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제 9기사단의 최후 (1)
게벨과 제 9기사단이 한곳으로 움직였다.
그들의 신속한 움직임에 순간적으로 적들도 그들을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깨닫고 제 9기사단을 붙잡아 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그들의 뒤는 거센 불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제 9기사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추격해 가는 자들이 있었다.
아시테르는 그들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롤스로체카가 아니었다.
“건방진 놈!!! 감히 나를 두고 한눈을 팔다니!!”
이미 휘둘릴 대로 휘둘려 준 롤스로체카였다.
잔뜩 분노한 그가 초위 마법들을 펼쳤다.
제 9기사단이 이곳을 빠져나가고 있는 모습은 롤스로체카의 두 눈에도 보였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겨우 저런 기사단보다 눈앞에 있는 아시테르가 더더욱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제 9기사단을 쫓는 것보다 여기서 확실하게 아시테르를 잡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이는 제이스쿠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 역시도 별도의 기사들에게 간단한 명령만 내렸을 뿐, 이곳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시테르와 알렌시아가 제이스쿠스와 롤스로체카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제 9기사단은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뒤에 쫓아오는 적들이 있음을 확인했음에도 그들은 일단 달렸다.
“단장님……!”
“무슨 일인가!?”
“저희는 여기 남겠습니다.”
“뭐?!”
게벨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다리를 절뚝이던 기사 한 명이 검을 고쳐 잡고 몸을 돌렸다.
이어 한쪽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던 마도사 두 명도 함께 몸을 돌렸다.
“저희들은 함께 가 봤자 피해만 될 뿐입니다. 차라리 저희는 여기서 적들의 발이라도 붙잡아 두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포기하지 마라 너희들!”
“이건 포기가 아닙니다 단장님. 조금이라도 다른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저희들의 의지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게벨이 그들을 챙기려는데 베드롱이 게벨을 붙잡았다.
“단장님…….”
“이것 놓아라 베드롱!”
“이성을 찾으십시오 단장님! 지금은 저 녀석들의 말대로입니다. 부상병들을 모두 데려가려면 자연스럽게 이동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너는 지금 저 녀석들을 사지에 두고 가자는 얘기냐?!”
게벨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베드롱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것은 베드롱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질끈 깨물고 있었다.
“저 녀석들의 마음도 헤아려 주십시오…! 괜히 자기들이 따라나서다 다른 동료들까지 죽게 할까 봐… 그래서 죄책감까지 느끼게 될까 봐 저러는 것 아닙니까!”
“사지에 두고 온 것은 아시테르 부단장과 알렌시아 단장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너희들 모두를 책임질 의무가 있어!”
“그건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장님.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상황이 이렇게 거지같은 걸. 우리들은 다른 동료들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대로 살아 돌아가 주십시오.”
“맞습니다, 게벨 단장! 아시테르 부단장과 알렌시아 단장님이 저기 남아서 본대를 막아 주고 있는데 우리가 겨우 추격대 따위 못 막을까 봐요!”
“후후후 이대로 가 주십시오. 우리들도 즐겁게 적들을 죽여 볼 테니까.”
벌써 몇몇 기사들이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후방으로 움직여 버렸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추격은 계속될 테니,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자처해서 나선 것이다.
먼저 나선 이들뿐만 아니라 남겠다는 이들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게벨은 늘 모든 부상병들까지 잘 챙겨 왔다.
살릴 수 있는 자들이라면 다 살리고자 했다.
그것은 제 9기사단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
게벨은 지금도 부상당한 모두를 끌어안고 돌아가려 하고 있다.
하지만 기사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이 지금 살아 돌아가고자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은 자칫 다른 동료들의 목숨까지도 위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벨 단장과 아시테르 부단장은 이런 말을 싫어하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들은 아시테르 부단장이나 알렌시아 단장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처럼 갖고 있는 힘이 강해 압도적으로 적들을 무력화 시키며 동료들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은 아니란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만은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아시테르 부단장이 왜 저렇게 목숨을 걸고 열심히 싸우는지! 알렌시아 단장이 왜 우리들을 위해 아시테르 부단장과 함께 사선에 남았는지! 우리들도 똑같이 그 마음을 느끼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대로 살아 돌아가 주십시오. 그래서 사우스 왕국의 이 비열한 짓거리를 낱낱이 까발려 주십시오!! 그동안 우리들은 남아서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겠습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상황, 그래서 최대한 웃는 모습으로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입꼬리는 웃고 있어도 그들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얼굴을 범벅였다.
그들을 보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울음을 참아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으아아아─!! 왜 화가 나는데 이렇게 눈물까지 나는 거냐!!”
“제기랄…! 제기라아아아알!!!”
“사우스 왕국! 네놈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다!”
그들의 절규에도 후방에 있던 이들이 떠나갔다.
제일 뒤편에 있던 선임 기사 파르소가 몸을 돌렸다.
그는 게벨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마지막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단장님. 저 왕실기사 파르소. 단장님을 모시게 되어 굉장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같은 동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제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울먹이는 것을 참고 파르소가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게벨이 그 자리에 서서 파르소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 또한 파르소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나 또한 그대와 같은 수하를 두어 영광이었다…….”
한쪽 귀가 잘려 나가고 왼쪽 팔은 넝마가 되어 있을 정도로 망가진 파르소의 마지막 모습.
그 모습을 끝까지 담기 위해 게벨이 시선을 떼지 않았다.
파르소만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위해 다시 적진으로 나아가는 그 모든 병사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기 위해 게벨은 우두커니 서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단장님… 심정은 알지만 이제 그만 우리들도 움직여야 합니다.”
베드롱이 결국 무겁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게벨도 입을 열었다.
“그래… 이만 움직이도록 하자.”
낮게 가라앉은 게벨의 목소리.
그 심정을 십분 헤아릴 수 있기에 모두가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비명소리가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비명소리가 과연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모두가 같은 심정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저 비명 소리가 남았던 동료들의 것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세상에 편안한 죽음 따위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게 남은 동료들에게 돌아가길 바랬다.
작은 희망 따윈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들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길 바랐다.
게벨은 남은 이들을 이끌고 러셀 산맥을 넘었다.
수많은 동료들이 죽고 이제 남은 동료들은 40명 남짓.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 기적이라 말했을 것이다.
적지 한복판에서 수만의 병력들이 이들을 쫓았다.
그런데 무려 40명이나 살아서 러셀 산맥을 넘은 것이다.
산등성이를 넘었음에도 아시테르의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그 불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저것은 어쩌면 희망의 불꽃이었다.
저 불꽃이 계속 타오르는 한, 아시테르가 살아있다는 방증이 될 터다.
“꼭… 꼭 살아서 만나자 아시테르……!”
베드롱이 불꽃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때 앞서 가던 기사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
“단장님!! 아군입니다! 아군이에요!!”
아군이라는 말에 모두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어느새 사우스 왕국과 이스트 왕국의 국경지대까지 오긴 했지만 벌써 아군이 자신들을 데리러 왔을 줄은 몰랐다.
“역시나!! 우리들의 일이 이스트 왕국에도 전해졌나 봅니다…! 그래서 아군 기사단을…….”
“그래. 누군가 소식을 전해 준 모양이다. 아마 공주님이실지도……!”
“어쩌면 하트 군대의 대장이라 불렸던 아일리시일 수도 있습니다. 그 여자… 정말로 우리들이 가는 길목에 병사들을 두지 않았어요.”
베드롱의 말대로였다.
혹시나 적들이 또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는데, 하트 군대의 병사들은 시선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아시테르와 제 9기사단을 이스트 왕국까지 보내 주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군요.”
이미 아시테르와 아일리시에게 모든 사정을 들었던지라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행동에 찬사를 보냈다.
산등성이를 넘어 제 9기사단을 마중 나온 것은 섬광 마법기사단이었다.
하인트 단장이 제 9기사단을 향해 다가왔다.
“게벨 단장!”
“하인트 단장님.”
게벨과 하인트가 시선을 마주했다.
겨우겨우 사선을 넘어와 만난 동료들의 모습에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몇몇 기사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살았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다행은 개뿔… 이번에 죽은 동료들이 몇 명인데… 우리들은 그 희생을 잊으면 안 된다…….”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암울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자 베드롱이 박수를 치며 환기했다.
“일단 그 생각은 가슴에 묻어 두고…! 지금 당장은 목숨을 건진 것에 기뻐하자.”
그의 말에 다른 기사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들의 숫자는 15명 정도.
나머지 25명은 마도사들이었다.
살아남은 제 9기사단을 살피던 하인트가 물었다.
“그런데 게벨님. 아시테르 단장과 알렌시아 단장은 보이질 않는 군요.”
“아, 두 사람은 중간에 따로 흩어졌습니다.”
“…흩어져요?”
“예. 후방에서 쫓아오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남았습니다.”
“흐음… 그러면 지금 아시테르 단장과 알렌시아 단장이 남아서 제이스쿠스와 롤스로체카를 상대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
순간 게벨이 멈칫했다.
이상한 것을 느낀 건 게벨만이 아닌 듯 했다.
베드롱이 갑자기 눈빛을 달리하며 검을 출수했다.
그러자 하인트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인트 단장님.”
“말씀하십시오 게벨 단장님.”
“저는 우리들을 추격해 오는게 제이스쿠스와 롤스로체카라고 말씀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겁니까?”
“후후후후, 그야 간단하지요. 우리들도 이 작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것이 신호였는지 뒤편에 있던 마법기사들이 일시에 제 9기사단을 향해 마법을 퍼붓기 시작했다.
“모두 밀집대형으로!!”
베드롱이 크게 소리치자 살아남은 기사들이 한곳으로 뭉쳐 방패를 들었다.
제 9기사단의 마도사들이 황급히 마법을 캐스팅했다.
이를 본 하인트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우리들이 누군지 잊은 건가?”
섬광 마법기사단은 일국의 주력을 담당하고 있는 기사단이었다.
당연히 구성원들의 실력 또한 정예들.
그래서 게벨은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마법기사단이 감히 왕국을 배신하겠다는 건가?!”
“그러면 안 됩니까?”
하인트의 마법이 한순간에 게벨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게벨이 지칠대로 지쳐 있던 탓도 있지만, 하인트 또한 마법기사단을 이끌 정도로 강한 마도사였다.
그런 하인트가 기습까지 했으니 손쓸 틈 없이 당해 버리고만 것이다.
“게벨 단장!!!!!”
“단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