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제 9기사단의 최후 (2)
게벨이 핏물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잔뜩 분노한 그의 시선이 하인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인트가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가암히…! 이스트 왕국의 마법기사가 돼서 왕국을 배신하겠다는 말인가!!!”
“쯧… 어리석은 얘기를 하는군요.”
“뭐……?!”
“이스트 왕국은 내게 무엇도 해준 게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이스트 왕국을 위해 뼈 빠지게 일했죠.”
“왕국이 네게 해준 것이 없다고……?”
“네. 이스트 왕국은 철저하게 귀족들 위주로 돌아갑니다. 썩어빠진 귀족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노력하죠. 그 밑에 있는 평민들과 천민들은 사람으로조차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게벨이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비겁한 자의 변명일 뿐이다.
이스트 왕국은 그동안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테르세우스의 유지를 받아든 후배들이 세상을 점차 그렇게 변화시킬 것이다.
그런 노력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저런 말을 내뱉다니…….
“비겁한 자였구나… 비겁한 자가 무거운 자리에 앉아 있었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요.”
“그래서… 사우스 왕국에서는 네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다 했더냐?”
“수많은 부와 명예를 약속했죠.”
“크하하하하하하─!!!”
게벨이 갑자기 크게 대소했다.
그런 게벨을 보며 하인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리석구나 하인트!!”
“뭐가 어리석다는 겁니까? 제 눈에는 그저 당신이 분노에 미쳐 그러는 걸로 밖에는 안 보이는군요.”
“재물이야 그렇다 쳐도 명예?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배신하는 자에게 어떤 명예가 있지?”
“웃기는 소리. 이곳에선 불명예일진 모르나 그곳에서는 명예로운 일이 될 거다.”
“훗. 퍽이나 그러겠구나. 한번 배신한 이가 두 번을 못할까.”
게벨의 날카로운 말에 하인트가 눈썹을 꿈틀였다.
그의 두 손에 마력이 맺혔다.
“혓바닥이 길군… 이만 죽어라.”
슈우우웅!!
콰과광!!!
하인트의 마법이 게벨의 손아귀에 막혔다.
그것을 본 하인트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기습 공격까지 성공했으니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지막까지 발악하시려는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나.”
게벨이 핏물을 뱉어내며 말했다.
그의 두 주먹에 마력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하인트가 입을 열었다.
“제 9기사단의 단장 마야무트 게벨. 투사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정말이로군요.”
“투사 출신이 아니라. 나는 투사다.”
게벨의 두 주먹이 다가드는 마력을 때렸다.
거센 폭음과 함께 하인트의 마력이 날아갔다.
한번에 안쪽까지 파고든 게벨이 주먹을 날렸다.
하인트도 근접전이라면 밀리지 않는 마도사였다.
그가 몸을 움직여 전격을 쏟아냈다.
쩌저정!!
여기저기 튀는 스파크가 게벨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흥.”
게벨이 기합을 내지르며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마력이 빗발치는데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들어오는 주먹을 보며 하인트도 조금은 당황한 눈치였다.
그가 뒤로 물러나며 상황을 살피려 했다.
하지만 게벨의 움직임은 과감했다.
퍼버벙!!
전격을 뚫고 들어온 그의 주먹이 결국 하인트의 가슴팍에 닿았다.
“흡……!”
헛바람을 집어삼킨 하인트가 뒤로 밀려났다.
주먹에 담긴 투기가 그의 갑옷을 일그러트렸다.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 있었나…….”
그러고 보니 게벨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을 제압하는데도 다들 애를 먹고 있었다.
제 9기사단의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던 것이다.
“저것이 외면받던 왕실기사단의 실력이라고……?”
자신들은 고르고 골라 뽑힌 섬광 마법기사단이었다.
이들의 실력은 당연히 의심할 여지가 없다.
헌데도 손쉽게 저들을 죽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개같은 새끼들!!!!”
“너희들만큼은 죽이고 돌아가 주겠다!!”
“죽어라!!”
마치 악귀라도 들린 것처럼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섬광 마법기사단원들을 악착같이 공격하고 있었다.
마법에 팔이 잘려도 신경쓰지 않았다.
팔을 내주고 적의 목을 베었다.
적들의 마법이 발목을 붙잡으면 발목이 나가더라도 억지로 움직였다.
“크아아아아아─!!”
쓰러져 있던 기사 한 명이 기어가서 마법기사의 발등을 찍어 버렸다.
절규하듯 소리친 그가 마법기사의 아킬레스건을 베어 버렸다.
“크아악!!”
방심하다 당해 버린 마도사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자 이때다 싶어 기사 한 명이 그 위로 올라가 칼을 찔러 넣었다.
부르르 떨던 마법기사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를 본 마법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제 9기사단은 핏물을 뒤집어쓰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마법기사들을 죽이기 위해 악을 썼다.
마력이 얼마 남지 않은 마도사들도 검을 들었다.
“크하하하하하하─!! 내 평생 너희들이 검을 드는 날을 볼 줄이야!!”
“웃지마라 네킨!”
“이런 개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라도 웃어야지! 어떠냐? 처음 들어 본 검의 무게는?”
“지랄맞게도 무겁네. 너희들은 매일 이걸 들고 수련한 거냐?”
“크흐흐흐, 당연하지. 우리들에게 검은 신체의 일부분이다.”
검을 들고 있던 기사가 바로 옆에 있던 마법기사를 찔러 죽였다.
뒤를 빼앗기고 붙잡혔던 마법기사였다.
허공에서 마법 세례가 쏟아졌다.
화염이 뒤엉키고 바람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여기저기 돌덩이가 날아들고 마력으로 만들어 낸 빛이 폭발을 일으켰다.
그 속에서도 제 9기사단은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언데드 군단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며 덤벼들었다.
까드득!!
검을 들지 못하게 된 기사가 마법기사의 팔을 깨물었다.
“이 무식한 것들이!!”
팔로 기사를 뿌리친 마법기사가 곧바로 마법을 캐스팅해 그를 죽여 버렸다.
죽어 가면서도 그는 마법기사를 보며 웃고 있었다.
“잘들어라… 우리들의 뒤에는 제일 무서운 놈이 있다… 화나면 제일 무서운 놈이…….”
“시끄럽다…! 그냥 곱게 죽어!! 죽으란 말이야!!”
이미 숨이 끊어진 기사를 상대로 마법기사가 연신 마법을 쏟아냈다.
초록빛 골렘이 허공에 나타나며 왕실기사들을 찍어 눌렀다.
녀석을 본 몇몇 기사들이 검을 들고 과감히 뛰어들었다.
검에 옅은 오러를 만들어 낸 그들이 골렘의 신체를 베어 냈다.
“검으로 골렘을……?!”
놀라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제 9기사단이 배운 검술은 루기아 가문의 검술을 바탕으로 한다.
그들은 호쾌한 검술을 선보이며 뒤편의 마법기사들에게까지 당도했다.
“뭣들하고 있는 거냐?! 다 죽어 가는 놈들이다!! 빨리 처리해!!”
섬광 마법기사단의 부단장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부단장을 노리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베드롱이었다.
빈틈을 발견한 베드롱이 바람과 같이 날아들어 검을 내질렀다.
콰아앙!!
베드롱의 검격을 막아 낸 섬광 마법기사단의 부단장, 먼트페렛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딴 공격이 내게 통할 줄 알았나?”
“역시 안통하나?”
슬쩍 미소를 지은 베드롱이 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다.
연속으로 들어간 공격이 다시 한 번 막혀버리고 말았다.
먼트페렛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작 검술 따위로 날 상대하려 하다니… 이거 완전히 자존심 상하는구만그래.”
먼트페렛의 마법은 유리였다.
그가 만들어낸 유리조각들이 수십 개로 나뉘어지며 베드롱을 향해 날아갔다.
베드롱이 숨을 고르며 검에 오러를 만들어내었다.
아직 완성된 오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강한 위력을 지닌 검이었다.
그가 크게 검을 휘두르자 다가드는 유리들이 한번에 깨져 버리고 말았다.
베드롱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사선으로 들며 뛰어들었다.
이 모습을 본 먼트페렛이 혀를 찼다.
“어리석구나.”
허공에 비산된 작은 유리조각들이 사방에서 베드롱을 향해 날아들었다.
베드롱도 날아드는 유리조각들을 보았으나 이제와 검을 돌릴 순 없었다.
거기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작은 유리조각들을 모두 방어해 낼 만큼 좋은 재주도 없었다.
결국 베드롱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나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역시 끝까지 멍청해.”
먼트페렛이 자신의 앞으로 유리벽들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쯤은 베드롱 또한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유리조각들이 베드롱의 살결을 파고들었다.
깊숙이 찔러 들어오는 고통에도 베드롱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격을 날렸다.
쩌저저정─!!!
촤라라라라라라랑──!!
만들어진 유리벽들이 깨졌다.
힘을 잃지 않은 검끝이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 광경을 본 먼트페렛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가 황급히 유리들을 더 만들어 내려 했다.
하지만 대지를 박찬 베드롱의 움직임이 한발 더 빨랐다.
“검을 얕보지 마라!!!”
일평생 검만을 단련해 온 베드롱이었다.
그의 검이 결국 먼트페렛의 얼굴에 닿았다.
스각─!
촤락!!!
날카롭게 베이는 소리와 함께 핏물이 허공에 튀었다.
베드롱의 붉게 충혈된 두 눈동자가 먼트페렛을 노려보았다.
살기 가득한 그의 눈빛을 보며 먼트페렛도 분노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대각선의 기다란 검상이 남아있었다.
“이 하등한 종자가!!!!”
“크윽, 아깝구만… 그래도 보기 좋네──.”
날카로운 유리에 배를 관통당한 베드롱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먼트페렛의 얼굴에 공격을 날리기 직전 묵직한 느낌과 함께 자신의 몸이 뒤로 밀려나는 것을 느꼈다.
뒤늦게 아래를 바라보니 커다란 유리가 자신의 배를 관통해 있었다.
그 짧은 찰나에 이런 마법을 선보인 것이다.
그래도 예전 같았으면 마법기사단의 부단장은 아예 닿지도 못할 위치에 있는 자였다.
“아쉽구나… 너무나 아쉬워…─.”
하늘을 올려다보던 베드롱이 눈물을 보였다.
축 늘어진 그의 팔이 검을 놓쳤다.
철커덩.
떨어진 검이 바닥을 뒹굴고 뒤편에선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드롱 형님!!!”
“형님!!!”
“베드롱!!!”
그의 죽음을 목격한 남은 왕실기사들이 더욱 진득한 살기를 뿜어대었다.
이제 그들의 두 눈에 남은 것은 광기뿐이었다.
“베드롱……!”
게벨 또한 그의 죽음을 목격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나 섬광 마법기사단의 단장은 강했다.
이스트 왕국에서도 실력자로 손꼽히는 인물이 바로 하인트였다.
그런 하인트를 상대로 지칠대로 지친 게벨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핏물을 잔뜩 뒤집어써서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어진 게벨이 웃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는 건가?”
하인트가 뒷짐을 진 채로 게벨을 바라보았다.
게벨의 힘 있는 시선이 하인트에게로 향했다.
“우리들의 육신은 이곳에서 죽는다. 하지만 우리들의 혼은 죽지 않고 너희들을 계속해서 쫓아다닐 것이다.”
“별 시답잖은 말을…….”
“마지막이다. 오라. 배신자여.”
“쯧…….”
게벨이 당당하게 서서 하인트의 마법과 마주했다.
그가 만들어 낸 초위 마법.
그것을 본 게벨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게벨이 남은 수하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그동안 못난 나와 함께 하느라 고생했다!! 모두 지하에서 보자꾸나!”
“게벨 단장님! 먼저 가십시오!! 저는 이 새끼만 죽이고 가겠습니다!”
“그쪽에 가서 술이나 한잔 기울이자고요!”
“으하하하 우리도 게벨 단장님과 함께여서 즐거웠습니다!”
“후아─!! 아시테르 그 자식!! 갑자기 너무 보고싶구만!!!”
“이 빌어먹을 섬광 놈들아!! 너희는 적이었던 아일리시만도 못한 놈들이구나!!”
제 9기사단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적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당당했으며 의연했다.
모두가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항복하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팔이 움직이는 한, 다리가 움직이는 한 그들은 눈앞의 적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자 했다.
이것은 섬광 마법기사단에게 치가 떨릴 정도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털썩.
몸통의 반쪽이 날아가 버린 게벨이 마지막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수하들이 있는 곳을 살폈다.
게벨을 끝으로 제 9기사단 모두가 숨을 거두었다.
그들의 시체 중 온전한 것은 단 한 구도 없었다.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려나가도, 마법에 몸이 관통당해도 끝까지 싸우고자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진짜 지독한 놈들이었습니다…….”
핏물로 얼굴을 물들인 먼트페렛이 하인트를 향해 말했다.
하인트 역시도 복잡한 표정으로 전멸한 제 9기사단을 바라보고 있었다.