기분.
거기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들.
그 공격들을 받아 내다 보면 서서히 절망에 물들어 간다.
헌데 눈앞에 있는 아시테르는 달랐다.
롤스로체카가 만들어 낸 안개 속에서도 그는 롤스로체카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내고 있었다.
거기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들도 무리 없이 받아내고 있다.
“이스트 왕국에는 늘 이런 인재들이 쏟아지는군…….”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저만한 인재들이 사우스 왕국에서 태어났다면…….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뒤를 이어줬다면…….
“쯧… 이제와 이런 생각들을 해서 무엇하겠나…….”
사우스 왕국의 젊은 친구들은 놀랍게도 나태함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탐욕이 없다.
롤스로체카나 제이스쿠스와 함께 했던 세대의 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스트 왕국과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웨스트 왕국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 같은 이유에는 사우스 왕국의 지리적 특성도 있었다.
갖고 있는 자원이 많지 않은 사우스 왕국은 어떻게 해서든 다른 왕국의 자원 풍부한 땅을 점령하고 싶어 했다.
그나마 이제는 빈번히 나타나는 던전을 이용해 자원을 수급하고 마도 공학이라는 분야를 발전시켜 나름대로의 성장을 이루어 가고 있지만, 롤스로체카 세대의 귀족들은 여전히 이스트 왕국만큼은 점령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그들이 사우스 왕국으로 밀고 들어올 터였다.
거기다 이스트 왕국에는 많은 자원이 있다.
그것들을 차지하게 된다면 사우스 왕국은 더더욱 부국강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고지가 눈앞이다.”
애초에 발할라가 이스트 왕국을 뒤집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사우스 왕국이었다.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긴 했지만 사우스 왕국에서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발할라가 이스트 왕국을 흔들 수록 그들에게는 이득인 일이었다.
정말로 발할라가 그들이 말하는 혁명에 성공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내란으로 이스트 왕국의 힘은 약해져 있을 테니까.
애초에 사우스 왕국의 입장에서는 발할라가 성공하든 성공하지 못하든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조용히 그들이 약해지길 기다렸을 뿐.
물론 그동안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스트 왕국엔 고질적인 문제들이 몇 있었다.
이스트 왕국과 잦은 전쟁을 치뤘던 사우스 왕국이었기에 그것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사우스 왕국은 그 문제들에 파고들어 본격적인 포섭에 나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이용해 내부 갈등을 더욱 조장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오랜 기간에 걸쳤던 것들이 이제는 결실을 맺을 때였다.
“그러니 방해하지 말거라……!”
롤스로체카가 손을 펼치자 양쪽에서 나타난 안개의 거인이 아시테르를 공격했다.
거인의 주먹을 피한 아시테르가 불길로 몸을 휘감았다.
이어 그가 허공으로 도약해 거인의 몸을 디뎠다.
슈와아아아──!!
불꽃이 튀고 아시테르가 안개 속을 질주했다.
그것을 본 롤스로체카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저것은 괜한 행동이 아니었다.
롤스로체카의 마력으로 뒤덮인 이곳을 자신의 마력으로 점철시키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으냐.”
안개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색이 까맣게 물들며 불길을 차츰 밀어내기 시작했다.
“재밌는 걸 보여 주도록 하마.”
롤스로체카의 전신에서 마력이 폭발하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개에 그의 마력이 흡수되듯 빨려들어 갔다.
그러자 먹구름처럼 변한 안개가 아시테르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어 먹구름에서 튀어나온 안개의 덩어리들이 아시테르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불길로 막아보려 해도 안개 덩어리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다.
아시테르가 불꽃을 휘감으면 안개 덩어리들이 그 불길을 갉아먹듯 없애 버렸다.
곧이어 수십 개의 안개 덩어리가 쏟아져 내렸다.
“이건 좀 벅찬데…….”
다가오는 수십 개의 안개 덩어리.
그것들 모두 어마한 양의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불길로 계속해서 막아내는 것도 의미 없는 소모전일 뿐이었다.
결국 아시테르도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힘을 따로 아껴둘 여유도 없었다.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흘러나온 마력이 순식간에 공간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붉은 마력이 사방천지를 메웠다.
그것을 본 롤스로체카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자신이 마력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 공간이었다
이를 아시테르도 마력을 이용해서 그 공간을 깨트리려 하고 있었다.
“아주 발칙한 짓을 하는구만 그래…….”
이것은 말이 쉽지 결코 해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의 색깔로 온통 칠해진 도화지를 찢어내는 것은 쉽지만, 그 위에 색을 입히는 것은 어렵다.
헌데 아시테르가 지금 그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나의 공간 안에서……!”
안개가 악령처럼 모습을 변화해 아시테르를 공격했다.
아시테르의 전신에서 폭사된 마력이 사방으로 퍼졌다.
여기저기 치솟아 오른 불꽃이 순식간에 이곳을 염화도(炎火道)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슈와아아아아아──!!
아시테르의 위로 커다란 붕새가 떠올랐다.
깃털이 불꽃으로 이루어진 붕새가 커다란 눈동자로 롤스로체카를 정확히 응시했다.
“저건 뭐냐……?”
놀란 롤스로체카가 황급히 마력을 둘러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붕새가 날개짓을 하자 바람 대신 불길이 번졌다.
깃털에서 흘러나온 찬란한 빛깔이 먹구름 같은 안개를 걷어냈다.
그것을 본 롤스로체카가 기함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천지에 저런 마법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불길로 온 몸을 뒤엎은 붕새가 비상했다.
그러자 붕새의 깃털에서 흘러나온 불꽃이 대지를 휘감았다.
화르르르르르르릉──!!
콰라라랑!!!
롤스로체카의 공간을 깨트린 것도 모자라 더 많은 공간까지 온통 아시테르의 마력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를 확인한 제이스쿠스가 몸을 돌렸다.
“롤스로체카!”
거대한 철검이 붕새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무려 다섯 개나 되는 철검이 붕새를 노렸다.
그러나 붕새는 유려한 움직임으로 날아오는 철검들을 피해버렸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붕새의 커다란 울음이 대기를 울렸다.
울음에 따라 요동친 화마가 적들을 집어삼켰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수준의 마법.
그것을 본 롤스로체카가 이를 악물었다.
“제이스쿠스!! 지금 여기서 저 자식을 죽여야 한다!! 저놈은 절대로 살아돌아가선 안 돼!!”
롤스로체카의 외침에 제이스쿠스도 동감하는 바였다.
하지만 아시테르만 상대할 수도 없었다.
당장 제이스쿠스의 앞에 있는 인물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쩌저저정─!!
화염과 어우러지는 낙뢰.
여기저기 내려치는 뇌전이 사우스 왕국군을 노렸다.
그녀 또한 마력으로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호오… 두 명이 동시에…….”
제이스쿠스의 안광이 빛났다.
그도 본격적으로 마력을 싣기 시작하니 거대한 철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개의 손에 무기를 쥔 철상이 붕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가 철상을 감쌌다.
아시테르가 이를 악물고 마력을 컨트롤 했다.
붕새가 지나는 곳마다 불길이 일며 사우스 왕국군을 덮쳤다.
“지금이에요……!”
아시테르가 뒤편의 게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적의 머리를 깨부순 게벨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입니다 게벨 단장님. 이틈에 빠져나가세요!”
“하지만 우리가 가면 자네들은…….”
“저희들은 걱정하지 말고 지금 기회를 놓치지 말아 주십시오. 저들의 시선이 우리들에게 빼앗긴 지금이 기회입니다.”
“아시테르…….”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와 알렌시아는 걱정하지 마시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게벨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도 두 명의 트럼프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이쪽에 신경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저들의 손에 자신들이 붙잡혔다간 아시테르와 알렌시아도 마음 놓고 싸우지 못할 터다.
거기다 게벨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단원들도 부상이 심각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싸우는 수준으로 그들은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판단을 내린 게벨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안하다 아시테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도 제 9기사단의 부단장입니다. 단원들과 단장을 위해 얼마든지 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아시테르가 마력을 한바탕 쏟아냈다.
그러자 붕새가 마력의 길을 따라 비행했다.
“피해라!!”
“물러나!!!”
“도망쳐라! 도망쳐─!”
붕새의 움직임을 본 사우스 왕국군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 아시테르가 다른 한쪽으로 거대한 화염구를 발사했다.
화염구는 십수 명의 기사들을 태워 버리며 모습을 감췄다.
“지금입니다!”
한순간 퇴로를 만들어 준 아시테르가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